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그는 품에서 붓과 종이를 꺼내 편지를 한 장 적어 접었다. 그리고 약초를 말려 담은 향낭(香囊) 두 개를 꺼내 편지와 함께 수조에게 건네주었다.
“붉은 향낭을 던지면 저승사자가 향에 끌려 그곳으로 올 것이다. 그러면 이 편지를 그에게 주면 된다. 그 후 저승사자가 보여주는 저승의 문서에서 명단을 확인하고 오거라.”
“저, 저승사자요…….”
“그래. 명부에 백호의 반려가 있는지 확인도 해야 하고 말이다.”
말만으로도 무서웠다. 지상의 모든 존재는 저승사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심지어 사방신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저승의 명이란 지엄하기 짝이 없어,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푸른 향낭은 저승의 혼령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향이다. 죽고 싶지 않다면 꼭 이것을 품에 지니고 다녀라.”
“예, 예. 꼭 유념하겠습니다.”
“급한 일이니 이걸 가지고 당장 저승으로 떠나라. 돌아오면 내 아주 큰 상을 내려주지.”
사혈이 히죽 웃었다. 수조는 떨리는 손으로 세 가지 물건을 받아 품에 넣었다. 절을 하고 급히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사혈은 마지막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저승의 명부는 다양한 형태로 적힌다. 이름이 명시적으로 적힐 때도 있었고, 죽을 자의 지위나 더 나아가서는 숫자와 지역만 올라갈 때도 있었다. 영혼들을 끌고 가는 저승사자는 그저 저승의 주민이 늘어나는 것을 기꺼워하는 자들이었다.
죽을 운명이 아닌 자가 죽어버리면 명부에는 갑작스럽게 없던 자리가 하나 생겨난다. 이름도 아무것도 기재되어 있지 않은 무명(無名)의 자리다. 그 자리에 어떤 영혼이 지목되어 끌려갈지 아무도 모른다. 대부분의 경우 저승사자가 죽은 자를 놓치는 경우는 없었지만…….
‘뒷감당은 내가 할 테니 명부의 빈자리에 그 계집의 영혼을 끌고 가라고 하면, 저승사자가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을 리가 없다.’
저승의 일에 손댄 자는 염라대왕의 앞에 끌려가 108층의 지옥 맨 밑바닥에서 영겁의 세월을 고통받게 된다. 하지만 사혈은 히죽 웃으면서 텅 빈 술병을 두드렸다. 뭐 어떤가. 지옥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이무기만큼 어울리는 것도 없지.
수조는 저승사자에게 편지를 전달하는 역할뿐 아니라 ‘죽을 운명이 아닌 자’인데 죽게 되는 역할까지 맡게 될 것이다. 참으로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쓰임이다 하며 사혈은 스스로를 칭찬했다.
* * *
“정말 지금 떠나시려는 것입니까.”
호접이 다소 어두운 얼굴로 묻자, 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라도 떠나 있다가 돌아오면 안정이 되어 있을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안심시키려는 백호의 말에도 나비의 신령은 얼굴을 펴지 못했다. 그녀는 날개를 파닥이면서 양손을 꽉 쥐었다.
살점을 청룡에게 주었다는 것은 비단 육체적인 타격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 세계의 영양분이 다른 세계로 넘어갔다는 뜻이며, 백호 개인적으로도 그만큼 능력과 육신이 손실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만큼 큰 값을 치른 것이다.
그는 당분간 쉬면서 손실을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사방신인만큼 쉬면 빠르게 수복된다. 그래서 백호는 당분간 가장 높은 산맥의 가장 깊은 동굴에서 칩거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고 있으면 이 치졸한 욕심도 조금 가라앉지 않을까.’
백호는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마음을 접었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녀의 행복을 바라고, 삶이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 돌봐줄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날이 갈수록 애써 잠재웠던 애욕과 그리움은 크기를 키웠다.
궁 내부를 돌아보면 발소리도 크게 내지 않고 사뿐사뿐 걸어오던 연화의 모습이 보였고 정원에서는 토끼와 놀던 그녀가 보였다. 맑은 꽃차를 마시면 그 향기에 섞여 연화의 체향이 떠올랐다.
지금 당장이라도 인간계로 내려가 그녀를 데려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이 더 백호를 미치게 했다. 할 수 있지만, 해서는 안 되는 일이므로.
그는 청룡이 살점을 베어 내간 가슴부터 허리까지를 쓸어보았다. 비록 상처는 회복되었으나 그 자리는 전과 같지 않아 허전했다. 진기가 회복되지 않아 그럴 것이다. 그것이 마음의 쓸쓸함과 합쳐져 마치 그의 존재 자체가 공허해진 듯한 기분이었다.
“얼마가 걸릴지는 모른다. 다만 그리 오래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곧 상제 폐하를 뵈러 가기도 해야 하니까.”
“예.”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를 깨우러 오지 말거라. 그 무슨 일이 있더라도. 때가 되면 내가 일어날 것이다.”
“……예.”
혹시라도 연화 님의 신변에 변고가 일어나면 어쩝니까라는 말이 호접의 목구멍까지 기어나왔으나 그녀는 애써 입을 다물었다.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칩거까지 결심한 백호의 결심을 그녀가 흐트러뜨릴 필요는 없었다.
‘묘우의 말대로 애초에 인간과 연이 닿지 않으셨던 쪽이 좋았을지도.’
그녀는 연화를 좋아했지만 힘들어하는 백호를 보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호접은 백호의 옷매무새를 좀 더 다듬어주고 뒤로 물러섰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백호 님.”
“그래. 아랫것들은 그사이에 묘우와 함께 잘 보살피거라.”
인간계와 달리 신령계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평온한 편이다. 묘우와 호접이 잠시 맡는다 해도 별일이 있을 리는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발을 떼어 바람을 밟고 날아올랐다.
시원하고 서늘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러나 동시에 습기가 찬 대기이기도 했다. 신령계의 하늘은 계속해서 어둡고 비가 오락가락했다. 백호의 기분을 반영한 날씨는 그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계속 이래서야 다스리는 영토와 주민들에게 미안할 일이다.
‘그러니 이제 아예 마음을 정리해야지.’
가느다란 새처럼, 어느 순간 그에게 날아와 손끝에 앉아 지저귀던 여자. 첫 만남이 거칠었는데도 그 두려움을 감내하고 곁에 머물러주었던 여인.
‘애초에 인간의 여인에게 손을 내밀었던 자체가 잘못일지도 모른다.’
백호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람은 차갑고 공기가 습했다. 인간계에 머물고 있을 그의 여인은 아마도 정인의 부드러운 품에서 차가운 바람 따위는 느끼지 못하고 안락하게 지낼 것이다. 그거면 족하다, 하며 백호는 고개를 저었다. 긴 백발이 바람에 흩날리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립고 보고 싶다. 지금도 눈앞에는 연화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아름다운 긴 흑발과 작고 부드러운 얼굴. 그에게 매달려 침대에서 뜨겁게 달아올라 허덕이던 입술과, 품 안에 안겨 하늘을 날 때 설렘과 긴장감에 물들어 있던 눈. 조심스럽게 백호의 목덜미에 손을 감으며 가슴에 머리를 기대던 그 감촉까지도.
잊어야 할 때라는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쉽지 않았다. 슬픔과 그리움으로 가득 찬 붉은 심장이 갈비뼈 아래에서 퍼덕이며 날뛰었다. 기력이 떨어져 감정을 억누르기가 더 힘들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건방진 수국의 왕을 짓눌러 버리고 연화를 끌고라도 오고 싶었다. 백호 자신도 여태까지 미처 몰랐던 폭력적인 감정이 심장 안에서 날뛰었다. 잠시라도 마음을 놓으면 그의 한쪽 손에는 인간의 피가 묻고 다른 쪽 손에는 연화를 끌어안고 있을 것 같았다. 정인과 헤어져 슬프게 울고 있는 그녀를.
연화의 우는 얼굴을 생각하고 백호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신의 인내심으로도 고통을 헤아리고 견뎌내기가 버거웠다.
* * *
연화는 조심스럽게 왕의 곁에 앉았다. 두통에서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만희는 지독히 지친 얼굴이었다. 연화는 내관이 두려워하며 은쟁반에 받쳐 가지고 온 광목천에 물을 묻혀 왕의 이마를 닦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짙은 색의 피부 위에 붙어 있었다.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연화는 고민했다. 말을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까. 그녀는 녹초가 된 왕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침상에 누운 채 그는 붉은 눈만을 껌벅이고 있었다. 이전보다 유달리 더 힘들어하는 기색이었다. 연화는 천을 조심히 은쟁반 위에 내려놓았다.
“전하.”
“…….”
대답은 없었지만 말해 보라는 듯 만희의 눈이 연화를 향했다. 이전에 없이 힘이 빠져 보이는 그 붉은 눈에 그녀는 가슴이 아팠다. 연민에서 비롯된 감정이었다. 연화 자신 역시 지치고 슬프고 힘이 든 상태였으나 그녀는 천성적으로 다른 이가 힘든 모습을 보기 힘들어했다.
만희의 지친 얼굴을 마주하고 연화는 고민했다. 지금 그에게 원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옳은 일일까? 예전과는 달리 원혼을 물러나게 하는 데 힘이 더 많이 들었고, 그들의 원한 역시 더 커졌기 때문에 만희의 고통은 더욱 컸을 것이다. 신경이 너덜너덜해졌을 그에게 과연 과거의 잘못에 대해 말한다는 게 잘하는 짓일까.
하지만 더는 원혼을 물러나게 할 자신이 없었다. 가능하다고 해도 몇 번 남지 않았다. 그렇다면 솔직히 말해야 했다. 여래의 온기로도 그들이 물러나지 않는다면 이제 만희는 끝없는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전하의 두통은…… 육체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연화는 침착하게 말했다. 난데없는 말에 만희의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소리냐.”
“이제야 말씀드리는 것을 용서하소서. 그동안 저 역시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나가야 하나 고민했기에.”
그녀의 입술에서 한숨이 샜다. 만희는 비척거리면서도 침상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가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고 연화는 똑바로 앉아 만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적안에는 아직 핏발이 서 있었으나 맑고 제정신이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더 정확히 말해 보아라.”
만희가 요구했다. 연화는 고개를 숙였다.
“두통은 육체적인 이유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믿으실지 모르겠사오나…… 전하의 뒤에 갈퀴 같은 손을 내밀어 매달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저승에 가지 못한 혼령들입니다.”
“…….”
“저승의 주민들은 얼음장과 같이 찬 몸을 지니고 있으며, 산 자와 접촉할 때마다 생기를 앗아갑니다. 그들의 손아귀가 살아 있는 자의 몸에 닿을 때마다 고통과 통증이 샘솟아 전하께서 고역을 겪고 계신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왕은 가만히 침상에 기댔다. 그는 연화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다른 이가 말했다면 헛소리 말라며 단칼에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말하는 이가 연화였기 때문에 만희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혼령이라. 내가 죽인 자들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런.”
만희는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그래, 그간 내가 직접 죽인 자들이 많기는 했지. 그로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쌓아온 원한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살아생전에는 저항 한 번 못 하더니 죽어 귀신이 되어 내게 복수를 한다 이거로군.”
악의적으로 비웃는 듯한 말에는, 그러나 힘이 빠져 있었다. 연화는 시선을 내려서 그를 외면했다.
“처음에 왕궁으로 와 전하를 치유했을 때는 혼령들이 처음 접하는 약사여래의 온기를 조금만 얻고도 물러났지만…… 지금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