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이 궁 안에 제사장을 그렇게나 편드는 자가 있다는 말이지. 하기사 중앙전각의 내관이었던 황씨조차 그랬으니 누가 제사장의 편이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대귀족인 성현에게는 돈이 많았고 어떤 인간들은 매수가 참 쉬웠다.
왕의 앞에 꿇어앉은 자는 거의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얼굴이 둥글고 살집이 많아 성현과 몹시 닮았으나 자세히 보면 햇빛 아래에서 일을 해 피부가 거칠었다. 제사장의 부드럽고 희고 살진 피부와는 달랐다.
“저, 저는 그저 제사장댁의 하인일 뿐입니다 전하. 주인 나리께서 잠시 어디에 다녀오시겠다며, 집에 주인 나리가 계시는 것처럼만 꾸미라 하시어 그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뿐이온데.”
“…….”
“전하, 살려주시옵소서, 전하.”
우는 소리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만희는 미간을 짚었다. 또 두통이 오려나 싶어서 내관이 화들짝 놀라 하인에게 조용히 할 것을 명했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던 하인은 울음을 억지로 삼켰다.
“그래서, 제사장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느냐?”
“……주인 나리께서는 하인 천씨만 데리고 사라지셨습니다. 어디로 가셨는지는.”
“하인 천씨라. 짐은?”
“하나뿐이었습니다.”
어지간히 급하게도 도망친 모양이군. 만희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는 제사장을 꽤 잘 알았다. 머리가 좋은 자이고, 또한 욕심이 많은 자다. 집 안의 온갖 패물을 다 짐에 집어 처넣고 도망쳤겠지.
군사들은 이미 그를 찾기 위해 사방으로 달려나갔다. 성문은 총 다섯 군데 있었고 과연 어느 방향으로 갔을지는 알 수 없었다. 평민의 옷을 입고 나갔다 하니 인상착의로 발견하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 뚱뚱한 몸으로 과연 어디까지 가나 볼까.”
수도에서 성문을 벗어난다 해도 그 이후로 가기 위해서는 여러 곳의 진(鎭)이 관문으로 버티고 서 있다. 그곳에도 전부 방을 뿌려 나가지 못하게 해야 했다.
만희는 앞에 엎드린 하인을 내려다보았다. 살집이 있는 어깨가 울음을 삼키느라 떨리고 있었다.
‘어쩔까.’
예전 같으면 두 번의 생각도 필요 없이 검을 들었을 것이다. 두통을 가라앉히기 위해 따로 제물을 찾을 필요도 없다며 기꺼운 생각마저 들었겠지. 그러나 지금은 피를 보고 싶지 않았다. 감히 제사장을 달아나게 만든 죄인임에도 그랬다.
무엇보다 연화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피를 보는 일에 그녀는 언제나 안색을 굳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저자는 하옥해라.”
당연히 왕이 그를 단칼에 베어 죽일 줄 알았던 백관이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높은 옥좌에서 만희는 턱을 괸 채 무심한 눈을 하고 있었다. 신하들의 놀란 얼굴을 보고 그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뭘 그렇게 봐? 끌고 가서 감옥에 가둬. 벌은 나중에 정하겠다.”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군졸들이 들어와 하인을 끌고 나갔다. 여전히 굳고 겁에 질려 있었지만 목숨을 건졌다는 안도감에 하인이 울며불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외쳤다. 왕은 한숨을 쉬었다.
“이틀 뒤의 조례(朝禮)에는 수도 근방 진의 장군들을 전부 모이게 하라. 미리 방을 뿌리겠지만 장군들이 제대로 제사장을 잡을 수 있도록 내가 직접 명령할 것이니.”
“예, 전하.”
제사장 성현만큼은 목숨을 그냥 두어줄 생각이 없었다.
만희는 못마땅한 얼굴로 백관에게 해산을 명하고 일어섰다. 하인을 잘못 잡아왔던 군사들은 모두 죄를 물어 곤장형에 처했다. 그들 역시 전과 같았다면 전부 채찍이나 검으로 목숨을 빼앗았을 일이었다.
갑자기 몹시 피곤해져서 만희는 발길을 돌려 중앙전각에서 나섰다. 피로할 때면 으레 연화가 보고 싶었다. 지금 역시 그랬다.
‘지금 가도 되는 것인가.’
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만희는 가만히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봤던 연화의 얼굴은 몹시 창백했다. 그녀에게 어물어물 마을의 소식을 알게 된다면 알려주마, 라고 했지만…… 완전히 사라졌다는 소식 외에 대체 뭘 더 전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시 함께 성현의 명을 받았던 자들을 수소문해 하나씩 잡아들이고 있지만 증언은 같았다. 마을은 불탔고 사람은 사라졌다.
‘그나마 죽이지 않았다는 게 다행인가.’
마을 사람들이 통째로 사라졌다면 누군가 미리 알려줘서 도망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떻게든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연화의 양어머니의 인상착의를 물어 그녀를 찾는 방을 전국에 붙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걸음이 옮겨졌다. 그는 차마 연화의 전각에 들어서지 못하고 정원 너머 먼 발치에서 그녀의 창문 너머로 방을 살폈다. 언제나 그녀가 즐겨 앉는 창가에 지금도 연화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없었다. 멍한 얼굴로 그녀는 벽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평소 부드러운 검은 눈동자는 생기를 잃고 마치 인형처럼 굳어져 초점이 사라졌다.
왕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연화의 슬픔에 공감할 수 없었다. 그는 지키고 싶었던 가족이 없었고, 소중한 사람이 없었다. 양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을 모두 잃었으니 슬플 거라는 사실은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책에서 읽은 듯이 머리로 이해하는 사실일 뿐이었다.
만희의 심장이 아픈 부분은 전혀 다른 곳이었다.
‘연화, 네가 슬프기 때문에.’
그녀가 슬프고 괴롭다는 사실이 몹시 못마땅하고 괴로울 뿐이었다. 만희는 명치 부분을 눌렀다.
저 멀리 창 너머에서 연화는 고개를 기울였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금 날렸다. 지난번과 같이 정원에는 전혀 불지 않는 바람이 연화의 주변만을 싸고돌았다. 마치 그녀를 사랑하는 것처럼.
연화의 둥근 눈에 생기가 조금 돌아오고 어느새 그리움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벌어져 이름 하나를 불렀다.
멀어서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만희는 그것이 사내의 이름임을 알았다. 백호 님이라고 불렸던 그자의 이름. 아마도 연화의 정인일 사내.
화가 치밀어 올라서 만희의 적안이 더 붉어졌다. 그는 이를 악물고 검자루를 쥐었다.
아마 그자가 앞에 있다면 망설임 없이 베어버렸을 것이다. 어떤 사내인지 모르나 연화의 눈이 저토록 아련한 감정에 물들게 하다니, 감히 저 여인의 얼굴을. 저런 연화의 눈을 만희는 전혀 몰랐다.
질투 때문에 눈앞이 검게 물들 정도였다.
백호라는 사내가 근방에 있다 해도 만희는 절대 연화를 그에게 보내지 않을 것이었다. 그에게 가서 연화가 행복해진다 해도 그랬다. 만희는 마음에 든 것을 손에서 놔줄 만큼 마음이 넓은 사내가 아니었다.
‘먼저 만났어야 했는가.’
연화의 저 애틋한 눈을 다른 사내에게 빼앗긴 채로 두고 보아야 하는가.
억지로 그녀의 몸을 잡아 궁에 매어두었지만 심장은 다른 이에게 속박되어 있다.
만약 연화를 좀 더 일찍, 그 사내보다 좀 더 먼저 만났다면 그녀의 심장마저 자신이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만희는 치밀어 오르는 화와 질투와 후회의 감정에 눈앞이 아찔해져서 나무에 기댔다. 미간을 누르며 그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정원의 여름 햇볕이 잔인할 만큼 뜨거웠다.
***
백호가 자신의 살을 내주면서까지 수국의 멸망을 지연시키려 했다는 것은 사방신들이 모두 알게 되었다. 인간계를 청룡과 양분하여 다스리고 있는 주작은 흥미로운 얼굴로 턱을 두드렸다.
“재미있구나.”
주작의 붉고 굽슬한 머리카락은 그녀의 어깨를 타고 흘러내려 바닥에 닿아 있었다. 그녀는 이야깃거리를 들고 온 상대를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바라보았다.
“그래서 제가 얼른 이 이야기를 들고 온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너는 재미난 이야기로는 세상 누구보다 뛰어나지.”
푸른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상대는 샘의 정령 청수희였다. 청룡이 보았다면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렸을 뜨거운 주작의 기운 곁에서도 그녀는 태연히 앉아 담소를 나눴다.
“아무리 백호가 성정이 강하다지만 한낱 인간의 여인을 위해 그렇게까지 하다니 조금 놀라운 걸.”
주작의 궁은 태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자리하고 있다. 비록 다른 사방신들과 달리 인간계에 자신의 거처를 지니고 있었으나 그 높이가 하늘을 찌를 정도이며 구름으로 가리워져 있어 실상 다른 계라 봐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세상의 구역을 정하던 무렵, 마음 넓게 청룡에게 인간계의 일부를 양보했으나 사실 인간계의 진정한 지배자는 그녀였으니 인간계에 자신의 거처를 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신의 살점을 내주다니 그의 마음이 가늠이 되지 않는구나.”
“아주 순수한 애정이랍니다. 저도 처음에는 믿지 못했지만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였으나 그곳에도 역시 물은 흘러 생명을 적셨다. 청수희가 이곳에 오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는 뜻이었다. 주작에게도 간혹 들러 말동무를 하곤 했던 샘의 정령은 태연스레 신의 맞은편에 앉아 차를 마셨다.
주작의 곁에 선 시종들이 천천히 깃털 날개를 흔들었다. 뜨겁지만 서늘한, 양면의 기이한 온도를 지닌 공기가 그들의 주변을 맴돌았다. 주작은 긴 적발을 쓸어내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주변으로 수많은 새들이 날고 있었다.
“하필이면 수국이람. 같은 인간계라도 내 영토에서 일어났다면 백호를 도와주련만.”
“그러게 말이어요. 게다가 한 시대가 저무는 시기라 더욱 곤란합니다.”
주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청룡이 인간계에서 가지는 영향력은 주작에 비해 매우 작았다. 말로는 절반이라 하지만 그녀가 다스리는 영토의 인간들이 훨씬 다양하고 부유하고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야 청룡은 바닷속의 주민들을 더 사랑하니 인간계 영토의 주민들은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저러다 상황이 안 좋아지면 사고라도 칠까 무섭군.”
그녀는 다소 걱정스러운 어조였다. 백호는 그녀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기적인 청룡이나 차갑고 어두운 현무와 비교하면 그들 둘은 상성이 좋았다. 백호가 다소 뜨겁고 다혈질인 성격이라서 주작은 그를 걱정할 때가 자주 있었다.
“백호 님의 살을 받은 이상 청룡 님이라도 함부로 약속을 어길 수는 없을 거예요. 그리 걱정하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그럴까. 하지만 청룡은 워낙 교활한 녀석이어서.”
비록 청룡이 자신과 가까운 사이였으나 청수희는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작이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청룡과 대등하게 겨룰 정도로 교활해질 수 있었으나 백호는 아니다. 청룡은 명시적인 단어 그대로의 뜻만 남겨둔 채, 약속의 의미를 얼마든지 비틀어버릴 수 있는 사내였다. 주작은 생각만으로도 눈살을 찌푸렸다.
“수국이 이대로 멸망하지 않고 남은 생을 끌고 가는 것에 나는 별 반대 의사가 없어. 나쁘지 않다.”
“수국의 현재 왕은 대단히 폭군이라던데 주작 님이 보시기엔 그렇지 않은 것입니까?”
“아니, 맞아. 흔히들 하는 평가로 본다면 폭군이 맞다. 그러나…….”
붉은 비단 위 금실과 은실을 교차해 수놓은 화려한 장포를 끌며 주작이 일어섰다. 석조기둥들을 타고 올라온 식물의 줄기에서 능소화와 장미가 피어 향을 뿜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