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그녀의 정원에는 계절에 관계없이 모든 종류의 꽃이 피어 나비를 유혹했다. 불과 같은 생산력을 관장하기도 하는 주작의 궁이니 당연했다. 꽃들의 향은 지나칠 정도로 다양하고 강렬해서 폭력적일 정도였다.
허리를 넘어서도록 긴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묶으며 그녀는 정원을 내다보았다. 만개한 색색의 크고 작은 꽃들이 흐드러지게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각자 다른 계절과 장소에 피어야 할 꽃들이 한데 모인 것을 보면 아마 다른 사방신들이 질색을 할 것이다. 아름다움이라곤 모르는 것들. 주작은 속으로 혀를 찼다.
“수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것은 내 영토인 초국이다. 수국의 선대 왕은 성군의 자질을 보인다 하여 인간계에 소문이 자자했지. 그러나 초국의 백성들에게도 과연 그가 성군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
“현재 왕의 사촌형이기도 했던 선대의 왕은 전쟁에도 능해 초국의 국경을 짓밟았고 많은 수의 인간을 살해했다. 아마도 단일 전투에서 죽었던 최대 사망자가 거의 수만 명에 달했을 것이다. 한동안 현무와 염라대왕이 바빴다.”
“그랬군요. 초국으로서는 타격이 엄청났을 사건입니다.”
“그래. 때문에 초국은 세가 기울어 한동안 대단히 고생을 했지. 상업과 외교에도 능했던 자라 교역의 통로도 막아버려서 사정은 계속 악화되기만 했다. 그건 나로서도 어찌 해주지 못하니 좋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초국이 아직 멸망할 시기의 흐름은 아니었다. 다만 약화된 상태로 시간을 끌게 될 뿐이었다. 백성들은 빈곤한 상태에서 고통받고 이웃 국가인 수국의 군사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때 수국은 상당히 부흥한 상태였지. 선대의 왕이 현왕에 의해 살해당하기 전까지는 수국의 백성들이 살기 좋았을 것이다.”
나라와 나라의 흥망은 결국 서로를 얼마나 앞서느냐로 결정된다. 초국의 부(富)를 강탈해 자국의 발전에 사용했던 수국은 그로 인해 흥했다. 그러나 치세에 관심이 없는 왕이 왕좌에 오르면서 수국의 부흥기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초국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하기사 선악이란 상대적인 것이지요.”
“인간계처럼 서로를 죽고 죽이는 자들로 점철된 곳은 더하다. 과연 선대의 왕이 살해한 인명이 많겠느냐, 현재 왕이 살해한 인명이 많겠느냐.”
아무리 만희가 미쳐 날뛰어 많은 자를 죽였다 하더라도 전쟁으로 인해 죽어나간 사람의 숫자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저승의 명부가 인간의 출신 나라를 구별하던가? 죽음은 아주 공평하게 만인에게 찾아온다. 그저 숫자의 문제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현재 왕은 선대 왕보다 죄를 덜 지었다. 개인이 쌓은 덕업과 원한이야 또 다른 문제겠지만.
주작은 신중한 얼굴로 손 위에 벌을 불러다 앉혔다. 꽃가루를 꽁무니에 묻히고 날던 노란 꿀벌이 침을 내밀지 않고 그녀의 손바닥 위에 앉았다. 그녀는 예쁘다는 듯 꿀벌을 한동안 살피다가 곧 하늘로 날려 보냈다.
“백호가 빠졌다는 그 연화라는 자는 어떤 아이냐?”
청수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연화가 어떤 사람인가, 오래지 않아 그녀가 답을 냈다.
“새처럼 가늘고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보는 것과 달리 심지가 굳어 단단하지요.”
“너도 그녀에게 호의적인 모양이구나.”
“예. 좋은 이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약사여래의 가피를 입어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호오, 약사여래라.”
주작은 조금 놀랍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보살의 가피를 받은 자가 아직도 인간계에 남아 있었단 말이냐. 여전히 애들 쓰고 있군.”
그녀의 웃음소리가 높았다. 그녀 역시 세계의 규칙을 지키는 사방신의 일원인 만큼 윤회의 굴레에서 중생을 빼내려 노력하는 부처와 보살들을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유연한 사고를 지닌 주작은 그저 그들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중립에 조금 더 가까웠고, 인간계에 뿌려놓았던 보살들의 가피가 이제 많이들 흐려졌다고 알고 있었는데 여전히 남아 있다니 조금 놀랍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했다.
“예, 그래서 그 치유의 이능을 갈구한 왕이 그녀를 데려갔지요.”
“불치의 병이라도 걸렸다더냐.”
“제가 본 바로는 원혼이 얽혀 덕지덕지 머리와 어깨에 붙어 있더이다.”
“아하, 그래. 개인적인 일로 사람을 죽여댔으니 혼령들이 가서 붙을 수밖에 없었겠구나.”
“저승의 찬 기운이 머릿속으로 파고들 테니 인간의 약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았겠지요.”
주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청수희에게 눈을 흘겼다.
“너도 참 심술궂구나. 연화는 왕의 정인이 아니니 그저 데려와도 괜찮다는 걸 백호에게 이야기해 주지도 않고.”
“저 역시 인간계와는 속한 세계가 다른 몸, 함부로 끼어들어서야 곤란하지요. 신께 고하는 일이라면 곧장 다른 세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그렇게 작은 장난들을 치고 다니는 게냐? 뭐, 백호에게 이야기를 했다간 바로 수국이 뒤집어지겠으니 이해는 한다만.”
백호는 확실히 앞뒤 가리지 않고 연화를 뺏어올 것이다. 지금은 그녀의 선택이라 생각해 수국을 지켜주려 할 뿐이지만.
가능하면 청룡이 엿이나 먹었으면 좋겠는데. 주작은 그 얄미운 작자의 면상을 생각하면서 입을 삐죽였다. 영토끼리 국경을 마주 대고 있었으므로 청룡의 행태를 가장 잘 아는 것 역시 주작이었다.
“수국 내부의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만, 백호는 조금 걱정되는구나. 저 이기적인 청룡이 과연 약속을 제대로 지킬지 알 수가 없어서.”
청수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주작은 못마땅하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혹여 무슨 문제가 생기거든 나를 불러라. 혹시라도 네가 알게 된다면 말이다.”
“알겠습니다, 주작 님.”
***
이틀 뒤 조례에는 수도 근방 진의 장군들이 모두 참석했다. 그간 성현의 행방은 묘연했다. 군사들을 잔뜩 풀었는데도 못 찾는 바람에 만희의 벼락같은 호통이 이틀 내내 떨어졌던 건 당연했다. 왕의 기분은 몹시 저조했다.
“감히 나의 명령을 어기고 사적으로 재물을 탐하기 위해 왕궁의 내관과 군사를 이용해 일을 저질렀다. 어찌 이리 간악한 자가 있단 말인가.”
만희는 노해서 옥좌의 손잡이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제사장의 직위에 있으면서도 왕조에 헌신하기는커녕 제 욕심을 채우려 급급하고 있다니, 나는 백관에게 제사장 성현의 빠른 체포와 징벌을 명한다.”
왕의 기세는 대단했다. 거무스름한 피부 위 새빨간 적안은 분노로 서슬 퍼렇게 빛났다. 그는 장군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왕에게 경의를 표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전과는 달라진 게 있었다. 예전 같으면 왕은 분노한 그 자리에서 군사나 내관의 목을 땄을 것이고, 시녀를 능욕하며 광증을 내보였을 것이다. 지금 그는 그저 무섭도록 화가 났을 뿐, 광기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백관 중 기뻐하는 자가 많았지만 동시에 다른 생각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수도 서쪽 진을 담당하고 있는 장군 오유는 그리 품계가 높지 않았다. 장군과 백관들의 행렬 중반 이후에 서 있는 그는 곁에 서 있던 장군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
“많이 차분하시군.”
“전에는 시녀 몇을 능욕하는 장관을 보여주시기도 했는데 그건 좀 아쉬워.”
킬킬대는 소리에는 경멸과 혐오가 스며들어 있었다. 만희는 이미 신하와 백성들의 마음을 잃어 이제 와서 부드러워진다 해서 한순간에 여론이 바뀔 리는 없었다.
오유는 느긋한 얼굴로 백관들의 머리 위로 왕을 바라보았다. 그는 키가 큰 사내라 뒤에 서 있어도 앞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보였다.
한 번 더 제사장 성현을 제대로 잡을 것을 강조해 명령한 왕이 곧 해산을 명했다. 백관과 장군들은 왕에게 무릎 꿇어 경의를 표하고 물러나왔다.
나이 먹은 장군 한 명이 오유에게 다가왔다. 수도 자체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장군 황영이었다.
“황 장군.”
포권으로 예를 표하는 오유에게 황영이 미소 지었다. 그는 오유에게 아버지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앞서 흩어지는 백관들의 뒤를 따라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전하께서 참으로 안정적이 되셨습니다. 그렇지요?”
황영은 상냥하게 말했다. 장군으로 늙은 자였으나 그는 학자이기도 했다. 길게 기른 희끗한 수염을 만지면서 그는 흘긋 왕의 전각 쪽을 보았다. 전과 같았다면 피비린내가 풍겼을 전각은, 지금은 조용하고 말끔했다.
“좋은 일입니다. 고질적이던 두통이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천민 부락에서 데려온 치유사가 두통을 치유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요……. 그 소문이 진짜인지는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만.”
오유는 침묵을 지켰다. 황영은 의심이 많은 편이라 들려오는 소문을 믿지 않았다. 늙은 장군은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느린 속도 탓에 주변에 있던 백관은 모두 앞서 나가 그들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다.
“치유사가 젊고 아름다운 계집이라지요. 어쩌면 왕께서 그 계집에게 마음을 주었을지도 있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좋은 일입니다. 어쨌든 거친 성정이 가라앉았으니.”
“그렇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요.”
“좋은 일이죠, 좋은 일.”
황영은 그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는 느긋하게 뒷짐을 졌다.
“왕이 자비로운 건 항상 나라에 좋은 일일까요, 오 장군?”
갑작스러운 물음에 오유는 조용히 황영을 바라보았다. 황영은 미소를 지었다.
“나라에는 좋은 일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다만 왕 자신에게는 좋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오유의 말은 대담했다. 황영조차 자신도 모르게 주변에 듣는 귀가 있는가 둘러볼 정도였다. 어쨌든 궁내였다.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웃었다.
“여전히 담대하십니다.”
“사실을 말할 뿐입니다.”
황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가르치고 길러낸 이 젊은 장군은 사자의 심장을 가진 용맹한 자였다. 가끔 지나치게 용맹하여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본래부터 자애로웠다면 괜찮았을 겁니다. 하지만 폭정을 휘두르던 자가 갑자기 제정신을 찾고 자비로워진다면…….”
“…….”
“원한을 가진 자와 우습게 보는 자가 모두 생기게 되겠지요. 자비라는 것을 마음에 들인 이상 왕 자신의 손속에는 망설임이 생기게 마련이고.”
폭군은 결코 성군이 될 수 없다. 살면서 깨달음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 잔인성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밑에서 그를 잡아 끌어내리려는 자들이 생긴다.
황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이라는 자리는 잔인함이 필수인 위치지요. 그러나 중간에 태도를 바꾼 자는, 그것이 필요한지 아닌지 판단하지 못하고 전부 내다버리기 때문에 백성을 통제할 힘을 잃어버립니다.”
오유는 미소를 지었다. 황영은 그가 급진적인 젊은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아마도 언젠가 이 왕조를 뒤집을 이가 나타난다면 그건 바로 이 오유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