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수의 붉은 달-83화 (83/113)

83화

“전하께 말씀드리실 겁니까?”

“아니,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흰 수염의 재상은 인자하게 웃었다. 다만 그의 눈은 가늘어서 속내를 알기 힘들었다.

“잠시만 기다립시다. 내 생각에, 제사장 성현께서 돌아오실 거라고 봅니다. 숨겨놓은 재산도 많고 정치적 기반도 있어 그리 쉽게 무너질 분이 아니시지요. 그럼 그 이후에 국정을 안정시키면 됩니다.”

오래된 귀족들의 권리를 놓을 생각은 없다는 뜻이었다. 오유는 회의 탁자의 말단 자리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대귀족의 자리가 하나라도 바뀌려 하면 가장 먼저 방해를 하는 것이 같은 귀족들이었다. 최소한 같은 위치에 있던 자들이 유지되면 귀족들 전체는 손해를 보지 않기 때문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재상의 현명함에 대신들이 모두 찬사를 보내며 회의가 해산되었다. 오유는 탁자에서 일어나 황영과 함께 걸어 나왔다.

젊은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재미있군요.”

“그래, 그렇지.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곳이 궁내다.”

“그러게 말입니다. 왕은 누구보다 저 유력 대신들을 믿고 있을 텐데요.”

“글세……. 왕은 믿는다기보다는 그저 두고 볼 뿐인 듯하지만. 아무튼 슬슬 저들이 왕의 날개를 자르려는 건 확실하구나.”

황영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오유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쉽지는 않을 겁니다.”

대귀족들의 썩은 속내를 목격한 젊은이의 속이 들끓었다. 그러나 그는 함부로 기분을 드러내지 않을 만큼 현명했다. 황영은 잘 자란 자신의 양자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황영과 안녕을 고하고 집으로 돌아온 오유는 곧장 지하감옥으로 내려갔다. 비록 사택이지만 군에 위치한 오유의 저택에는 감옥과 고문기구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는 오늘 아침에도 가볍게 운동 삼아 채찍을 휘둘렀던 자리로 가서 상대에게 미소와 함께 인사했다.

“심심하지 않으셨습니까, 제사장 성현.”

불과 이틀 사이에 성현의 몰골은 거의 넝마가 되어 있었다. 진동하는 피냄새에 오유는 코를 막았다. 그는 우아한 자세로 손수건을 들어 코를 가리고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호위가 다가와 그의 곁에 섰다. 오유는 허리춤에 찬 장검을 만지작거렸다.

제사장 성현의 퉁퉁한 몸뚱이에는 멀쩡한 곳이 없었다. 지독할 정도로 두들겨놓아 절반쯤 짓뭉개진 얼굴은 이제 알아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대귀족들에 대한 혐오감이 샘솟을 때마다 한 대씩만 손댄다는 것이 그만 여기까지 왔다. 딱 이틀 동안 이 지경이 될 정도로 혐오감이 넘쳐흘렀다니 새삼 자신의 뿌리 깊은 귀족에 대한 증오가 놀라울 뿐이었다.

“일전에 제사장께서 치유사 여인에 대해 강조를 하셨었지요.”

잔뜩 겁먹은 눈치의 성현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제대로 듣기 위해 혀와 이빨은 그대로 두었으니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오유는 느릿하게 호위가 가져다 놓은 차를 마셨다. 앞에서 풍기는 오물냄새와 피비린내에 차 맛이 조금 떨어져서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여인에 대해 말해 주십시오. 정말 능력이 있는 치유사입니까?”

“……그, 그 여자는…… 본, 래 그 어미가 약사여래의 가피를 받았던 터라 그것을 물려받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약사여래라, 믿기 힘들지만……. 그렇군요. 또?”

“실제로도…… 약한 노란 빛을 손에서 내기도 하고, 왕의 두통을 치료하기도 하였으니…….”

성현은 오유의 눈치를 보았다. 그가 아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이미 연화가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로 인해 자신이 쫓겨났다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했다. 오늘 아침만 해도 그 이야기를 또 꺼내냐며 채찍으로 얼굴을 얻어맞았다. 오유는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말하자면 능력은 실제로 있다는 뜻이군요.”

“저는…… 그렇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요.”

신이나 보살이나 부처가 이 세상에 있단 말인가. 참으로 믿기 힘든 일 아닌가. 젊은 장군은 피식 웃었다. 그러나 실제로 왕의 두통을 치료하는 것을 곁에서 본 자가 있다면, 적어도 한 번쯤 살펴보는 것이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일단 첫 번째 처형 명단에서 연화를 제외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준비는 착착 진행되어 가고 있었고, 혁명의 시기는 다가왔다. 오유의 진과 황영의 수도군은 함께 일거에 일어서기로 되어 있었다. 실패할 리 없는 혁명이었다. 그는 시대의 흐름이 자신의 편에 서고 있다고 확신했다.

* * *

왕의 광증은 이제 하루가 멀다 하고 도졌다.

치유사가 온 뒤 얼마간은 조용해졌던 광증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치유사마저 실패하거나 아예 그녀를 보는 것조차 거부했다. 대체 무슨 변덕이냐며 대신들이 수근거렸다.

두통에 미쳐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와중에도 만희는 최대한 주변인의 피를 보는 것을 줄이려 들어 예전처럼 공포스러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왕을 얕보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아프고 나면 만희가 꼼짝도 하지 못하고 누워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가 연화를 보기를 거부하면 그녀는 이웃 전각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없었다. 사랑하고 소중했던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버렸고 왕은 여전히 그녀가 마을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허무하구나.’

연화는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언제나 손에 들고 있던 바느질거리는 무릎 위에 놓은 채였다. 이미 끝낸 흰 호랑이 그림 자수를 계속 쓰다듬으며 그녀는 까만 눈을 깜박였다.

이 창가 자리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였다. 어째서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리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고 무더운 날이라도 이곳에만 앉으면 부드러운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누군가의 손길처럼 그렇게 사랑스럽고 포근한 흔들림이었다.

그것이 마치 백호의 손짓과 같다고 생각하며 연화는 그리움에 젖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음을 준 유일한 사람은 다른 세계의 신이다. 평생토록 다시는 볼 수 없겠구나, 하며 연화는 끝없는 그리움 속에서 천천히 익사해 갔다. 가슴 밑은 가끔 끓어오르다가 가끔 차가워졌다.

가끔 만희가 연화를 불러 손만 움켜쥐고 뚫어져라 바라볼 때가 있었다. 그 눈 속 타는 듯한 붉은 마음이 적나라해 그녀는 불편하고 슬펐다. 지독하게 깊은 업보를 쌓은 사내였으나 그 진심만은 지나칠 정도로 잘 전달되었다. 손을 꽉 쥔 만희의 손바닥이 델 듯이 뜨거웠다.

“차를 가져왔습니다.”

시녀 은연이 들어와 탁자 위에 다과를 올려놓았다. 왕이 신경 쓰지 못하는 중에도 연화의 식탁은 여전히 호화로웠다. 지나치게 많은 음식에 간혹 연화가 조금 줄여달라 요청할 때에도 은연은 조용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오늘은 궁에 신선한 과일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당과도 올렸으니 좀 드십시오.”

“고맙습니다.”

입맛은 조금도 당기지 않았지만 일부러 다과상을 차려준 은연의 성의를 보아서 연화는 애써 당과를 집어 들어 한입 베어 물었다. 파삭 하며 입 안에 끈적하고 달콤한 과자가 씹혔다. 쌉쌀한 차를 한 모금 머금으니 맛이 좋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은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맛있습니다.”

“시녀들이 기뻐하겠군요. 음식을 하는 이들은 먹는 사람이 맛있다고 하는 것이 가장 좋답니다.”

은연의 태도는 이제 그리 적대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연화를 조금쯤 살갑게 보살피는 쪽에 가까웠다. 그녀는 흘긋 지쳐 보이는 연화를 살펴보았다.

“최근 들어 식사량이 줄었습니다. 조금 더 드시는 게 좋아요.”

“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음식이 먹힐 리가 없었지만 연화는 흐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은연의 태도가 부드러워졌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은연은 딱딱하고 까칠한 태도로 일관해 왔으나 첫 만남에 봤던 끔찍한 광경을 떠올리면 그간 보여왔던 은연의 감정을 이해하고도 남아서 연화는 그녀를 싫어하지 않았다.

“전하의 두통이 오늘도 심해졌다가 오후에 간신히 진정되었다고 합니다.”

왕의 소식을 전해주는 이도 그녀였다. 은연은 손을 모은 채 서서 조근조근 말을 했다.

“전과는 달리 사람을 해치지 않으려 하시기 때문에 시녀와 내관들이 전부 방에서 물러 나와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렇군요.”

“언제까지 참으실 수 있을지 사실 저는 걱정이 됩니다.”

은연의 말이 무슨 뜻인지 공감한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희의 광증은 곁에서 보기 무서울 정도였다. 그는 스스로 자제심을 시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극한까지 참아내고 있었으나, 두통에 시달릴 때 만희의 붉은 눈은 거의 검게 보일 정도로 가라앉아 번들거렸다. 언제든 그의 가느다란 이성의 끈이 끊어지면 곧바로 피의 폭풍이 몰아닥칠 듯한 분위기였다.

컵에 물이 가득 찼을 때, 딱 한 방울만 더해지면 넘칠 것 같은 상태. 지금 만희의 상태가 그러했다.

연화는 한숨을 쉬며 손을 꾹 쥐었다. 아무리 혼령을 물러나게 만들기 힘들어졌다 한들 그녀가 곁에 있으면 잠시라도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최선을 다해 온기를 뿜어내면 원혼들이 그 온기를 쥐고 몇 발자국이라도 뒤로 물러서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희는 그것 자체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치유 직후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연화의 손을 몇 번 잡아본 뒤부터였다.

“오늘만 해도 침실 안에서 의자와 침상을 부수셨고, 모든 천과 옷을 전부 찢으셨다고 하니…….”

은연은 한숨을 쉬었다. 폭력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저 억누르고 있을 따름이고, 언젠가는 반드시 터질 것이다.

연화의 눈에도 그것이 보였다. 그녀의 눈에는 만희의 뒤에 매달린 원혼들의 선명한 모습까지도 보였다. 이제 원혼들은 더 강하고 커지고 뚜렷해졌다. 만희를 조롱하는 말을 지껄이며 연화에게까지 저주를 속삭여 왔다.

【아무리 네가 노력한다 한들 이 사내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어.】

【작은 온기로는 더 이상 만족하지 못해. 이 사내를 어둠으로 끌고 들어갈 거야.】

【네가 뭔가 할 수 있다고 느끼나 보지.】

차가운 원한으로 가득 찬 말들이다. 그러나 연화는 그들을 비난할 수 없었다. 억울하게 죽은 혼령들이다. 그녀는 그저 침묵한 채, 자신이 줄 수 있는 여래의 온기를 최대한 뽑아내어 나눠줄 뿐이었다.

만희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가 한계에 달할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는 직감이 계속해서 연화를 괴롭혔다. 그녀는 얼굴 주변을 감싸고 도는 애정 어린 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만희는 가엾지만, 과연 자신의 생명이 아까운가라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았다. 모두가 세상을 떠나고 이제 백호를 볼 길도 요원해졌다. 반쯤 자포자기한 상태로 그녀는 생명이 없는 조각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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