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연화는 며칠간 계속해서 머릿속이 멍했다. 분명 그녀가 떠나올 때 마을 사람들과 어머니의 안전을 대가로 모든 것을 포기했는데, 이제 와서 돌아보니 그들이 없었다. 마을은 불타고 모두가 사망했다.
난 여태까지 대체 뭘 한 걸까. 여기까지 와서 왕의 곁에 붙어 그를 치유하며……. 연화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온 직후를 제외하고는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었다. 왕은 연화를 배려해 모든 것을 다 준비해 주었다. 적어도 몸만은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내가 비단옷을 입고 금침에서 잠들고 있을 때…… 그분들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피를 흘렸겠구나.’
연화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불과 피와 비명이 가득 차 흘러내렸다. 마치 자신의 피부가 불에 타들어 가며 심장이 검에 찔려 피를 흘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꾸만 가빠지는 숨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모든 것이 자신의 뇌가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 동시에 고통은 현실이었다. 그들이 죽은 것 역시 현실이었다.
“어머니.”
평생 길러준 양어머니, 나이 먹고 병이 든 몸을 이끌면서도 연화에게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았던, 품이 넓고 온화했던 어머니. 그녀는 눈두덩이를 양손으로 꾹 눌렀다.
너무 울어서 새빨갛게 짓물러버린 눈가가 손바닥 밑에서 뭉개졌다. 약한 피부가 눌려 아팠지만 아픔은 상관없었다. 오히려 아픔이 달가워서 연화는 눈을 마구 비비고 피부를 긁었다. 불에 타 죽어간 사람도 있는데 이런 따끔한 통증 따위가 대수랴.
“뭘 하는 거냐.”
그 때 그녀의 손목이 잡혀 눈에서 떨어져 나갔다. 연화는 엉망이 된 얼굴로 멍하니 앞에 가까이 온 얼굴을 바라보았다. 새빨간 적안이 분노를 담고 그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전하.”
“눈이 짓물렀잖아, 그걸 멋대로 비비고 누르면 피부가 전부 상처를 입지 않느냐.”
만희가 허리를 일으켜서 밖의 시녀들에게 얼음과 찬 물을 가져올 것을 명했다. 연화는 여전히 말을 못 알아들은 듯 멍한 표정이었다. 곧 대령된 냉수에 부드러운 수건을 적셔서 만희가 조심스럽게 연화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차가움에 그녀가 움찔했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네 탓이 아니다.”
정확히는 내 탓이다. 만희는 그 말을 삼켰다. 애초에 연화를 끌고 오라 명을 내린 것은 그이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책임은 모두 내게 있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평생 악행을 저질러도 단 한 번도 그것이 자신의 죄라는 사실을 부정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두려웠다.
자신의 책임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바뀔 연화의 눈길이 두려웠다. 언제나 따스한 온기를 머금고 조심스럽게 만희를 돌아보던 그 순하고 검은 눈동자에 들어찰 냉기와 혐오가.
그녀는 눈을 감고 얌전히 만희의 손길을 받았다. 멍하게 힘이 빠진 채, 그녀는 만희의 뒤쪽에서 기웃대기 시작하는 원혼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저 여인이 아닌가…….】
【그래, 중간지대의 노파가…….】
원혼들은 살아 있는 인간의 강렬한 감정을 전이받기 쉬웠다. 그들은 뚝뚝 끊어지는 문장을 중얼거리며 만희의 뒤에서 연화를 살펴보았다. 노랗게 빛나던 따스한 온기는 슬픔으로 인해 깊이 침잠했다. 그 온기를 기억하는 혼령들은 한 줌이라도 빛을 나누어 받기 위해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연화는 눈을 뜨고 어두운 형체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저승의 사방신인 현무가 백호에게 들렀던 일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에게 빌어서 어머니를 한 번 더 뵐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죽은 자를 만나 무엇 하겠느냐고 이성이 속삭였으나 그래도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이 죄수의 마차에 오르는 연화였으니, 죽어갈 때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그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 견딜 수가 없었다.
만희는 눈을 깜박이는 연화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슬픔을 풀어주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무어라도 먹겠느냐? 그사이에 야위었구나.”
그렇지 않아도 가느다란 손목에서 살이 내려 더욱 나뭇가지처럼 말랐다. 비단옷 밑의 그 마른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으면서 만희는 한숨을 쉬었다. 제아무리 좋은 음식과 옷과 거처를 주면 무엇을 한단 말인가. 받아들이는 이가 아무런 감흥 없이 슬퍼하고 있는데.
그는 살며시 연화의 손을 무릎 위에 내려주었다.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 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진심이었다. 그는 생전 단 한 번도 누군가의 감정에 휘둘려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슬픔에 넋을 잃고 깜박이는 연화의 눈동자가 이리도 자신의 심장을 쥐고 흔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안타까움에 목이 졸리는 느낌이었다.
연화는 잠시 무릎 위에 모아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결심한 듯 만희를 올려다보았다.
“전하, 한 가지 청이 있사옵니다.”
목소리는 가느다랗고 잠겨 있었지만 연화가 말을 꺼냈다는 것 자체가 기뻐서 만희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청이라. 무엇이냐?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마.”
“제가 부디…… 잠시만 마을에 다녀올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마을?”
“흔적을 보고 싶습니다. 남은 흔적이라도…….”
고개를 든 연화의 검고 둥근 눈은 눈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만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의 가슴 속 두 가지 마음이 충돌했다. 연화가 최소한 자신의 어머니와 지인들이 죽은 자리를 보고 추모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마음과 그녀가 자신을 떠나 어딘가로 사라져 버릴까 두렵다는 마음.
“간곡히 청 드립니다, 전하.”
연화는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자신이 염치가 없음을 알았다. 왕에게가 아닌, 백호에게.
어떻게든 백호에게 닿을 수 있다면 그에게 저승에 있는 어머니의 혼령을 볼 수 있도록 부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애타게 생각했다.
동시에 자신의 염치없음에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 이토록 양심도 없는 여자가 있나, 그녀를 귀애해 주던 신의 만류를 저버리고 떠나온 주제에 다시 그에게 힘을 빌리려 하다니.
그러나 저승으로 가버린 어머니를 생각하면 심장의 끝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만희에게 엎드렸다.
“전하, 제발.”
“……가서 누구를 만나려는 것이냐. 설마 네 정인에게 가려는 건 아니겠지?”
정곡을 찔린 연화가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백호가 그립다는 이유로 가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를 은애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 기색을 예민한 만희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순간적으로 화가 폭발적으로 치솟아 올라 참기 위해 손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었다.
“네게 정인이 따로 있다는 건 내 이미 알고 있었다.”
“정인이…… 아니오라, 제가 그저 그리워하는 분일 뿐입니다.”
“그리워하는 분?”
만희는 잠시 멈칫했다. 그 말은 사내 쪽은 연화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저 따위가 감히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될…… 그런 분입니다. 그저 그분의 자비에 기대 은혜를 입었을 뿐.”
“…….”
“다시 한 번 그분의 은혜에 기대고자 하는 파렴치한 마음입니다.”
연화는 서글프게 눈을 내렸다. 슬픔과 수치심이 가슴을 물들였다. 백호는 자비롭게도 그녀를 아껴주었으나 그런 그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인간계로 돌아왔다. 어차피 붉은 달이 저물면 돌아올 운명이었다 해도 그런 식으로 먼저 신령계에서의 생활을 끝내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를 사랑하느냐.”
“……예.”
그건 알고 있었다. 사내를 떠올리는 연화의 눈은 조금 전과 다르게 뿌연 그리움을 담고 있었다. 며칠 동안 시달리던 슬픔에서조차 마음을 건져낼 정도로, 그 사내에 대한 연정이 깊은 것이다.
순간 만희의 뱃속이 뒤틀렸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연화의 양팔을 붙들었다. 사내의 커다란 손에 꽉 붙잡혀 연화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왕은 코가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댔다. 활활 타오르는 적안이 불꽃같았다.
두통이 조금씩 시작되려는 것을 느끼면서 만희는 이를 악물었다.
“왕의 궁에 들어왔으면서 잘도 다른 사내를 입에 담는구나.”
“……예? 전하, 하지만…….”
“궁에 들어온 여인은 모두 빠짐없이 왕의 것이다. 그런데 감히 다른 사내를 사랑하는 것도 모자라, 그것을 내 앞에서 입에 담아?”
“하지만 전하, 저는 치유사로……. 시녀가 아니라.”
“닥쳐라.”
으르렁대는 소리는 위협적이었다. 연화는 두려움에 몸을 뒤로 물리려 했지만 양팔을 잡은 손이 허락하지 않았다.
“전, 전하.”
만희의 강인한 손가락이 연화의 팔을 파고들었다. 멍이 남을 게 분명했다. 통증에 연화가 작게 신음했다. 왕은 흠칫 놀라서 손에서 힘을 뺐다. 그의 손에서 놓여난 연화는 팔을 감싸 쥐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왕의 심기를 거슬렀다.
궁에 들어온 자가 감히 왕의 뜻과 다른 행동을 하려 했다. 왕을 향한 충심이 아닌, 정인을 향한 연심으로 가슴앓이를 한다는 사실을 들켜버렸다. 만희의 분노는 갑작스러웠으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차분하게 엎드려서 용서를 구했다.
사실 그리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소중한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죽어버렸다. 이제 백호 님은 뵈러 갈 수 없겠구나,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 왕의 허락이 없다면 그녀의 힘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도리 따위는 없었다.
“정말 불쾌하기 그지없군.”
만희는 이를 갈다가 일어섰다. 그는 연화에게서 돌아섰다.
“한동안 꼼짝도 하지 말고 이 방에서 나오지 말아라.”
“받들겠습니다.”
연화가 머리를 숙여 바닥에 이마를 댔다. 왕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발을 구르며 나와 문을 거칠게 닫았다.
“안에 있는 계집을 절대 나가지 못하게 감시해라. 만약 방 밖으로 한 발이라도 디디게 만들었다가는 네놈들의 목이 먼저 달아날 것이다!”
전각의 경비병들에게 노호성을 내리고 만희는 거친 걸음으로 자신의 전각으로 돌아갔다. 왕의 기세는 대단해서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숨도 쉬지 못한 채, 그가 나갈 때까지 엎드려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연화는 두렵지 않았다. 그저 으레 하던 대로 몸을 숙였을 따름이었다. 이제 이 세상에 남은 것이 없었다. 그녀는 엎드려서 자신의 눈물이 깔개를 적시는 것을 느꼈다.
눈물은 뜨겁지도 못하고 미지근했다. 죽어버린 소중한 사람들, 스스로 떠나와 버린 백호. 허무함에 심장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