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수의 붉은 달-79화 (79/113)

79화

“……말도 마시지요.”

성현은 왕의 악행을 잔뜩 부풀려서 이야기했다. 만희는 수많은 사람을 죽여 굳이 더 부풀릴 것도 없는데도 지어낸 사실을 덧붙였다. 평민의 재산을 몰수하고 강제로 땅을 점거하는 등 자신이 했던 잘못들도 죄다 만희의 것처럼 이야기하며 그는 눈을 번뜩였다.

“나는 사실 장군과 반란군들에 심정적으로 대단히 동감하는 바요. 비록 그간은 나의 위치가 제사장이며 왕께 충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만히 있었으나…… 그 간악한 폭정을 견디기는 힘들었소. 이제 왕이 나를 죽이려 든 이상 더는 참지 않을 것이니.”

엄숙하게 선언하는 성현의 말을 들으며 오유는 웃음을 참았다. 글쎄, 왕보다 오히려 앞서서 악행을 저질렀던 자가 누구던가. 앞에 있는 사람을 바보로 아는 행태에 짜증과 화도 났지만 오히려 그 어리석음이 재미있기도 했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멍청한 작자를 바라보는 눈으로 성현을 훑어보았지만 자신의 말에 취한 제사장은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젊은 장군은 보석을 어루만지다가 천천히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그럼 우리가 더 알아야 하는 왕의 특이한 점은 더 없다는 겁니까.”

“흠……. 특이점이라.”

“알아서 우리에게 유리한 것 말입니다.”

오유는 왕의 약점을 요구하고 있었다. 성현은 그것을 재빨리 눈치채고 머리를 굴리다가 생각난 듯 말을 꺼냈다.

“아, 그 치유사. 치유사 여자 말이오. 연화라는.”

“알고 있습니다. 왕의 두통을 치유했다지요.”

“그렇소. 그 여자를 왕이 총애해서 매우 아끼지. 내가 쫓겨난 것도 그 계집 때문이고.”

성현이 치를 떨었고 오유는 무감하게 턱을 두드렸다. 군사들이 잡으러 왔던 상황은 이미 성현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들었다. 결국 약한 여인을 처참히 대우하다가 제 잘못에 제가 발을 잡힌 거 아닌가.

“아마도 그 계집의 목줄을 쥐면 왕이 꼼짝도 하지 못할 거요. 아, 하지만 왕은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자라 불과 며칠만 지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적어도 현재로서는 그 계집을 제일 아끼는 것만은 분명하오. 나를 쫓아낼 정도로 말이야.”

“그래요……. 치유사 여자. 왕의 약점으로 알아두는 건 나쁘지 않겠군요.”

오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성현은 이제 목숨이 안전하다는 태평한 생각으로 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젊은 장군은 허리춤에 애용하는 곡도를 차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서 성현의 앞에 섰다.

“……왜 그러시오, 장군?”

제사장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오유는 무심해 보였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말입니다, 제사장.”

“…….”

“당신이 축재에 능한 것과 눈치가 빠른 것 모두 그리 긍정적이지는 않습니다.”

성현의 얼굴에 불안이 스쳤다. 그는 가만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앞에 체격이 좋은 장군이 버티고 서 있어 일어서기도 마땅치 않았다. 어쩐지 위압감 있게 내려다보는 오유의 앞에서 뚱뚱한 제사장은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인지.”

“축재에 능해 빈민들의 재산을 빼앗아 자신의 배를 불렸으니 그것이 첫 번째 부정적인 면이요…….”

오유가 곡도를 빼 들었다. 스르릉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눈치가 빨라 우리들이 반란을 꾀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으니 그것이 두 번째 부정적인 면이겠지요.”

반란은 그 누구의 눈에도 뜨이지 않아야 한다. 성현은 지나치게 눈치가 빨랐다. 빈민들의 등골을 빼먹으며 누구보다 그들의 사정에 밝았기에 빨리 눈치를 챌 수도 있었다. 그 모두가 오유는 못마땅해 견딜 수가 없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깨달은 성현이 비척비척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는 양손을 들어 빌었다.

“장군, 장군……. 내 말했지 않소, 이보다 몇 배나 되는 재물이 있다고. 내 집안에 묻혀 있으니 비밀 장소를 말씀드리겠다고.”

“그랬지요. 그러나 별로 욕심이 나지 않는군요. 이를 어쩐답니까.”

오유가 싱긋 웃었다. 그는 천천히 곡도를 성현의 목덜미에 댔다. 날카롭게 갈린 칼날이 살찐 목덜미 피부에 실금을 냈다.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한 상처에 성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식은땀으로 젖었다.

“원래 내 성격으로는, 잘못한 자는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하는 것이 응당한데.”

“…….”

“어때요? 제사장. 당신이 선택해 보십시오.”

“무, 무엇을.”

“어떤 쪽이 더 좋으시겠습니까, 죄를 지은 대로 벌을 받으며 그 구차한 삶을 더 연명할지, 아니면 이 자리에서 깔끔하게 생을 마감할지 말입니다.”

오유의 젊다 못해 어린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해 보였다. 오후의 햇살 속에서 솜털이 보송보송한 젊은이의 미소는 미래처럼 찬란했다. 그러나 성현의 눈에는 저승사자와 다름없었다.

“최소한 자신의 마지막 정도는 스스로 정하게 할 만한 자비심이 나에게 있습니다. 그것이 왕과 나의 다른 점이겠지요. 자, 어떠십니까, 제사장.”

오유는 진심이다. 무릎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곡도를 늘어뜨리고 그는 참을성 있게 대답을 기다렸다. 정말 성현 자신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태도였다.

* * *

얼굴의 절반이 타버린 이후 뱀 일족의 수장 사혈은 자신의 집에서 긴 칩거에 들어갔다. 이무기였던 그의 힘 역시 절반으로 깎여버렸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수장이 사방신인 백호에게 벌을 받고, 수장의 딸인 사영은 꼬리까지 잘려 유배 갔기에 뱀 일족의 기세는 수그러들었다.

“이 모든 것이 다 그 계집 때문이다.”

사혈은 이를 갈며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그의 앞마당에는 뱀 일족의 수하인 수조가 엎드려 있었다. 사혈이 길게 찢어진 눈을 굴려 그를 노려보았다.

“그 계집을 죽여야 해.”

사혈이 으르렁댔다. 가느다란 수염을 소중하게 길러 다듬고 있던 그는 얼굴이 죄다 녹아버린 후 모든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한때 강인하고 교활하던 중년 남자는 이제 흉하게 비늘로 절반쯤 덮여 있는 모습을 숨기지도 못했다.

그의 앞에 엎드린 수조는 덜덜 떨고 있었다. 뱀 일족의 주인이 망가진 것은 이미 꽤 시간이 되었다. 사혈은 언제든 수조처럼 작은 새 따위는 삼켜버릴 수 있는 강한 뱀이었다. 뱀 일족의 한낱 수하인 그를 굳이 불러다 놓고 술을 마시며 분노를 토로하는 이유를 그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사, 사혈 님……. 부디 고정을.”

“고정? 고정이라. 고정이라! 화를 내지 말라 이거겠지!”

불을 뿜는 듯 분노가 타올랐다. 취기로 흐려진 노란 눈이 번들거렸다.

“내가 화를 내지 않는다고 내 처지가 달라진다고 생각하느냐? 그리고 이제 너 따위가 내 기분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냐?!”

갈데없는 분노는 기이한 방향으로 터진다. 소리를 지르고서 그는 손을 떨면서 수조를 내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찢어 죽일 듯한 살기가 넘실거려 수조는 바닥에 이마를 댄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가 나앉은 정원 한켠에는 인적이 아예 없었다. 모두가 사혈의 분노에서 몸을 피하기 위해 숨어 있어 쥐죽은 듯 고요했다.

“더러운 계집.”

사혈은 이를 갈면서 다시 술을 마셨다. 술잔을 들고서 갑자기 그는 킬킬대면서 웃었다. 기분은 오락가락했다. 술잔에서 맑은 술이 넘쳐 흘렀다.

“내 가만히 둘 줄 아느냐.”

뱀 일족의 수장은 백호에게서 벌을 받은 이후 계속해서 실의에 빠진 채 술을 마셨으나 신령계의 소식에 귀를 닫지는 않았다. 그 계집이 다시 인간계로 갔고 그 때문에 백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소식 역시 들었다. 정식 반려로 들일 듯 그렇게 난리를 치더니 결국 그 꼴이다. 그 계집 때문에 자신의 얼굴은 이 꼴이 되었고 힘은 절반으로 깎여버렸는데.

그는 술에 젖은 손을 들어 비늘이 드러난 얼굴을 쓰다듬었다. 흉하게 드러난 비늘은 부덕의 소치다. 겉으로 명명백백히 자신의 죄를 드러내는 벌이었다. 사혈은 독한 술을 한 번에 부어 넣고 히죽 웃었다.

“난 그 계집이 명대로 죽지 못하길 바란다.”

저승사자는 탐욕스럽다. 명분만 만들어준다면 그들은 언제든 지상의 모든 영혼을 저승으로 끌고 갈 준비가 되어 있다. 중요한 건 미끼를 던지는 것이었다.

“한 번쯤 해볼 만한 도박이지.”

사혈의 찢어진 눈이 노랗게 빛나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백호와 연화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거슬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짓눌러 죽이고 싶었다.

힘만 있었다면. 그러나 그가 용이 되기를 선택했어도 사방신과 어깨를 겨룰 수는 없다. 그것만은 자신도 알고 있었다.

“수조, 네놈.”

“예, 예 사혈 님.”

수조가 황급히 대답했다. 눈은 결코 들지 않아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였다.

“너는 아주 오래 뱀 일족에 봉사해 왔지. 안 그러냐.”

“그렇습니다.”

“내 너에게 제대로 된 보상 하나 준 적이 없는 듯하구나. 이번 기회에 상을 주어야겠다. 그러나 아무런 명목 없이 상을 줄 수는 없으니 내 부탁 하나를 들어주겠느냐?”

사혈의 목소리는 갑작스럽게 달콤하게 들렸다. 수조는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을 피했다. 뱀의 눈은 함부로 마주 보면 안 된다. 눈을 바라보면 사냥감을 현혹해 마비시키는 자들이었다.

“부탁이라 하시면…….”

“별것 아니다. 내가 주는 편지를 들고 저승에 한 번 다녀오면 된다.”

“저, 저승 말씀이십니까.”

수조는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과연 그를 따로 불러 술을 마신 이유가 있었다. 그는 덜덜 떨면서도 땅에 이마를 대며 간절히 말했다.

“저승은…… 겁 많은 제게는 너무도 멀고 무서운 곳입니다. 부디 다른 이에게 명을 내리시면.”

“먼 길이니 네가 다녀와야지. 가장 몸이 가볍고 빠른 새 아니더냐.”

“하오나 저는 힘이 없어 가는 길에 죽을지도 모릅니다. 부디 다른 이에게…….”

벌벌 떠는 수조를 내려다보며 사혈이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그는 설득하기도 귀찮아져서 말없이 수조의 머리통을 흘끔거렸다. 그냥 다른 놈을 찾고 이놈은 그냥 여기서 먹어버릴까. 새를 맛본 지도 오래되었다.

보통 신령계에서 일반 금수가 아닌, 덕을 쌓아 신령이 된 자들끼리 잡아먹으면 중죄로 처벌받았으나 사혈은 개의치 않았다. 이 깊은 땅 밑 전각에서 새 한 마리쯤 없어진대도 대체 누가 알아챌 것인가.

사혈에게서 말이 없고 대신 살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예민하게 알아챈 수조가 거의 울기 직전이 되었다. 그는 사혈이 어떤 성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용서를, 제발.”

“그래서, 내 부탁을 못 들어주겠다?”

사혈은 천천히 술잔을 톡톡 두드렸다. 뱀 일족 특유의 긴 손톱이 자기 표면에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아무런 말도 없이 사혈은 그저 수조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이래서는 안 된다. 수조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선택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죽느냐, 아니면 목숨을 걸고 저승에 다녀오느냐 둘 중 하나였다. 사혈이 작정하고 그의 목숨을 취하려 한다면 수조는 이 자리에서 살아서 걸어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저승은 아주 낮은 확률로라도 살아올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떨면서 슬쩍 시선을 올려 사혈을 마주 보았다가 기겁을 하고 다시 땅에 이마를 박았다. 사혈의 눈은 이제 거의 시뻘건 색으로 변해 있었다.

“어쩌겠느냐.”

묻는 말투만은 부드러웠다. 수조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구나.”

기꺼운 듯 사혈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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