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수의 붉은 달-84화 (84/113)

84화

호접은 자꾸만 신경을 건드리는 뭔가의 정체를 생각하느라 밤잠을 설쳤다. 이것이 언제부터 생긴 고민인고 하며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면, 연화의 마을 사람들을 데려다가 중간지대에 넣어놓은 뒤부터였다. 저대로 두어도 괜찮은가 싶은 고민부터 시작해서……. 무엇보다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기분이 자꾸 들었다.

그날 밤도 호접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갈피가 잡히지 않는 고민이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리 고민되는지, 원인과 실체를 자신조차 몰랐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혼령들이 한 말이 자꾸 그녀를 괴롭혔다. 연화의 노란 빛, 약사여래의 온기를 알고 있던 혼령들. 인간 세상에 보살들의 가피 자체가 얼마 남지 않은 마당에 약사여래가 내리는 노란색의 빛을 알고 있다면 분명 그 혼령들이 연화를 본 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대체 그 수국의 왕이란 작자는 진짜 연화 님의 정인인 것인가, 아니면 치유능력만을 노리고 정인인 척 연기라도 하고 있는 것인가.’

백호가 칩거까지 하며 마음을 떼어내려 애쓰는 것을 보며 호접은 가슴이 아팠다. 사방신의 심장은 본래 사랑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애끓는 단심으로 저렇듯 고통을 받는다.

그런데 만약, 연화의 곁에 머무는 수국의 왕이 진실한 정인이 아니라면 호접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백호는 자신의 살을 베어내 힘의 손실까지 입으면서 수국의 멸망을 뒤로 미루도록 청룡과 거래를 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무릎에 놓인 손을 꽉 쥐었다. 아무래도 더 이상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백호의 궁에서 반짝이는 빛을 흩날리는 나비 한 마리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생각이 든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호접의 날개가 파르라니 밤하늘 아래서 빛났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일단 먼저 중간지대를 거쳐 저승으로 가볼까. 중간지대에 있는 마을 사람들도 이제 인간계로 돌려보낼 때가 되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쳐 호접은 그 일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중간지대, 인간계, 저승까지 둘러와야 하는 여정이다. 잘못 걸렸다간 다른 세계에 영향을 미치려 한 죄로 꽤나 큰 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호접은 입을 앙다물었다.

반대로 말하면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뜻이다. 나비란 원래도 세계를 오가는 존재였으므로 특별히 큰 문제만 없다면 발각될 일은 없었다. 게다가 백호는 현재 칩거 상태로 들어갔기 때문에 호접이 행동하다가 발각되어도 독단적 행동으로 책임을 질 수 있었다. 백호에게까지 피해가 갈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니 좀 더 자유로이 움직여도 된다.

‘특별히 큰 문제가 있어서도 안 되고.’

수상한 낌새를 지나치지 못하고 알아보러 가면서도 호접은 간절히 빌었다. 부디 별다른 일이 아니기를. 그저 연화가 스스로의 선택으로 정인에게 간 것이기를. 그렇다면 호접은 그냥 헛수고를 한 셈치고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 문제였다.

중간지대에는 여전히 마을 사람들이 잠들어 있었다. 더 재워두었다간 인간으로서 몸이 축나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있었다. 호접은 날갯짓을 해 잠들었던 인간들의 눈을 뜨게 했다. 이성이 돌아오지 않아 멀거니 눈만 뜬 마을 사람들은 초점 없는 시야로 눈앞의 나비를 바라보았다.

【따라오라.】

무언의 명령이 인간들의 뇌로 전달되었다. 비척거리며 일어선 이들이 호접의 날갯짓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연화의 양어머니도 일어서서 합류한 것까지 확인하고 나비는 날개를 파닥이며 푸른 빛을 흘렸다. 중간지대에 오가는 혼령들을 쫓아내고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는 신령한 불빛이었다.

원래 그들이 살던 천민부락으로 통하는 길로 호접이 안내했다. 깊은 숲속에서 연결된 길을 지나, 그들은 도깨비불에 홀린 모습으로 인간계로 걸어 나왔다.

수십 명의 사람들은 나비를 쫓아 숲 바깥까지 흘러나왔고, 호접은 그제서야 날개의 빛을 꺼뜨리고 인간들에게 이성을 돌려주었다. 곧 정신을 차린 마을 사람들이 어리둥절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 뭐지?”

마을은 전부 불타 집은 쓰러져 있었고 온통 폐허였다. 그 한가운데 사람들만 멀쩡하게 서서 서로 멀뚱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중간의 기억은 완전히 날아간 채여서 앞뒤 사정을 알 수가 없다.

다 타버린 집들을 살펴보면서 한 사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군가 일부러 다 태운 거야.”

“대체 왜? 아니 그보다 언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기억 속에 시간은 뚝 잘려나간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다행히도 다치거나 사라진 사람은 없는 모양이었으나 마을이 폐허가 되어버려 그들은 멍하니 넋이 빠졌다.

그런 그들의 뒤 깊은 숲속에서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몸집이 작은 여인이었다.

“사정 설명은 제가 드리지요.”

사람의 형태로 변한 호접은 등을 꼿꼿이 세우고 인간들의 앞에 섰다. 마을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작은 몸집이지만 어딘가 위엄이 느껴졌다. 그리고 곧 그녀의 등 뒤에서 피어오른 날개 한 쌍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시간이 없어 호접은 간략히 축약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자들이 마을을 공격해 모두를 죽이고 불태울 예정이었다는 것, 그것을 우연히 알게 된 자신이 그들을 잠시 안전한 곳에 대피시켜 잠재웠다가 지금 돌려보내 주었다는 것.

어차피 뒷사정은 호접 자신도 자세히 알지 못했으니 더 할 이야기도 없었다. 하물며 연화가 백호와 함께 신령계에서 일정한 기간을 지냈다는 사실 같은 것은 더 말해 줄 수 없었으니.

믿지 못할 말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호접의 등에서는 반투명한 날개가 파닥거렸다. 나비의 신령이야, 라며 그들은 수군거렸다. 산속의 신령들과 산주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구전되어 내려왔으니 머릿속에서는 낯선 존재도 아니었다. 실제로 본 것이 처음일 뿐이었다.

“대, 대체 왜 우리 마을을.”

“누가 그런 짓을 한 겁니까.”

“그것까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저 인간의 군사들이 한 짓이라는 것밖에는.”

호접의 대답에 마을 사람들이 고민에 빠진 표정이 되었다. 군사라니, 그렇다면 관의 짓이라는 뜻이다. 사내 한 명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혹시 연화와 연관된 일이 아닐까? 예전에 그 제사장이 연화를 찾겠다며 마을에 불을 지르고 사람을 해쳤지 않은가.”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일밖에 없어. 아니라면 왜 굳이 이렇게 별것 없는 천민의 마을에까지 군사를 보내 전부 불태우고 사람을 해하려 시도했겠나.”

“잠시만. 누가 연화 님을 찾으러 왔다는 말씀이시지요?”

익숙한 이름을 들은 호접이 재빨리 물었다. 말을 꺼냈던 사내가 대답했다.

“왕이 연화를 찾겠다며 제사장을 보내왔는데, 당시 연화가 마을에 없어서 분노한 나머지 마을 사람들을 벌주고 집을 태우며 연화를 데려오라고 협박했었지요.”

답에는 우울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양어머니가 그때가 기억이 나는지 한탄했다.

“내 딸을 데려가겠다고 마을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나를 끌고 가서 감옥에 가두고 그 아이를 협박했지요.”

“그랬군요…….”

호접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데려간 게 아니었다.

“왜 연화 님을 찾는다고 하던가요.”

“왕이 지독한 두통을 겪고 있기 때문에 치유의 능력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

역시, 수국의 왕은 연화의 정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호접은 화가 치밀었다. 여기서 굳이 화를 내색해 죄 없는 인간들을 겁먹게 할 이유는 없었으므로 그녀는 일단 감정을 삼켰다.

백호는 당연히 수국의 왕이 연화의 정인이라고 믿고 있었다. 아니라면 그저 연화를 데려와 버리면 되는 일인데.

이 정도라면 저승까지 가볼 필요도 없었다. 일단 묘우와 먼저 상의를 하고 움직일까 하며 그녀는 마을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다시 나비의 형태로 모습을 바꾸었다.

환하게 빛나는 나비의 뒷모습이 숲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마을 사람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한 채 그녀를 전송했다.

중간지대까지 다시 길을 되짚어 날아들어 온 호접은 혹시라도 뒤에 쳐졌던 인간이 있었을까 염려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모두 제대로 그녀의 인도를 받아들여 마을로 나간 것인지 남은 자는 없었다. 쥐죽은 듯 조용한 중간지대에는 간혹 길을 잃은 혼령들만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호접 정도로 강한 신령은 길 잃은 혼령 따위에게 겁을 먹을 일은 없었다. 비록 작고 가녀린 나비의 모습이라 하나 그녀는 신령계에서 손꼽히는 원로 중 한 명이었다.

그 때 어디선가 거슬리는 기척이 들려왔다. 싸움이라도 하는 듯 시끄러운 소리였다. 고요한 중간지대에서는 결코 나서는 안 되는 소음이다.

‘뭐지?’

그녀는 날갯짓을 해서 기척이 나는 쪽으로 움직였다. 근처의 혼령들이 느릿느릿 그 방향으로 가는 것 역시 불길했다. 잠시 날아가자 소음이 나는 현장이 보였다.

푸른 깃털이 허공으로 날렸다. 혼령들의 차가운 손아귀에 잡힌 푸른 몸체가 보였다. 피가 튀지는 않았으나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려 흔들리는 날개가 꺾였다. 새의 찢어지는 단말마가 울렸다.

‘신령?’

호접은 몸 안에서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녀의 기가 혼령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꺼려지는 강하고 투명하고 차가운 기운에 중간지대의 혼령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본래 몇 없어야 하는 길 잃은 원혼들은 운 나쁜 새의 존재를 느끼고 몰려들어 숫자가 많았다.

“물러나라.”

결국 사람의 형태로 변해 땅에 발을 딛고 선 호접이 목소리를 키웠다. 저승도 아니고 중간지대였다. 감히 신령계의 원로인 그녀에게 대항할 수 있는 혼령은 존재하지 않았고, 차갑고 흐릿한 형체들은 슬금슬금 물러나 저 멀리로 사라져 갔다. 그러면서도 미련이 남은 듯 이쪽을 흘긋거리며 돌아보는 시선이 남았다.

호접은 발밑에 떨어진 파란 새를 조심히 들어 올렸다. 분명히 신령이었지만 이제 사람의 형태로 변신할 힘마저 없는지 새는 쌔액거리며 간신히 숨을 쉴 뿐이었다. 호접은 직감적으로 그의 수명이 다했음을 느꼈다. 혼령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온기를 빼앗긴 모양이었다. 이건 정말로 사고로군, 하며 호접은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신령이여, 정신을 차리시오. 왜 이곳에 들어와서 혼령들의 손아귀에 잡힌 겁니까.”

【……나, 나는……. 분명히…… 향낭이 있으면…… 다가오지 않는다고…….】

숨소리 사이로 흐릿한 말소리가 섞여 들렸다. 그의 발에 매달려 있던 푸른색 작은 향낭을 발견하고 호접이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어찌나 허술하게 만들어놓았는지 안의 내용물이 전부 빠진 상태였다.

“대체 어쩌다가 이런 꼴을.”

호접은 안타깝게 그의 깃털을 쓸어주었다. 워낙 덕이 낮은 하급이라 호접이 얼굴을 마주칠 일이 없었던 신령이었다. 비록 모르는 신령이었으나 이렇듯 사고로 죽어가는 꼴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새의 신령은 감기려는 눈을 부릅뜨려 노력했다. 죽어가는 와중이라 낯선 자가 중간지대를 지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상하다는 사실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흐릿한 시야로 호접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내, 한 가지 이야기를…… 남기고, 싶소. 낯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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