소설리스트

금수의 붉은 달-85화 (85/113)

85화

“말해 보십시오. 들어드리리다.”

【부디, 부디 전해, 전해주시오…….】

새가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치료를 해주고 싶었지만 혼령에게 지나치게 많은 온기를 빼앗긴 마당에 그것을 보충해 줄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었다. 이 정도로 오래 잡혀 쥐어뜯겼다면 사방신이 온다 해도 도와줄 수 없었다.

【나는, 사혈의…… 사혈의 명으로 저승에 다녀왔소.】

“사혈? 뱀의 일족의?”

갑작스러운 말에 호접은 잠시 숨을 멈췄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다. 뱀 일족의 수장, 게다가 저승이라니. 하급의 신령이 함부로 넘어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당황한 그녀가 아무런 답도 돌려주지 못했지만 수조는 마지막 힘을 짜내서 말을 이었다.

【반드시…… 백호 님께, 알려주시오. 그자는 나를 제물로…… 제 복수를 하려 했으니.】

“무슨 복수 말입니까.”

【사, 정이…… 복잡하지만.】

수조가 붉은 피를 토해 냈다. 작은 새의 피가 부리 근처와 호접의 손바닥 안에 묻어났다. 조금이라도 힘을 내길 바라며 호접이 온기를 피워올렸으나 그다지 도움은 되지 않았다.

【백호 님의 반려와…… 관계된 일이라고.】

“……!”

연화의 일이라는 말이다. 호접은 놀라움을 숨기려 애를 썼다. 수조는 숨이 끊어질 듯하면서도 분노를 숨기지 못했다.

【사혈, 사혈……. 내가 그리도 오랫동안 뱀 일족에 봉사했거늘.】

“정신 차리세요.”

【더러운 뱀, 귀신 같은 자!】

죽어서 꺼져 가는 와중에도 분노가 목소리에 스몄다. 수조는 벌벌 떠는 날개를 감추지 못했다. 그는 흐려지는 시야를 눈꺼풀을 껌벅여 맑게 하려고 노력했다.

오갈 데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오랜 세월을 뱀의 일족 밑에서 수하 노릇을 했는데, 그 누구보다 충실하고 성실하게 일을 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제물이 되는 것뿐이었다.

만약 현무가 아닌 저승사자를 만났다면 저승에서 죽었을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 해도 그는 지금 죽어가고 있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일한 내 목숨을…… 제물로 그 반려 여인을, 저승으로 끌어들이려 하다니.】

흐흐흐 하며 수조가 웃음 비슷한 울음을 토해 냈다.

호접은 오랜 기간의 경험으로 인해 대번에 수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저승사자는 혼을 저승으로 끌어들이는 일에 탐욕스러운 법이다. 수조의 목숨을 없애 죽음의 명단에 하나의 칸을 만들고, 그곳에 연화의 이름을 써넣을 작정이었을 것이다. 운명과 어긋나게 죽는 혼이 하나 더 늘어나는 건 저승사자에게 반길 일이다.

“과연 사혈이 생각할 법한 짓이지.”

호접은 중얼거렸다. 머리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사혈은 지난번의 일 이후로 뱀 일족의 거처에서 칩거했다. 얼굴이 무너지고 힘 역시 절반으로 깎여나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뱀은 원한을 잊지 않는 일족이었고 또한 사혈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자였다.

【그, 그리고, 그리고, 백호 님의 이름도, 명, 명단에.】

수조의 숨이 깔딱거리며 넘어갔다. 마지막 말까지 마치려는 의지가 그의 목숨을 붙들고 있을 뿐이었다. 체온은 이미 내려가 얼음장 같았다. 예상치 않았던 말을 듣고 호접이 화들짝 놀라 그를 흔들었다.

“무슨 말입니까, 백호 님의 이름이라니?”

【저승의 명단……. 백, 호 님.】

결국 새의 눈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쉴 새 없이 떨리던 날개도 축 늘어졌다. 흔들어도 더 이상 움직임이 없었다. 호접은 그를 손에 든 채로 꼼짝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백호 님의 이름이 저승의 명부에?’

제대로 말을 맺지 못했으나 분명히 그런 뜻이었다. 호접은 입술을 씹었다.

물론 사방신 백호의 이름이 아닐 수도 있었다. 누가 알 것인가. 그러나 하필 백호의 반려와 함께 명부에 올라 있다는 것이 불길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호접은 수조를 그 자리에 내려놓았다. 사체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어야 했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다. 혼령들은 죽은 자에게는 손을 대지 않으니 그대로 두어도 며칠은 괜찮을 것이다. 어차피 수조의 넋이 저승으로 가기 위해 일어나는 것 역시 사흘 뒤다.

‘죽음의 명단에 백호 님의 반려가 올라가 있다는 건가.’

호접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연화의 이름이 명기되지 않았으니 다행이기는 했으나……. 그러나 현재 백호의 반려에 가장 가까운 것은 연화였다.

호접은 초조함에 잠깐 발을 굴렀다. 대체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신령계로 가서 묘우에게 알리고 도움을 먼저 구해야 할 것인가. 백호가 어디로 칩거했는지 호접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백호 님과 연화 님이 동시에 명부에 있다니.’

호접은 긴장해서 침을 삼켰다. 두 사람 모두 저승으로 끌려가는 일은 막아야 했다. 만약 연화가 죽는다면 백호는 더 큰 실의에 빠질 것이다. 그는 연화를 잊겠다며 칩거에 들어갔으나, 호접은 그가 쉽게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더 큰 상처를 입고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백호가 저승으로 가버린다면 신령계는 혼돈의 상태가 되어버릴 것이다. 관리하고 다스리는 신이 없는 세계라니. 호접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예상치 않은 사태에 옥황상제가 새로이 후대의 사방신을 빚어낸다 할지라도 그것이 얼마나 오래 걸리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의 주군인 백호가 죽음을 맞이하게 할 수는 없었다.

‘먼저 백호 님의 위치를 찾아야겠어. 찾아서 알려야…….’

판단을 내린 호접은 재빨리 나비의 모습으로 변해 전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백호에게 반드시 가능한 빨리 알려야 할 소식이었다.

* * *

만희는 눈을 깜박였다. 이제 머릿속만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뇌 전부를 아주 얇게 포를 뜨는 듯한 통증은 전신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그따위 원혼들에게 져서 살인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그는 그런 오기와 고집으로 버텨내고 있었다. 살인이 나쁜 일인가?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살았으며, 앞으로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낱 원혼들 따위의 수작에 패배해서 그들의 꼬임대로 움직이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통은 한시가 다르게 심해졌다. 거의 머릿속이 마비가 되는 느낌이었다. 전신으로 퍼진 통증으로 인해 사지가 꼬였다. 그는 침구를 쥐어뜯으며 이를 갈았다. 이따위 수작에 질 줄 아느냐. 하지만 서슬 퍼런 그 기세도 며칠간 단 한 순간도 줄어들지 않고 강도를 더해가는 고통에 한풀 꺾이고 있었다.

어차피 지은 죄가 많은데 무엇을 망설이는가. 귓가에 킬킬대는 목소리가 속삭였다. 살을 저미는 듯한 아픔에 만희의 눈앞은 시커멓게 변했다. 이성도 사라져 이제 그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오기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사실을 만희는 깨닫고 있었다.

“빌……어먹을 것들.”

숨이 헐떡였다. 그는 머리를 움켜쥐었지만 습관적인 행동일 뿐이었다. 더 이상 어디가 더 아픈지 알 수도 없었다. 자꾸만 귓속에서는 환청이 들려왔다. 고막을 두드리는 목소리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또렷했다.

【더럽게 태어난 자가 왕의 핏줄이라며 귀한 자리에 앉아 있는 꼴이 우습구나.】

【제 아비가 여동생을 범해 태어난 더러운 놈.】

귓가가 찢어질 정도로 웃음소리가 시끄러웠다. 만희는 고통 어린 소리를 내질렀다. 평소라면 누구라도 뛰어왔겠지만 그 어떤 소란이 있어도 절대 오지 말라는 엄명을 내려놨던 터라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점차 의식이 흐려지고 있어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그로서도 알 수 없었다.

사내의 크고 단단한 손이 침상을 둘러싼 휘장을 전부 찢어발겼다. 그는 일어나서 의자를 부쉈고, 검을 뽑아 책상을 내려쳤다. 바닥에 깔린 두터운 붉은 깔개가 검날에 전부 난도질되어 조각조각이 났다. 침상까지 마구 검으로 쑤시며 만희가 고성을 질렀다. 태어날 때부터 쌓여왔던 갈 데 없는 분노가 머릿속에서 터져나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개 같은 잡놈들!”

【잡놈이라니, 잡놈이라니.】

【진짜 잡놈이 누구일까.】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가 울렸다. 이토록 선명한 금속성의 목소리를, 여태까지 그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원혼들의 목소리는 끝없이 중첩해서 들려왔다.

【네놈이 죽였잖아.】

【내 아이, 내 아버지, 내 남편. 모두 네가 죽였어.】

【네 목숨은 귀중한가, 왕이여. 그렇게 모두를 죽여대고도 네 목숨은.】

【아니면 네 곁에 있던 그 여자, 보살의 가피를 받았던 그 여자가 소중한가.】

만희의 목에 핏대가 섰다. 그는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더러운 것들, 감히 누구를 입에 올리는 것이냐!”

【소중한가, 그 여자가.】

【노란 빛의 여자. 약사여래의 가피를 입은.】

만희는 원혼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순간 목소리가 입을 쩍 벌리고 웃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무저갱처럼 검고 깊은 입이 귀까지 찢어져 있었다.

【보살이 보호하는 여인이라 우리가 손을 댈 수는 없으나 너라면 다르겠지.】

목소리가 음침했다. 만희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려 하는 것인가, 하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으나 곧 손발 저 말단까지 바늘로 찔러대는 듯한 통증이 날뛰었다. 끝 간 데 없이 위로만 치솟는 고통에 그는 눈을 까뒤집었다.

미치지 않을 거라고, 더는 저 발칙한 원혼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지만 이 이상은 무리였다. 만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방 안에 우뚝 선 채 부르르 떨었다. 팔다리에 쥐가 나고 사지가 비틀렸다.

【우리 말대로 해.】

【최소한 고통을 잊을 수는 있어.】

【물론 깨어난 후의 비참함은 기대되지만 말이야.】

원혼들의 비웃음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머리를 흔들었다. 깔깔대는 소리가 아주 잠시 잦아들었다. 안구가 제멋대로 돌아가는 것을 눌러 막으면서 만희는 방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그 스스로 걸어 잠갔던 잠금장치가 수없이 많아 그것을 여는 데만도 시간이 걸렸다.

사내는 비틀거리며 걸어 나가 내관과 시녀들이 있는 곳에 달했다.

“저, 전하!”

깜짝 놀란 내관 한 명이 급히 그를 부축했다. 왕과 눈이 마주치고 내관은 놀라 흠칫하고 고개를 숙였다. 실핏줄이 전부 터진 흰자는 완전히 붉어져 그의 눈 전체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 같은 모습에 내관의 무릎이 떨렸다.

“가서…… 연화를 숨겨라.”

“숨……기라는 말씀은.”

“궁에서 가장 깊은 곳……. 떠날 수도 내가 들어갈 수도 없는 곳에 가둬.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

알 수 없는 명령에 내관과 시녀들은 전부 말을 잃었다.

만희는 이를 갈았다. 결코 연화를 그대로 놓아 보내줄 생각은 없었다. 다른 사내의 손으로 떠나보낼 수 없었다. 생각만 해도 증오와 분노로 몸이 떨렸다.

그렇다고 자신의 손아귀에서 죽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원혼들은 분명히 연화를 해하려 그를 꾀어낼 것이었다.

꾐에 넘어갈 생각은 없었지만 위험은 제거하는 편이 낫다. 왕은 번들거리는 붉은 눈을 내관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절대로 도망갈 수 없도록, 절대로 내 눈에 띄지 않도록 해라. 연화는 내 손 안에, 하지만 내가 볼 수 없는 곳에 있어야 한다.”

“며, 명을 받들겠습니다.”

“절대로 떠날 수 없도록, 절대로. 그 사내를 만날 수 없도록. 감옥에라도 가둬놔라. 내 손이 닿아서도 안 되지만 내 곁을 떠날 수는 없다.”

으르렁대는 왕의 말에 두려움에 질린 내관이 덜덜 떨며 대답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다시 길을 되짚어 방으로 돌아갔다. 그를 따라오며 부축하려는 이들의 손길도 전부 뿌리치고, 또다시 절대 방에 접근하지 말라 명을 내린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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