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돌아나와서 만희는 분노가 극에 달해 피식거리며 웃었다. 그는 상처받은 맹수처럼 방 안을 걸어다녔다. 서서히 머리가 조여들고 있었다.
또다시 두통인가, 그 고통스러운 통증. 그러나 시작되는 뇌 속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만희는 어느 쪽이 더 아픈지 알 수가 없었다. 심장이 저며지듯 아팠다.
‘내가 왜 그 계집의 정인 따위에게 질투를 느껴야 하는가.’
만희는 이를 갈았다. 자신의 심장이 불타는 듯한 이 고통이 연화의 잘못도, 그 정인의 잘못도 아니라는 사실이 더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오로지 추한 것은 만희 자신뿐이었다. 아마도 온유한 정을 나누며 평범하게 행복했을 연화와 그녀의 정인 사이를 갈라놓고, 그녀를 억지로 끌어와 감금하고 있는 폭군.
‘그따위 천한 계집은 얼마든지 불러 능욕하고 죽일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연화가 대단한 미인이라고는 하지만 나라를 뒤지면 그만 한 미인이야 몇쯤 구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해보아도 만희는 더 이상 연화 외의 여인을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마치 그녀의 손아귀에 펄떡이는 뇌와 심장이 쥐인 양, 그는 홀린 듯 어떤 아름다운 여인과 육신을 상상해도 단숨에 연화의 생각으로 돌아왔다.
머리가 조여들어 왔다. 가슴이 함께 조여들어 와 숨조차 쉬기가 힘들어져 그는 헐떡이며 자신의 침상 위로 쓰러졌다.
“저, 전하, 치유사님을 오시라 이르겠습니다…….”
덜덜 떠는 목소리는 시녀의 것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만희는 허리춤에 달린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고통에 찬 적안이 부르르 떨렸다.
또다시 귓가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에 보이는 모든 생명을 죽이라고. 손아귀에서 검이 철컹 하고 뽑혀 나왔다. 내관들에 의해 억지로 방 안으로 밀려 들어온 어린 시녀는 울면서 그의 발치에 엎드려 있었다. 죽기 싫어서 대신 들여보낸 희생양이었다.
만희는 잠시 붉어진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아 눈을 깜박였다.
“……나가.”
죽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보다 먼저, 연화가 매달리며 죽이지 말라고 하는 목소리가 먼저 떠올랐다. 만희는 자신의 의지로 연화의 뜻을 따르고자 했다. 그 순간 머리가 지끈거리며 한층 더 조여들었으나 그는 견뎌내려고 발버둥 쳤다.
“치, 치유사님을.”
“안 돼. 절대로 데려오지 마라. 그리고 빨리…… 나가.”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라. 그 누구도 나타나지 마. 피를 불러오는 손에서 전부 멀어져라. 만희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 이마를 침상에 문질렀다. 왕의 뜻이 확고해 보이자 시녀는 머뭇거리다가 재빨리 방을 나갔다.
처음이었다. 혼자 아무도 없이, 화풀이도 하지 않고 두통을 견뎌내는 것은. 과연 이 고통이 끝나기는 하는 것일까 싶었지만 그는 피식 웃었다. 누가 이기는지 한번 해보자는 심산도 들었다.
한동안 밖에서 걱정 가득하게 안을 살피던 내관과 시녀들은 왕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들었다. 섬뜩하도록 고통스러운 소리였다. 비명은 때로 높았다가 시간이 지나며 지쳐서 낮아져 갔다. 그르릉대는 짐승의 소리와도 닮아 있었다.
“과연 치유사님을 불러오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시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양손을 잡고 물어보았다. 손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한두 시간이 지나자 방에서는 비명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이상한 불안감에 모두가 웅성거리고 있었다.
“왕명이긴 하나…… 어길 수밖에 없겠군.”
결국 내관 중 한 명이 연화를 불러왔다. 그녀 역시 몹시 지치고 힘겨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왕이 고통에 시달린다는 말에 별다른 불평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제 왕의 방은 쥐죽은 듯 조용한 고요만이 감돌고 있었다. 숨 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한 공간 안으로 연화가 발을 들였다. 굳이 따라 들어오려는 시녀와 내관들을 만류한 채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비록 그가 연화의 청을 거절하며 화를 내기는 했으나 치유를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세상 고통받는 자들을 모두 감싸 안는 것이 약사여래의 자비인 법, 어떤 자라도 여래의 손길 아래 편안히 잠들도록 하는 것이 그녀의 힘에 대한 의무였다.
침상 위에서 만희가 엎드려 있었다. 거대하고 무섭던 왕의 뒷모습은 너무 고요해서 마치 죽은 게 아닐까 겁이 더럭 날 정도였다. 연화는 천천히 그의 뒤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간헐적으로 그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노란 빛과 함께 만희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순간 만희가 그녀의 손을 쳐내며 일어나 앉았다. 놀라서 연화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새빨간 적안은 지나친 고통으로 인해 실핏줄이 터져 흰자까지 전부 벌겋게 변해 있었다. 고통을 참느라 몸부림쳐서 머리는 산발이었고, 식은땀에 젖은 얼굴이 번들거렸다.
도깨비 같은 몰골을 하고 만희가 연화의 양어깨를 잡았다. 너무 거센 손길이라 피부에 멍이 들 지경이었다.
“전, 전하?”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으르렁대는 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오지 말라고…….”
짐승 같은 목소리를 내는 그의 손등을 자신의 손으로 조심히 감싸면서 연화가 그와 눈을 맞췄다. 무서워서 무릎이 떨렸지만 그래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지금 많이 고통스러우실 겁니다. 제가 치유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
연화의 검은 눈은 부드럽고 순했다. 비록 지울 수 없는 고통과 슬픔에 찌들어 있었지만 만희를 향한 원망 같은 것은 없었다. 그 눈에 넋을 잃고 만희는 손을 내렸다. 그녀의 눈 안에 있는 평화와 안식에 그는 안도감을 느끼며 매혹되었다.
이래서 너를 부르면 안 되었던 것이다. 만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머리를 조여드는 고통이 극심해 코 안에서 단내가 나는데도 연화의 얼굴을 보자 그것은 견딜 만해졌다. 두통은 여전히 구토가 날 정도로 심했지만 그녀의 존재만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생겨났다. 그 사실을 깨닫고 만희는 절망적인 심정이 되었다.
연화는 천천히 만희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사내는 더 이상 그녀의 팔을 잡지 않고 손에서 힘이 빠져 늘어뜨렸다. 가만히 그녀와 시선만 맞추고 있는 적안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부드럽게 손을 움직였다.
“괜찮습니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
“…….”
그녀의 눈에 만희의 뒤에 붙은 혼령들이 보였다. 그의 목덜미를 잡고 연화의 손을 잡아 오는 갈퀴 같은 손들은 이전보다 훨씬 또렷하고 악착같았다. 그녀는 얼음장 같은 손아귀를 느끼며 입을 꾹 다물었다.
약사여래의 온기를 나눠주었으나 원혼들이 쉽게 물러가지 않았다. 뻥 뚫린 눈구멍을 연화의 코앞에 가까이 들이대고 원혼들이 중얼거렸다.
【이제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여인이여.】
【시간과 함께 원한이 깊어져 이 사내의 고통은 더 이상 줄어들 수 없다.】
‘제발, 물러가 주세요.’
연화가 애원했으나 원혼들은 고집스러웠다. 그녀에게서 약사여래의 온기와 빛을 빼앗아가면서도 탐욕스럽게 더 내놓으라며 그녀의 팔과 손을 잡았다.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어 그녀는 식은땀을 흘렸다. 체온이 점차 낮아지는 것 같았다. 최대한도로 힘을 짜냈지만 더 이상은 불가능해 연화의 얼굴이 점차 창백해지고 있었다.
“연화야!”
만희가 그녀를 부르며 급히 흔들었다. 연화는 흠칫하며 혼령들에게서 눈을 돌려 만희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핏기가 빠져 가는 연화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러는 거냐. 너무 힘이 드는 게냐?”
적안에 담긴 뚜렷한 애정과 걱정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연화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그녀는 혼령들에게 힘을 빼앗겨 전신이 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체온이 낮아져 차가운 연화의 손을 눈치채고 만희가 놀라 그녀의 손을 잡고 연화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넓고 따스한 품이었다. 체온이 뜨거운 사내는 쉼 없이 그녀의 팔과 등을 쓰다듬으며 두드렸다.
“그만해라. 그만 두어라. 이렇게까지 몸이 차가워지다니.”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목소리는 애틋했다. 연화는 눈을 깜박였다.
왜 여태까지 몰랐을까.
만희의 애정은 선명했다. 그의 성격만큼 혼란스러웠으나 동시에 눈을 감지 않으면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뚜렷한 연심과 걱정이 목소리에 드러나 있었다. 어깨와 등을 쓰다듬는 손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남자의 어깨 너머로 혼령들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가까이에 있었으나 다행히 거리는 조금 멀어져 있었다. 원혼들은 그러나 언제든 덤빌 수 있는 태세로 눈을 빛내며 그들의 주위를 돌았다.
“이제 괜찮습니다, 전하.”
원혼에 대하여 사내에게 말해야 할 때였다. 더는 그녀 혼자 간직하고 있을 비밀이 아니었다. 그가 보여주는 연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는 이미 마음을 준 상대가 있어 만희의 애정에 보답을 할 수 없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
청룡은 수국의 궁 위 허공에 떠 있었다. 그는 아래를 굽어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황금색 눈동자 안 세로로 가느다란 동공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신의 약속은 지킨다. 백호 녀석이 나중에 다른 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아예 먼저 손을 써놓는 게 낫겠지.”
아무리 청룡이라도 사방신끼리 한 약속을 어길 수는 없었다. 그는 품 안에 든 백호의 살점이 주는 무게감을 만족스럽게 느꼈다. 좋은 거래였기 때문에 그의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시대의 변화를 가능한 늦춰달라니, 정말 드물게 듣는 요구다.’
시대를 빠르게 변하게 해달라는 기원은 자주 들은 적이 있었다. 반대의 경우는 처음이라 그는 잠시 고민했다.
청룡은 자신이 가호하는 수국의 상태를 잘 알았다. 빈민들은 고통받고 있었고 귀족들의 사치는 극에 달했다. 밖으로는 외세가 쳐들어오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으며 안으로는 평민의 반란군이 녹적의 이름을 달고 세를 키워가고 있었다. 귀족들은 왕의 치세가 허술한 틈을 타서 자신의 재산을 축적하느라 바빠 어느 누구도 반란의 낌새를 감지하지 못했다.
왕조 교체를 통해 시대는 변화한다. 반란군이 득세한다면 가장 먼저 궁을 점령하고 왕의 목을 쳐서 시대 교체의 증거를 삼으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왕과 궁의 보호다. 아무리 반란군이 밖에서 득세한다 해도 가장 중요한 궁의 점령에 실패한다면 결국 진짜 시대의 흐름은 지연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