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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81화 (81/113)

81화

연화는 자신의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가느다란 손가락은 혼령들에게 온기를 빼앗겨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 정도라면 조금 쉬면 바로 돌아오겠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몰랐다. 혼령들은 점점 더 힘을 얻었고 바라는 바도 커져 갔다.

“제대로 제사를 지내 혼령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돌이키지 못할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

만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돌이키지 못할 일이라. 연화는 분명 만희의 죽음을 일컫는 것이리라.

‘죽음이 두려운가?’

만희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답은 뻔히 알았다. 그는 단 한 순간도 자신에게 찾아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기억하는 한 아주 어려서부터 그래 왔다.

그는 느릿하게 말했다.

“제사라, 그 많은 넋들을 위로해 주려면 아주 큰 제사여야겠군. 내가 죽인 이들의 숫자가 적지는 않으니.”

“그렇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의식을 준비해야 다소라도 원혼들이 물러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연화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감이 어지간한 공물이나 제사로는 원혼의 한이 풀리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만희는 차갑게 웃었다.

“그러나 어쩐다, 나라의 큰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은 이미 도망가 버렸고 무능력한 수하들은 며칠째 잡지도 못하고 있으니.”

“…….”

“제사장이란 본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자격이 있는 대귀족만이 그 자리를 이어받아 제사를 올릴 수 있는 것. 특히나 국가와 왕에 관련된 것이라면 더욱 말이다.”

“그렇다면 제사장을 새로이 가려 뽑아 지내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제사장은 내가 뽑는 것이 아니다. 귀족들이 때를 보아 적임자를 추대해 올리는 것이지.”

만희는 머리를 짚었다. 귀족들의 절차란 복잡하고 느리기 짝이 없다. 연화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왕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하루빨리 진행하심이 옳을 줄로 압니다.”

“……알겠다. 어쨌든 노력은 해봐야 하겠지.”

그 자리에서 왕은 내관을 불러 재상과 백관에게 전할 말을 알렸다. 고약한 원혼의 원한을 풀기 위해 큰 제사가 필요하니, 빨리 제사장의 자리를 채울 적임자를 골라 올리라는 명이었다. 그는 명을 내리고 한숨을 쉬었다.

아까부터 이상하게 만희는 연화를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다. 간혹 시선이 마주쳐도 먼저 눈을 돌리는 것은 그였다. 연화는 이상하게 여기다가 곧 이유를 깨닫고 저 역시 고개를 숙였다. 만희가 숨기고 있던 붉디붉은 연심을, 그녀 역시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연화는 만희가 가여웠다. 비록 잔인한 사내였으나 동시에 안쓰럽고 연민이 들었다. 하지만 연정은 아니다. 그녀의 심장은 백호에게 주어버려서 남은 조각조차 없었다. 만희는 체격이 좋고 건장한 사내였으나, 그가 아무리 다정하게 군다 한들 연화는 그를 남자로서 볼 수 없었다. 아예 그럴 만한 마음이 그녀에게 남지 않은 탓이다.

“연화야.”

만희가 갑자기 소리를 내어 그녀를 불렀다. 손끝을 잡아 오는 사내의 손을 가만히 내버려 두고 연화는 고개를 들었다. 왕은 시선을 마주치며 유심히 그녀를 살폈다.

“손이 차구나.”

“그들에게 온기를 나눠준 탓에 이리 되었습니다. 조금만 쉬면 나아질 일이니 너무 염려 마셔요.”

연화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정인을 향한 연모가 아닌, 병자를 향한 연민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만희는 곧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고통스러운 기색이 만희의 미간으로 스쳐 지나갔지만 연화는 모르는 척했다. 만희의 연심에 그녀가 돌려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조심히 일어서서 물러가기 위해 절을 했다. 만희는 멀거니 물러서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물러가겠나이다, 라는 작은 인사를 끝으로 문밖으로 그녀의 치맛자락이 사라졌다.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가늘고 예쁜 옷자락이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인 그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간신히 비워낸 머릿속에, 상념이 가득 차올랐다. 연화를 향한 연심과 그것을 빌미로 한 욕망 두 가지가 한꺼번에 용솟음쳤다. 그러나 그는 억지로 모든 상념을 내리눌렀다. 지금 이것들이 솟아올라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혼령들이 만희에게 원한을 가지고 뒷덜미를 잡아채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근심거리가 아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만희의 죽음이라면, 그는 죽음을 두려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지금 와서 죽음이 꺼려지는 건 연화 때문이었다. 만희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연화가 그녀의 정인을 잊게 된다면, 그때는 비로소 손을 내밀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연화를 놓아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긴 어둠과 같은 인생 속 생전 처음으로 보게 된 빛과 같은 여인이었다.

* * *

수조는 날개를 퍼덕였다. 비록 뱀 일족의 수장인 사혈의 명을 받고 거역할 수 없어 날아오긴 했으나 역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일은 꺼림칙했다. 심지어 날아가야 하는 세계는 다른 곳도 아닌 저승이었다.

차라리 인간계나 상제의 치하에 있는 천계라면 조금 더 마음이 편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저승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저승의 주민들은 모두 지상 위의 세상에 그리움을 지니고 있다. 어떻게든 다시 밝고 따뜻한 세계로 돌아가려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생명이 있는 존재가 저승에 발을 들이면, 그것이 누구이든 간에 혼령의 흥미를 끌게 된다. 온기와 생명력을 빼앗아가기 위해 산 자를 머리통부터 집어삼키려는 본능을 지닌 것이 저승의 주민이었다.

하물며 작은 새의 모습을 한 그 정도는 아주 손쉬운 먹잇감이 될 수 있었다. 떠나기 전 사혈에게 받았던 파란색의 향낭만 아니라면 진작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독과 약이 절묘한 비율로 섞인 주머니에서 풍기는 향내는 저승의 주민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과연 사혈 님 말씀대로 하면 되는 것일까.’

두려움에 찬 채로 그는 날아가면서 주변을 살폈다. 떠도는 혼령들이 가득한 중간지대를 넘어갈 때부터 이미 저승의 주민들은 그를 주목했다. 파랗고 작은 새이니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껏 날개를 펼쳐 향내를 풍기며 날갯짓을 했다. 산 채로 생기를 빼앗겨 죽지도 살지도 못한 존재가 되어 세계의 중간에 걸쳐서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저승사자를 만나 편지를 전달하고 저승의 문서에서 이름을 확인하라니.’

사혈이 내린 명마저도 찜찜했다. 저승사자를 만나 망자의 목록에 백호의 반려와 수국의 왕이 올라 있는지를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과연 저승의 일을 하는 자가 겨우 새의 신령에 불과한 자신을 만나줄까 싶었다. 그러나 사혈은 향낭을 하나 더 주며 웃었다. 그것은 붉은색이었다. 혼령과 저승사자를 모두 이끌어 모은다고 했던 향낭이다.

살펴보니 장례에 쓰는 향이었다. 넋을 달래 저승으로 이끄는 향내이기에 망자들을 모두 만족시킨다고 했다.

‘그러나 가지고 갈 때 조심해야 한다. 혼령을 쫓는 파란색의 향낭과 넋을 달래는 붉은색의 향낭, 두 개를 헷갈리면 너는 저승의 주민이 되는 것이다. 알겠느냐?’

생각만으로도 식은땀이 난다. 사혈의 경고대로 그는 지금 품 안에 파란 향낭을 매달고 날고 있었다. 붉은 향낭은 조심히 감싸 상자에 넣어 봉인한 상태였다.

어쨌든 사혈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수조는 어쨌든 뱀의 일족 밑에서 대대로 일을 받아먹고 사는 처지였고, 사혈의 명을 거역한다면 당장 오갈 곳이 없어져 버린다. 그리고 제대로 다녀온다면 큰 상을 내리겠다고도 했다.

‘다녀오기만 하면 상도 받고 쉴 수도 있을 테니.’

요즘의 사혈은 공포스러웠지만 백호에게 다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쁘지 않은 주인이었다. 적어도 사는 데에는 문제없도록 강력한 보호를 제공해 줬기 때문이었다.

수조는 더 힘차게 날갯짓을 했다. 중간지대를 지나며 혼령이 아닌 묘한 형체들이 누워 있는 것을 보았지만 거기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빠르게 경계를 지나 저승으로 넘어가면서 그는 뼈를 엄습하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저승의 주민들이 그에게서 멀리 거리를 두고 웅성거렸다. 품 안의 향내 때문인 듯했다. 그는 자신감이 조금 붙어서 더 깊이, 더 아래로 내려갔다.

저승은 말 그대로 세계의 가장 밑바닥에 존재했다. 일반적인 혼령들은 첫 번째 저승에서 모든 죄와 벌을 마치고 나와 새로운 윤회의 굴레에 들어가지만 고약한 자들의 넋은 거기서 용서받지 못하고 더 밑바닥으로 내려간다고 했다. 108개의 층이 있다고 하던가, 끝없는 지옥의 무저갱은 잘못해서 저승에 발디딘 자마저 끌어당겨 빨아들인다고 했다.

저승의 강 앞에 서서 수조는 조심스럽게 붉은색의 향낭이 담긴 갑을 꺼냈다. 그는 재빠르게 한적한 강가에 향낭을 던지고 먼 덤불 뒤로 물러섰다.

곧 그 냄새에 혼령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생전 그들을 사랑하던 자들이 피워주었던 마지막 이승의 냄새다. 가지각색의 혼령들이 향낭의 주변에 모여서 그 향기를 맡으며 눈물지었다. 아직 저승의 강을 건너지 않아 이승의 기억이 남아 있는 자들이었다.

‘저승사자가 나타나야 하는데.’

수조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향낭 주변으로 전부 보통의 혼령들만이 모여들었다. 저승사자가 나타나야 저 혼령들을 모아 강을 건널 테니 기다리면 되는 일이기는 했으나, 저승의 공기는 기분이 좋지 않다. 가능한 빨리 편지를 전달하고 돌아가고 싶었다.

각자 다른 기억 속에 빠져 황홀한 표정으로 서 있는 혼령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났고, 수십이 모인 그 사이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다른 혼령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크기였다.

“현무…….”

수조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사방신 현무는 긴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그 위에 은색의 간단한 관을 쓰고 있었다. 땅의 그림자에서 솟아 나온 듯한 검은 옷자락이 길게 끌렸다.

그가 나타나자마자 혼령들 사이로 길이 생겨났다. 현무에게서 멀리 떨어지려 몇 걸음씩 물러나는 혼령들의 얼굴에는 희미한 공포가 서려 있었다. 비록 염라대왕과 같이 생전의 죄를 판별하는 판관은 아니지만, 현무는 이 저승을 지배하고 관리하는 자다. 일반적인 혼령들에게는 지나치게 거대한 존재였다. 위압감에 혼령들이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왜 저승사자가 아닌 저자가 이곳에 나타난 것인가. 수조는 덜덜 떨리는 손을 쥐었다. 저승사자도 두려운 존재지만 현무와는 격이 다르다. 저 멀리서 향낭을 가지고 손장난을 치는 모습조차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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