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만희는 멍청한 눈으로 연화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사이 만희의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한 연화는 손 안에서 다시 노란 빛을 내뿜었다.
【약사여래의 가피를 입은 자여…….】
【더 줘, 더 많은 빛을.】
【저자를 포기할 수 없어.】
예전보다 원혼들이 더 끈질겨졌다. 더 많은 빛과 온기를 요구하는 그 갈퀴 같은 손아귀들이 연화의 손목을 잡아 왔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체온이 급속도로 그녀의 손목으로 옮겨 왔다.
“자, 내가 가진 것을 나누겠습니다. 잠시라도 좋으니…… 물러가 주세요.”
연화가 속삭였다. 전보다 더 많은 빛을 뺏어 가져가며 원혼들이 간신히 한 발짝씩 물러났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만희에게서 원혼들을 떼어냈다.
그들은 더 끈질겨졌고 더 많은 말을 속삭여 왔다. 연화는 그들의 말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렸다.
가장 마지막으로 그의 뒷덜미에 매달려 있던 원혼 하나가 희미하게 속삭였다.
【이자를 지키고자 하는가.】
“……그렇습니다. 물러가 주십시오.”
【쓸데없는 짓이야.】
그 원혼은 다른 이들보다 좀 더 뚜렷한 형상이었고 말소리도 또렷했다. 그는 연화의 손을 잡았다. 얼음장 같은 손이었다.
【이제 곧 이걸로 만족하지 못하는 날이 올 거야. 보살의 가피를 입은 자여, 그 날에는 저자가 완전히 미치게 될 것이니.】
마치 예언과도 같은 속삭임이었다. 연화는 이를 악물고 그 꾀임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노랗고 따스한 빛이 그녀의 손에서 흘러넘쳤다. 다른 이들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했다.
그 온기 속에서 만희는 눈을 감았다. 뇌를 저미던 통증이 사라지고 귓가를 맴돌던 속삭임도 사라졌다. 거짓말처럼 편안해진 머릿속에 온몸이 나른해져 왔다.
“후…….”
평온하게 가라앉은 신경을 느끼며 만희는 눈을 떴다. 느리게 초점이 잡힌 시야에 연화의 얼굴이 들어왔다.
“미안하구나.”
그 얼굴이 너무도 처참한 표정을 하고 있어 그는 감사인사 대신 사과의 말을 속삭였다. 연화의 시선이 그와 맞닿았다.
검고 둥근 눈동자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모두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흔들리고 있었다. 양어머니와, 평생 함께 살던 마을 사람들과, 태어나 이 나이까지 살아오던 마을이 전부.
그녀는 몇 번이나 말을 꺼내려다 실패했다. 만희는 그녀를 품에 가둔 채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겨우 연화가 말을 이었다.
“믿고 싶지 않습니다. 절대로…… 절대로요.”
현실을 부정하는 연화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져 있었다.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안구가 메말라 아파 왔다.
“거짓이겠지요?”
눈물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저 반들거리는 눈동자를 한 채 그녀는 만희를 올려다보았다. 빨리 거짓이라고 말해 달라는 듯 물끄러미 보는 시선과 함께.
붉게 달아오른 눈매를 손가락으로 쓸면서 만희는 자신의 심장에 균열이 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심장 박동이 기분 나쁠 정도로 갈비뼈 밑에서 펄떡거렸다.
그는 여태까지 아무것도 거칠 것 없이 멋대로 살아온 이 나라의 왕이었으나, 지금 연화가 간절히 바라는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
제사장 성현은 미친 듯이 집 안의 재물을 챙겼다. 침실에 있는 비밀금고까지 열어 패물과 금은보화를 짐에 쓸어 넣는 손짓에는 광기까지 어려 있었다.
방금 급한 소식을 전해 들은 터였다. 제사장의 명을 왕의 것처럼 받들던 내관 황씨가 왕의 화살에 맞아 처참히 죽었다는 비보였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군졸 하나를 불러 치유사 계집의 송환 과정을 소상히 물은 게 먼저였다고 했다.
‘아마 마을을 태우고 전부 죽여버린 것도 알게 되었겠군.’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곧 자신을 잡기 위해 왕의 군사가 들이닥칠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다행히도 궁에 심어놓았던 또 다른 내관이 급히 알려주어 도망갈 시간이 빠듯하나마 생겼을 뿐이었다.
‘그 천민 계집을 끌고 온 것이 누구의 공인데, 대체 어째서!’
제사장은 왕을 원망했다. 그는 손을 바삐 놀려 재물을 전부 넣은 짐을 하인을 불러 지게 했다. 발이 날랜 자였다. 빨리 가야 하니 둘만 떠날 예정이었다. 성현은 몸집이 자신과 비슷한 하인을 한 명 더 불러 자신의 옷을 입히고 신신당부했다.
“만약 누가 와서 묻거든 네가 나라고 답해야 한다. 제사장 성현이 나이니라, 하고. 알겠느냐?”
“예? 하, 하지만…….”
몸집이 둥근 하인은 난처한 듯 멈칫거렸다. 수염까지 나서 같은 옷을 입혀놓으니 얼핏 성현과 무척 비슷했다. 대신 하인의 옷을 입은 제사장이 발을 굴렀다.
“내 말을 안 듣겠다는 거냐?! 왕의 명이 있는데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해서 그렇다. 집 안에 내가 있다는 것만 보여주면 되느니. 말 한마디만 하면 된다. 내가 제사장 성현이니라! 알겠느냐?!”
“예, 예…….”
“좋아. 내 돈을 주지.”
성현은 주머니에서 종이돈 한 장을 꺼냈다. 엽전이 아닌 종이돈에 하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성현은 지독히 인색해서 결코 하인들에게 돈을 줄 때 엽전이 아닌 것으로 주지 않았다. 종이돈을 받고 하인은 허리를 굽실거렸다.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잘 다녀오십쇼, 나리.”
멍청한 것. 혀를 차며 제사장은 간편한 복장으로 짐을 든 하인 한 명만을 데리고 재빨리 집을 나섰다.
평민과 같은 복장을 입고 골목까지 걸어 나갔는데 저 멀리서 왕의 군사들이 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재빨리 허리와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하며 평민처럼 지나갔다. 군사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우르르 성현의 저택으로 몰려갔다. 짐을 진 하인 천씨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쪽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지요, 나리? 군사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쉿, 목소리를 낮춰라. 나리라고 부르지도 마.”
성현은 부르르 떨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택 쪽은 아직 고요했다. 최대한 빨리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거의 달리다시피 걸었다. 뚱뚱한 몸이 흔들리며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서둘러 번화가를 지나 숨죽여 일부러 뒷골목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하인 천씨에게 성문 밖으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을 안내하라고 재촉했다. 천씨는 자신이 익히 아는 지름길로 걸었고, 두 사람은 오전 시간이 끝날 때쯤 성문 밖을 나설 수 있었다.
성문 밖으로 삼삼오오 나가는 보부상들 사이에 섞여서 걸어가며 성현은 속으로 계산했다.
‘패물이 있으니 어딜 가도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나…… 위험하니 몸을 의탁할 곳이 필요하겠지.’
제사장으로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던 이가 수도 근방에 있었다.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진(鎭)을 지키는 장군 오유였다.
‘비록 낮은 신분 출신에 어린놈이지만 쓸모가 있겠지. 오히려 그래서 속여 넘기기는 쉬울지도 모른다.’
오유의 군대 거점까지는 걸어서 일주일이 걸린다. 몸이 제대로 말을 듣는다 해도 그는 걸음이 느리니 그보다 한참 더 걸릴지 모른다. 아무래도 말을 얻어 타서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성 밖의 주막에서 키우는 말을 한참이나 흥정한 끝에 샀다. 하인 천씨가 안절부절했다.
“저, 나리, 말을 한 마리만 사신다면…… 저는 어쩔깝쇼?”
“너는…….”
성현은 그를 훑어보았다.
패물이 많이 든 짐은 무거웠지만 말을 샀으니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말을 한 마리 더 산다면 너무 돈이 많이 든다. 물론 그가 지닌 돈에 비한다면 아주 작은 액수였으나 하인 따위를 위해 말을 사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천씨가 집으로 돌아가면 자신이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도망쳤는지가 전부 들통 날지도 모른다.
“일단 국밥부터 한 그릇 먹을까? 배가 고프니 생각이 잘 나지 않는군.”
“예, 나리.”
가뜩이나 오전 내내 무거운 것을 지고 걸어 배가 고프던 천씨는 식사를 하자는 말에 반색했다.
성현은 주막의 평상에 올라앉아 국밥을 한 그릇 시켰고 거기서 조금 덜어내 천씨에게 내밀었다. 한 그릇을 따로 시켜줄 줄 알았던 천씨는 시무룩해져서 그것을 받아 들고 먹었다. 그래도 먹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얼굴이었다.
“물을 한 잔 떠 오거라.”
성현은 우물을 가리켰다. 상 위에 번연히 물주전자가 있는데도 그랬다. 주인의 터무니없는 명령이 하루 이틀이 아닌지라 천씨는 얌전히 우물로 가서 물을 길어 올려 펐다.
그사이 성현은 품에서 약을 꺼냈다. 잠이 오지 않을 때 먹는 수면약이었다. 의원이 과용하면 몹시 위험하다며 새끼손톱의 절반만큼만 먹으라고 신신당부하던 약이다.
흰색의 가루가 든 작은 병을 그는 천씨의 밥그릇 위에 퍽 쏟아버렸다. 거의 정량의 수십 배가 넘는 가루였다.
천씨가 물을 가져왔을 때 제사장은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그의 그릇 위로 자신의 국밥을 전부 얹어주었다. 자비롭게도 자신의 먹을 것을 전부 내주는 주인의 행동에 천씨는 기뻐하며 그것을 허겁지겁 다 먹어치웠다.
“빨리 일어나지.”
“예, 예. 그런데 나리, 말은 여기 있는데…….”
“잠시 저쪽 숲속에 볼일이 있어.”
천씨가 일어나다가 비틀거렸다. 주막을 나와 숲으로 들어가는데도 그의 걸음걸이가 계속 흔들렸다. 계속 참다가 천씨가 눈을 비볐다.
“나, 나리. 제가 너무…… 이상하게 졸립니다. 눈이 안 떠지고.”
“그래?”
성현은 흘긋 그쪽을 바라보았다. 천씨의 얼굴은 하얗게 색이 빠지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눈을 뜰 수가 없는 듯 필사적으로 눈을 비비고 있었다.
주인이 멀쩡히 서 있는데 하인이 졸리다며 누웠다간 경을 칠 일이었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게도 천씨의 눈은 계속해서 묵직하게 감겨 왔다.
“잠깐 쉬어갈까? 많이 힘든 것 같으니 잠시 눕도록 해라.”
“제, 제가 나리 앞에서 그럴 수는.”
“괜찮으니 누워.”
성현은 비틀거리는 하인을 끌어당겨 바닥으로 눕혔다. 그사이 제법 숲 속으로 많이 걸어들어 와 인적은 없었다.
마치 자는 것처럼 그의 머리 밑에 돌까지 받쳐 두고 성현은 천씨의 짐을 등에 걸머졌다. 휘청할 정도로 무거운 짐이었다.
천씨는 정신없이 잠에 빠졌다. 아마 짧은 시간 안에 숨을 거두리라. 길에서 벗어난 숲이라 쉽게 발견되지도 않을 것이다.
성현은 짐을 지고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주막으로 돌아왔다. 귀찮은 자를 처리했으니 이제 목적지로 가야 했다.
***
만희는 눈앞에 와서 무릎 꿇은 자를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이 얼간이들이 옷을 바꿔 입었다고 아예 다른 자를 잡아왔다 이거냐.”
급히 가느라 중급 무관과 군사들이 간 게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윗사람의 눈을 마주치면 안 되는 수국의 문화 때문에 지위가 차이 나는 자들은 매일 마주치는 사람이라도 높은 지위인 자의 얼굴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심지어 눈앞에 있는 자는 성현과 아주 비슷하기까지 했다.
“옷까지 제 것을 입힌 걸 보니 아주 작정하고 도망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