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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75화 (75/113)

75화

“너무 급히 움직이지는 마십시오.”

황영은 노인답게 걱정이 앞서 말을 붙였지만 오유는 젊은이 특유의 대담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십시오. 신중히 움직이겠습니다.”

웃는 얼굴은 해사했다. 관옥처럼 맑고 깨끗한 얼굴을 보면 어느 대귀족의 자식인가 싶을 것이다. 그러나 오유는 황영이 길에서 주워다 기른 뒷골목의 고아 출신이었다. 만희의 치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그 빈곤함에 배를 곯아 부모를 잃었던 빈민층의 아이를 황영이 데려다 길렀다.

비 오는 날 비쩍 마른 소년을 주웠던 일을, 황영은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 여겼다. 어쩌면 시대가 자신에게 운명처럼 이 담대한 젊은이의 보호자 역할을 맡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의 처리는 어찌할 생각입니까?”

주위를 의식한 듯 정체를 삭제한 말에 오유는 어깨를 으쓱했다.

“최대한 구슬려 비료로 사용할 계획입니다.”

황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비료라는 단어는, 아마도 비유적인 의미와 문자 그대로의 의미 모두가 될 것이다.

***

조례에서 돌아온 오유는 저택 안을 걸었다. 긴 복도를 지닌 고색창연한 집이었으나 장식은 소박했다. 그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었다. 실용적이고 차분한 성격의 오유는 화려한 건축물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하인이 다가와 그의 옷과 검을 받아 들었다.

“그는 어쩌고 있느냐.”

“방금 일어나셔서 방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식사를 하셨습니다.”

“어지간히 게으르군. 아예 내 집에서 휴가를 보내는 줄 착각하는 게 아니냐.”

젊은 장군의 눈동자가 불쾌하게 빛났다. 그는 가벼운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뒤 잠시 방 안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름이라 찌는 듯 덥고 바람 한 점 들지 않았다.

‘이제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가.’

오랜만에 들른 수도는 한층 더 비참한 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얼마 전만 해도 이렇게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일부러 들어간 뒷골목에서는 빈민층의 백성들이 그를 보며 돈과 먹을 것을 달라고 다투어 손을 내밀었다. 갈퀴 같은 손아귀들이 뻗어졌으나 그의 바짓자락을 차마 잡지 못하고 내려졌다. 무력을 지닌 젊은 장군의 몸에 손을 대도록 부하 장수들이 당연히 가만히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오유의 부하들은 그와 친구 같은 관계인 동시에 충성심이 아주 강했다.

‘곧 피바람이 불겠군.’

대담한 청년 장군은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태연하게 생각했다. 정작 반란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면서도 그는 한 발 멀리 선 듯이 상황을 살폈다. 그런 객관성이 그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했다.

반란의 준비는 착실히 되어가고 있었으나 더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오유는 집에서 신는 비단신에 발을 밀어 넣고 제사장 성현이 감금되어 있는 방으로 향했다. 허리춤에는 그가 즐겨 쓰는 곡도를 찬 채였다.

“오 장군.”

어제 낮 직접 이 서쪽 진으로 찾아온 제사장은 잡히자마자 오유를 보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어쨌든 왕이 생포를 명령한 죄수이기 때문에 감금이 먼저였으나 오유는 그가 잡혔다는 사실을 기밀로 하라 일렀다.

제사장은 생각보다 아주 교활한 자였기 때문에 뭔가 꿍꿍이가 있을 게 분명했다. 굳이 자신을 찾아왔다면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제사장은 들어선 오유를 보자마자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었다. 그래도 대귀족이라고 대접한 좋은 음식과 비단옷이 한껏 마음에 들었던 탓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내 장군과 같은 젊은이를 평소 참 좋아하지 않소.”

성현이 손바닥을 비볐다. 젊은 장군은 매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제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오유의 얼굴에 감탄하며 한동안 살폈다. 그는 빈민층 출신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기품 있는 미남자였다. 오유는 천천히 자리에 앉아 성현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와서야 간신히 귀족다운 비단옷으로 갈아입었으나 사실 올 때 입었던 하인의 복장이 훨씬 잘 어울리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유가 기묘한 미소만을 띤 채 말이 없자 성현이 재차 입을 열었다.

“장군, 이미 나를 잡으려는 왕명이 떨어졌을 것으로 알고 있소. 하지만 내 말을 좀 들어줬으면 좋겠소.”

“저는 언제나 열린 귀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열린 귀만으로는 모자랄 것이니, 그대의 심장도 열어두어 주시오.”

성현은 자못 진지하고 엄숙하게 말했다. 이 작자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러나 하면서 오유가 흥미로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성현은 차로 입을 축였다. 차의 향이 지나치게 강해 쓸 정도였다. 낮은 신분 출신이라 역시 차를 제대로 끓일 줄 모른다며 속으로 성현은 불쾌하게 투덜거렸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이것은 지금 우리 수국의 왕조에 대한 이야기요. 좋은 말만은 할 수 없고, 매우 혁명적인 이야기가 될 것이오만. 아, 부정적인 마음이 아닌 긍정적인 마음으로 들어주시오.”

짐짓 그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시작했다. 주로 그간 왕의 폭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대부분이 오유가 아는 이야기였으나 미처 모르던 내용들도 나왔다. 이야기 중간 중간 맞장구를 쳐주는 장군의 태도에 신이 났는지 성현은 점점 더 흥분하면서 말했다. 그간 궁 안에서 죽어갔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진실의 살과 거짓이 덧붙여져 과장되어 갔다.

“……그리하여, 왕은 나마저도 죽이려 하고 있는 것이오. 죄목은 그동안 내가 해왔던 직언과 충정 어린 말들을 끌어다 왕을 능멸했다 했겠지. 대단한 자가 아닌가 정말.”

성현은 탄식했다. 그는 비단옷의 소매 끝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그간 내 얼마나 충심을 다해왔는지 알지 않소, 장군. 나는 최선을 다해 왕을 모셨으며 또한 그분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직언을 해왔소. 그런데 대체 어째서.”

“그랬군요. 속사정은 몰랐습니다.”

오유는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의 눈썹이 찌푸려지고 반듯한 얼굴이 걱정으로 물드는 것을 보고 성현의 얼굴 위로 순간 득의양양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오유는 그것을 눈치챘으나 비웃음을 목 안으로 삼켜냈다.

“그런데 오늘 조례(朝禮)에서 전하께서는 치유사의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대체 전하와 무슨 관계이기에 백관의 앞에서 이름을 말씀하시는지 궁금하더군요. 단순한 치유사라기에는…….”

오유가 짐짓 사정을 모르는 척하며 물어보았다. 그 물음을 던지자마자 성현의 얼굴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 그는 불쾌한 얼굴로 찻잔을 두드렸다.

“치유사 연화, 그 계집이 불행의 근원이오. 왕께서는 원래도 병이 있으셨지만 그 계집이 온 탓에 더 깊어지셨지.”

“저런.”

“왕의 뿌리 깊은 두통을 치유할 수 있다 장담하며 궁으로 밀고 들어온 계집이오. 천민 주제에 가장 큰 전각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지. 믿어지시오? 천민 주제에!”

성현은 무릎을 두드리며 화를 내다가 자신이 말하고 있는 상대가 오유라는 사실을 깨닫고 잠깐 움찔했다. 빈민 출신의 사내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뿐이었다. 거기에 안심하고 제사장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전하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꼬여낸 계집이오. 내게 힘이 있다면 그 계집부터 처단했을 터.”

“그렇군요.”

“말세에 언제나 영웅의 마음을 괴롭히는 여인들이 나타나지만 내가 직접 그런 광경을 목격할 줄은.”

성현이 답답하다는 듯 차를 마저 마셨다. 오유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사장, 왕명에 의해 당신을 체포해야한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겠지요.”

“아아, 장군, 오 장군.”

성현은 재빨리 오유의 옷자락을 잡았지만 오유가 움찔 놀라며 더러운 것이 닿았다는 양 털어냈다. 결벽증이 있는 사내라는 사실을 뒤늦게 기억해 낸 성현은 얼른 손을 떼었다.

“장군, 우리 사이에 더 숨기는 것은 없도록 합시다. 나는 다 알고 있소.”

“뭘 말입니까.”

“장군께서 왕명을 그저 받들기만 하는 멍청한 자는 아니라는 사실을요!”

오유는 잠시 말없이 탐색하듯 성현을 바라보았다. 제사장은 히죽 웃으며 손을 비볐다.

“젊고 활기찬 장수들은 전하께 불만이 많지요. 오 장군께서도 그렇지 않소.”

“……그것은 위험한 발언이십니다.”

“위험하다니! 전혀 그렇지 않다오. 위험은 서로 의견이 다를 때 위험한 것이지. 저는 장군과 의견을 같이 하고 있소.”

성현은 비밀 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나는 장군께서 무엇을 하든, 뒤를 밀어드릴 채비가 되어 있소. 제가 가지고 온 짐에 든 패물을 팔면 막대한 돈이 될 것이라오. 저를 숨겨주신다면, 곳곳에 숨겨놓은 제 재산을 드리겠소.”

“…….”

오유는 손을 깍지 끼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 늙은 너구리 같은 작자는 기어코 살 구멍을 찾아 여기까지 기어든 것이다. 자신이 ‘살 구멍’처럼 보였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하지만 군자금이 필요한 것 역시 사실이라 성현은 제대로 길을 찾은 것이었다.

만약 오유가 조금 더 사적인 욕심이 많은 자였다면 정말 목숨을 구하는 데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요……. 이제 솔직하게 말합시다. 제사장께서도 솔직히 말씀하셨으니까요.”

“물론이오! 얼마든지 환영이지.”

“솔직히 돈을 주신다는 말씀은 믿기 힘들군요. 제사장께서는 도박으로 많은 재산을 날리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노골적인 오유의 말에 성현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과연 그는 선대로부터 물려온 재산 중 많은 부분을 도박으로 날렸다. 그러나 워낙 대단한 부자였던 집안이라 남은 것만도 충분했다. 그는 배를 내밀었다.

“그런 말씀 마시오. 내 집안의 부가 조금 줄었다 한들 다른 이들과 비교할 것은 아니니.”

“그러나 성문 안 저택 세 채 중 한 채를 이미 파셨다 들었습니다.”

“그 판 값을 내 숨겨두었지!”

“……글쎄요.”

오유가 영 믿지 못하는 눈치이자 성현은 선심 쓰듯 말했다.

“장군은 사람을 못 믿으시는군. 그렇다면 내가 한 군데 재산을 묻어놓은 장소를 알려드리겠소. 성문 남쪽 강이 교차하며 지나는 언덕 기슭, 큰 소나무 밑을 파보라 이르시오. 거기에 상자에 묻어놓은 보석이 있으니.”

성현이 미리 빼돌려 놓았던 재산의 일부였다. 일부라고는 하지만 상당한 비율이어서 이것을 내주면 사실상 그리 남는 것은 없었다. 따로 빼놓았던 재산은 저택 내부에 있어 지금은 접근할 수가 없었다. 성현은 이것으로 오유가 마음을 돌리고, 남은 재산을 받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살려줄 것을 바랐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제 부하를 그곳으로 보내보고 제사장의 말씀이 맞다면 거래를 하지요. 제사장께서 합당한 값을 치르신다면 제가 숨겨드리는 것으로.”

“좋소. 값이야 자신 있으니 나도 확실히 숨겨주시오.”

“물론입니다. 제 능력을 얕보지 마십시오.”

오유가 환하게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반란군의 군자금이 더 필요했던 참이었다. 그는 당장 부하 장수를 불러 성현이 말했던 장소를 일러주고 상자를 파내 오도록 지시했다. 제사장은 불안하면서도 안심한 얼굴로 그의 앞에 앉아 있었다.

교활한 주제에 멍청한 작자. 오유는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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