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수의 붉은 달-82화 (82/113)

82화

긴 흑발의 사방신은 향낭을 손바닥 안에서 굴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재미있구나, 새의 신령아.”

수조가 저 멀리 떨어져 덤불 속에 숨어 있는데도 현무는 말을 건넸다. 그는 향낭을 들어 올려 살펴보았다. 이승의 햇살과 같은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영혼들에게는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냄새일 것이다.

“재미없는 냄새로다. 그렇지?”

현무는 히죽 웃었다. 감히 저승의 주민이 될 자들에게 이승의 미련을 연상하게 하는 냄새라니. 불쾌감을 지우지 않은 얼굴로 그는 붉은 향낭을 쥐어 손 안에서 으깨어 부숴버렸다. 그의 손 안에서 독과 약이 섞인 내용물이 흘러내렸다. 더러운 것을 털 듯 손을 털어버리고 현무가 고개를 들었다.

겁에 질려서 수조는 도망가고 싶었지만 날개가 말을 듣지 않았다.

“이리 오라.”

현무의 낮은 목소리가 천둥과 같았다. 수조의 날개는 저절로 움직여 홰를 쳤다.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날아오른 몸은 저승의 공기 속을 날아 현무가 내민 손가락 위에 안착했다.

“작은 새로군. 누구의 심부름이냐.”

차마 현무의 앞에서 입이 떨어지지 않아 수조는 부리를 꾹 다물었다. 까만 콩 같은 눈이 이리저리 방황하며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것을 보다가 현무는 손을 바닥을 향해 털었다.

“신령아, 말할 수 있게 변하라.”

수조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현무의 손에서 떨어질 때는 새의 형상이었으나 땅바닥에 굴렀을 때 그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어이쿠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구르는 수조를 보며 현무는 입꼬리를 올렸다.

“자, 새의 신령아.”

“예, 예……. 현무 님. 제가 결례를…….”

“너같이 미천한 것의 사과를 받고자 함이 아니다. 누가 보냈지?”

“현, 현무 님, 한 번만 용서를 해주신다면.”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로구나, 두 번이나 물었는데도 말이다.”

공포에 질려 정신이 없는 수조의 모습을 보면서 현무가 빙긋 웃었다. 창백한 얼굴이 마치 가면과 같았다.

“정신 차려라.”

“…….”

수조는 벌벌 떨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본능적인 공포였다.

사방신은 세계의 주민들과 격이 다른 존재다. 그 차이에서 오는 위압감과 공포감이 대단했으며 현무는 거기에 저승이라는 특수성까지 더해졌다. 저승의 지배자, 죽은 자들의 왕. 언제든 산 자를 차갑고 어두운 땅 밑으로 끌고 들어갈 수 있는 자.

“왜 이곳에 왔는지 말해라. 너같이 작고 싱싱한 새가 말이야.”

“저, 저, 저……. 그것이.”

목소리가 저절로 떨려 나왔다. 들은 대로 자초지종을 말했다.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품에서 저승사자에게 전달해야 할 편지까지 꺼내어 보여주었다. 내용을 읽은 현무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고 수조를 훑어보았다. 재미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생각보다 명이 긴 놈이로다.”

“……예, 예?”

그 말은 살려주겠다는 뜻인가? 애초에 현무가 자신의 생명을 가져갈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 수조가 벌벌 떨었다. 현무는 편지를 그 자리에서 태워버렸다. 검은 불꽃이 그의 손가락 주변으로 불타올라 종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뱀 일족의 사혈이라 했던가. 이무기랍시고 사방신 다음이라 거들먹거리던 구렁이 아니냐. 그 녀석이 이런 잔머리를 굴렸다는 것인가.”

현무는 무표정으로 돌아가 턱을 두드렸다. 사혈은 나름대로 사방신들이 조금 아는 인물이었다. 용이 되어도 청룡과 같은 격이 될 수 없다며 승격을 거부한 이무기였기 때문이었다. 보통의 이무기가 아무리 승천한다 한들 사방신과 동격이 될 수는 없는 법인데, 그것을 모르는 가련한 자였다.

“그런 멍청한 녀석이 이런 짓을 한다, 라. 믿어지지 않는데.”

여전히 엎드려 있는 수조를 내려다보며 그는 웃었다.

“네 목숨을 대가로,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은 여인의 이름을 명기해 달라고 하더군. 사자의 명단에 말이다.”

“……예?”

수조는 귀를 의심했다. 목숨을 대가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한 그를 내려다보며 현무는 드물게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저승사자와 이런 식으로 거래를 한단 말이지. 네 목숨을 빼앗아 명단에 공석을 만들고, 그 자리에 죽어야 하는 여인의 이름을 넣어달라고. 그리고 그 여인의 원래 운명이 끝에 닿았을 때 비로소 네 영혼을 끌고 가라는 거래로구나. 저승사자야 좋겠지. 여분의 영혼을 하나 더 갖게 되는 일이니 그 탐욕이 어디 가겠느냐. 원래 너는 지금 죽을 운명이 아니니까 말이야.”

수조는 무릎을 덜덜 떨었다. 말하자면, 그의 주인은 수조를 죽여 그의 죽음을 통해 사자의 명단에 빈 공간을 만들려 시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그 여인의 영혼을 넣으려는 계획이었다. 본래 죽지 않았을 운명의 수조를 손수 죽여 없애서 말이다.

“운이 좋구나, 너는.”

“…….”

“저승사자 대신 나를 만났으니 말이다. 과연 그 운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면서 운 따위는 연기처럼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지, 라고 말하며 현무는 껄껄 웃었다. 간만에 재미난 광경을 보았다. 그는 품에서 꺼낸 사자의 명단을 들여다보았다.

“백호의 반려가 이미 목록에 올라 있으니 다행히도 네 목숨은 필요가 없겠구나. 쓸모없는 제물이 될 뻔했어.”

현무는 수조의 어두운 얼굴을 향해 명단을 흔들었다.

“재미있구나. 여기에 놀랍게도 백호의 이름도 있어, 물론 이것이 과연 사방신을 뜻하는지야 모르겠지만 말이다.”

저승의 뜻은 신조차 피해가지 못한다. 예상외의 말에 수조가 흠칫했다. 들어서는 안 될 비밀을 들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눈을 들어 현무를 바라보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무저갱의 동굴처럼 깊어 언뜻 뜻을 알기 어려웠다.

현무는 손을 들었다.

“돌아가라, 네 임무는 완수한 듯하니. 발칙한 놈이나 이번만은 용서해 주마.”

* * *

무관이 문관과 함께 소집되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그 일이 일주일 새 두 번이나 생기는 것을 오유는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단, 이번에는 조례가 아닌 회의였다. 그것도 유력자들만 모은 소규모의 회의였다.

“전하께서 새 제사장을 임명하기 위해 적임자를 추천하라 하시었소.”

백발의 제사장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의 곁에 있던 대신 한 명이 고개를 저었다.

“허허, 그렇군요. 허나 아직 전 제사장이 제대로 자리에서 물러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성미가 급하시지요.”

“그러나 이번 일은 조금 더 성급한 지시로군요. 뭔가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국가 제사를 지내려 하신다고 합니다.”

“제사요.”

“예에.”

재상은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 치유사 여인의 조언이라고 합디다. 전하의 두통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는 넋을 위로해야 한다고.”

“저런.”

대신이 혀를 찼다. 원형 탁자 건너편에 앉은 황영도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오유 역시 제사를 지내 병을 고치겠다는 미신과 같은 생각에 눈썹을 찡그렸다. 처음부터 의원도 아닌 치유사라는 명목으로 미모의 여인을 들여오더니, 무당이나 사기꾼인 모양이었다. 그는 싸늘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치유사, 혹은 무당이나 사기꾼이라. 참으로 너절한 단어의 조합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또 재미있지 않은가. 그 더러운 성미의 왕, 광기에 휩싸여 누구도 곁에 다가가지 못했던 사내가 데려온 여인이 천민 출신의 치유사라니.

정말 두통에 효험을 보아 데려온 것일까, 아니면 사랑에 빠져 버린 것일까. 오유는 연화 자체에도 관심이 갔다. 제법 미인이기는 했으나 그가 관심 있는 것은 그 부분이 아니었다. 대체 저 미치광이 같은 왕을 어떻게 길들였는지였다.

미인도 사기꾼도 많은 세상이다. 그중 하필 그 여자가 왕의 곁에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조금 어처구니가 없지 않습니까. 치유사도 그렇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 받아들이시는 전하도 그렇구요.”

“애초에 요즘 들어 좀 이상해지시긴 했습니다. 그 여인의 일 때문에 제사장 성현도 쫓겨난 게 아닙니까.”

“그렇지요.”

대신들은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최근 왕의 행동이 이전과 달라져 물러지고, 치유사를 유난히 감싸고 도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그 계집이 신을 받은 게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신보다는 미모에 홀리신 것 같습니다만. 천민이라 하나 상당한 미인이더군요.”

“그래요……. 어지간한 궁 안의 시녀들보다도 미인이라.”

대신들 몇이 흥미롭다는 듯한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는 광경을 오유는 경멸 어린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저치들은 왕의 폭정이 수그러드는 것보다 본인들의 주색을 즐기는 것이 더 중요한 자들이었다.

‘그래서 여태 살아서 권력을 누리고 있지.’

오유는 비웃듯 생각했다. 입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대신들의 면면을 훑는 눈매가 싸늘했다. 이곳에 모인 대신들은 대부분 때가 되면 몰아내야 할 자들이었다.

재상이 지팡이로 탁자를 두들겼다.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늙은이는 아둔하여 모르겠으니 지혜를 나눠주시지요, 대신들이여.”

“제사장 적임자를 추천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랬다가 제사장 성현이 돌아와 무죄로 판명되거나, 아니면 새 제사장을 임명해 제사를 지나치게 크게 일으키면 어쩌시려구요. 지금 국고에 그만한 돈이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대신 한 명이 반대했다. 재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걱정하는 것도 그 부분입니다. 전 제사장이 아직 물러나지 않았으니 만약 돌아오게 된다면 큰 문제가 될 것이요, 큰 제사를 지내 돈을 물 쓰듯 해도 문제일 것입니다. 그 치유사 여인이 아주 작정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천민이니 돈을 이처럼 쓸 기회가 얼마나 있었겠습니까.”

혀를 차면서 재상이 고개를 흔들었다. 자꾸만 신분을 입에 올리는 재상이 못마땅했으나 오유는 불쾌감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유력 대신들만 모인 이곳에 아직 젊은 오유가 초대받은 이유는, 그가 황영의 양자이자 가장 강한 진의 수장이기 때문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그 스스로의 정치 기반은 약하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적임자 찾는 일을 늦춰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깐깐한 인상의 대신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강퍅한 인상의 그는 탁자를 두드리며 강한 목소리를 냈다.

“대체, 여태껏 전하께서 하신 실정만 해도 감당하기 힘들 지경입니다. 그런데 치유사의 말을 듣고 큰 제사를 일으켜 전하의 두통을 고친다고요? 말이 되는 소리여야지요!”

“맞는 말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 명이 의견을 강하게 제시하자 줄줄이 동의하는 대신들의 의견이 쏟아졌다. 재상은 그럴 것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유 역시 거기에는 반대하고 싶지 않았다.

재상은 지팡이로 탁자를 두드렸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대신들의 의견을 모아, 제사장의 적임자를 찾는 것은 다소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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