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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78화 (78/113)

78화

결정을 내린 청룡은 서서히 수인(手印)을 맺었다. 왕과 궁의 보호를 위해 진을 설치하기 위함이었다. 가능하면 운명에 거스르지 않도록, 직접적인 타격이 아닌 빙빙 도는 미로에 가까운 진이었다. 공격 의사를 가진 인간들이 들어오더라도 죽지는 않고 그저 같은 자리에서 돌기만 하게 될 것이다.

“물론 내가 만든 것이니 신이 오더라도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다만.”

궁의 밑으로 희미한 원과 글자가 빛나다가 사라졌다. 청룡은 싱긋 웃었다. 이것을 설치해 두었으니 나중에 백호가 그에게 약속의 증거를 제시하라며 들이대도 이 흔적을 보이면 될 것이다.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어 용궁으로 향했다.

이제 슬슬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을 준비해야 할 때였다. 바닷속 주민들을 위해 그는 깊은 바다 밑 땅으로 들어가 다음 해를 위한 준비를 해 와야 했다. 바다 밑의 땅에 묻혀 있는 청룡의 본신을 몇 번씩 뒤집어주어야 섬이 솟고 해구가 가라앉아 바닷속 주민들이 살기에 풍족한 땅이 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본신을 몇 번쯤 뒤집는’ 행위는 대단히 조심스럽게 행해야 지진이나 화산을 피할 수 있어, 적어도 몇 달 이상은 걸리는 작업이었다.

그 동안은 밖에 나와서 수국의 상태를 지켜볼 수 없었다. 말하자면 나중에 백호가 와서 뭐라 한들 몇 달간 그는 대답을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청룡은 자신이 설치한 진 쪽을 흘긋 내려다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난 최선을 다했으니 나머지는 백호, 네놈이 알아서 해라.”

***

사영은 비록 자신의 아비만큼은 아니었으나 제법 수련을 오래 한 신령이었다. 아비에게 꼬리를 잘리고 힘을 빼앗겼지만 그 예민한 감각만은 남아 있어, 인간들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들을 눈치채고는 했다.

그녀는 공기 중으로 혀를 날름거렸다. 뱀은 혀를 통해 냄새를 맡는다. 얼마 전부터 수국의 공기 중에는 점차 비릿한 피냄새가 감돌기 시작했다.

‘조만간 무슨 일이 나긴 하겠다.’

그녀는 조금 걱정스러운 기분으로 정원의 연못 앞에 앉아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수국의 왕은 폭군이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오로지 그의 폭력적이고 잔인한 성정에 신하들이 반기를 들지 못하기 때문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상태였다. 사영은 신령이기 때문에 인간은 잘 몰랐지만 이 정도라면 누군가 일을 벌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사영은 조심스럽게 품 안에서 노리개를 꺼내 들었다.

언젠가 청수희가 건네주었던 물건이다. 백호의 반려만이 가질 수 있다는 노리개, 거래의 대가로 백호가 청수희에게 주었다던가. 이것을 가지고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었지, 하며 사영은 생각에 잠겼다.

노리개는 푸른 비단에 붉은 보석이 장식된 아름다운 물건이었다. 부드러운 비단술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자 윤기 흐르는 보석이 반짝였다.

‘이것을 지닌 자를, 세계의 규칙은 사방신의 반려로 인식한다고 했던가.’

청수희가 주며 해줬던 말이다. 굳이 백호뿐 아니라 사방신 모두에게 이런 물건이 하나씩 있다고 들었다. 규칙이 반려로 인식한대도 백호 본인이 코웃음 쳐버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그리 중요한 사실은 아니지만.

그녀는 고요한 왕의 전각 쪽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부터 왕은 다시 두통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달리 연화도 쉽사리 치유를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궁내는 고요했으나 안정된 것이 아닌 일촉즉발의 고요함이었다. 밤이면 때때로 왕의 고통 어린 신음소리가 전각 바깥까지 흘러나왔다.

바람도 없는 공기 속에 연못의 수면에 동심원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사영은 조금 놀라서 수면을 들여다보았다. 맑디맑은 물속에 비춰지는 그림자는 사영 본인의 것이 아니다. 그 안에서는 청수희가 생긋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수희 님.”

“오랜만이야, 사영 아가씨.”

밝은 목소리가 경쾌하게 웃었다. 그녀는 물속에서 손을 뻗어 사영이 들고 있던 노리개를 한 번 만지작거렸다.

“이걸 가지고 있구나. 그래, 언젠가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지.”

“쓸모라……. 글쎄요. 무슨 쓸모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동안 대체 어디 있었던 거예요? 한동안 안 보였잖아요.”

오랜만에 보게 된 청수희의 얼굴이 나름 반가워서 사영은 조금 툴툴거렸다. 청수희는 방긋 웃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나 보고 싶었나 봐, 사영 아가씨.”

“누가요?”

“아니야? 섭섭한걸.”

까르르 웃는 소리가 청명했다.

“실은 인간계 오가는 걸 청룡 님한테 걸렸었거든. 이제 그 양반이 바다 밑 땅으로 들어간 모양이라 다시 올 수 있게 되었어.”

“바다 밑 땅이요?”

“응, 그런 게 있어. 섬하고 해구 만들려고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러 들어가는 거.”

그러고 보니 신령계에서는 지렁이들이 땅 속을 돌아다니며 꿈틀거려 토양을 비옥하게 만든다. 사영은 비슷하게 이해를 하면서도 지렁이와 용의 움직임이 어딘가 닮은 데가 있다는 사실에 약간 충격을 받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수희는 말을 이었다.

“조금 뒤숭숭해. 주작 님께 다녀왔는데 그분이 인간계의 흐름에 속도가 붙을 거라고 그러셨어.”

“……역시 그런가요.”

“응, 사영 아가씨도 가능하면 몸을 피하는 게 낫지 않겠어? 괜히 상관도 없는 인간계에서 싸움에 휘말려 다치기라도 하면 속상하잖아.”

상냥한 청수희의 제안에 사영은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인간계에 온 목적도 달성했고. 연화를 자세히 살펴보고 미워하는 데 실패도 했잖아.”

……상냥하긴 하지만 심술궂기도 하다. 입을 삐죽이는 사영의 기색을 깨닫고 청수희는 애써 미소를 숨겼다.

그러나 사영에게서 나온 대답은 예상 외였다.

“아뇨, 전 그냥 이곳에 있을래요.”

“왜? 아니, 진짜?”

청수희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그녀는 아예 연못 속에서 고개를 내밀기까지 했다. 사영은 기겁하면서 그녀의 이마를 밀어서 물속으로 다시 넣었다. 꼬로록 하는 소리를 내며 청수희가 다시 가라앉았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래요!”

“아니, 그렇다고 이렇게 막 밀어 넣으면……. 그보다 왜?”

사영은 별달리 할 말이 없어서 입을 우물거리며 손톱을 만지작댔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냥…… 있고 싶네요.”

“…….”

“연화 님도 어딘가 불안해 보이고, 상황도 불안하고 그래요. 내가 있는다고 뭐 힘이 되지야 않겠지만.”

물속에서 청수희가 팔짱을 끼었다. 그녀는 입을 삐죽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사영 아가씨의 뜻이 그렇다면야. 하지만 안전은 내가 보장 못 해. 알고 있지?”

“알아요. 그래서 여기 있겠다는 건데, 뭐.”

“생각보다 의리 있네. 아, 비꼬는 거 아니고 좋은 뜻이야. 칭찬이라고.”

사실 사영 자신 역시 왜 이곳에 머물고 싶은지 제대로 알 수는 없었다. 그저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상황이 어찌될지 모르니 자신의 눈으로 보고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힘을 보태야 한다는.

어쩌면 자신의 힘으로 누군가 살고, 상황이 바뀔지도 모른다. 평생 뱀 일족의 전각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사혈의 딸로만 살아왔던 사영으로서는 대단히 큰 결심이었다.

“좋아, 그럼 나도 상황을 지켜보다가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줄게.”

청수희가 생긋 웃었다. 사영은 수면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다시 수면 위로 청수희의 흰 얼굴이 솟아나왔다.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띄운 채로 흰 이마를 사영의 이마에 댔다.

“너무 외로워하지 말고, 사영 아가씨.”

“…….”

마치 나온 적이 없는 것처럼, 청수희의 신형은 금세 연못 속으로 사라졌다. 물속을 들여다보는 사영의 눈앞에는 이제 보통의 수면처럼 자신의 얼굴만이 비치고 있었다.

그녀는 이마에 잠깐 느껴졌던 차갑고 습기 찬 피부를 기억했다. 사영은 곧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여간 오지랖은 넓어서.”

어쩌면 그 투덜거림은 자신과 청수희 둘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

오유는 앞에 엎드린 부하 장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성현의 말대로 쫓아가 그의 재물을 가져온 참이었다. 곁에 잔뜩 쌓인 짐을 보던 오유는 재물의 목록을 적은 종이를 펼쳐 쭉 읽었다.

“참 대단한 자로다. 이것도 일부일 텐데, 이렇게나 많은 재물을 땅 밑에 파묻어놓다니.”

보석이 수십 개였다. 그중에는 부호로 유명한 상인이 강도를 만나 빼앗겼다는 값진 것들도 섞여 있었다. 강도가 상인의 일행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데, 과연 그것들과 제사장이 한 패였던 건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보석이 한 번에 들어온 것은 나쁘지 않다. 비록 장물이기 때문에 처분해서 금이 들어오는 데는 한참 시일이 걸릴 것이나, 어차피 이만큼의 추가 자금이 필요한 시기는 조금 기다려도 괜찮다. 군자금이 필요하기는 해도 지금 당장은 아닌 것이다.

짐을 전부 풀어 보석들을 앞에 늘어두고서 그는 만족스럽게 그 반짝이는 빛을 바라보았다. 오유는 원래 재물에 욕심이 없는 자였다. 그의 만족스러움은 오로지 반란의 성공에 한 발짝 더 다가섰다는 데서 나왔다.

“제사장을 모셔 와라.”

“예.”

성현은 집의 지하에 감금되어 있었다. 감옥이 아니라 나름대로 잘 갖추어진 방에 갇혀 있을 따름이었으나 제사장은 나름 불만이 많았다. 감히 대귀족인 그가 직접 투항을 했는데 초라한 방에 가둬놓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어서 오십시오, 제사장.”

“장군! 융숭한 접대에 내 몸 둘 바를 모르겠소.”

성현은 자신의 말대로 보석을 파내 온 것을 보고 배를 내밀어 뽐냈다. 그는 거만한 자세로 오유가 권하는 의자에 앉아 차를 마셨다. 차가 쓰다며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끓일 것을 요구하는 말에 오유는 선선히 그러라며 하인을 불러주었다.

“자, 아셨소. 장군? 제게는 이러한 재물이 이에 열 배만큼 있소. 집 안에 묻혀 있지요. 만약 집 안에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든지 비밀 장소를 알려드리겠소.”

“그것 대단하군요. 역시 제사장은 대단하십니다.”

“축재(蓄財)란 나쁜 말로 쓰이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지요. 자랑하고 싶지는 않으나 저는 그 방면으로 대단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오.”

성현은 은근슬쩍 자신의 재주를 내밀었다. 오유는 그의 얕은 수가 빤히 보이는 듯해 그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성현은 오유가 자신을 살려줄 거라는 데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눈치였다. 그는 배를 내밀고 다시 끓여온 차를 마시다가 몹시 못마땅해하는 소리를 하인에게 쏘아붙였다. 하인의 눈이 슬쩍 오유에게 돌아왔으나 그는 턱짓으로 나가라는 명을 대신했다. 하인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고 밖으로 나섰다.

방 안에는 단둘만이 남았다. 오유는 비밀 이야기를 하는 듯 허리를 앞으로 굽혔다.

“제사장께서 떠나오시기 전까지 왕께서는 최근 들어 어떠셨습니까. 그래도 잔인한 성정이 조금 무뎌지셨다고 들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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