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수의 붉은 달-71화 (71/113)

71화

“모든 일을 상세히 말해 보거라. 내 관련자들을 처벌하고자 하니.”

“예, 제가 기억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풀려 나왔다. 제사장 성현의 명에 따라 마을을 태우고 모두를 죽이고자 했으나 주민들이 기이하게 사라져 있었다는 사실까지.

결과적으로 연화가 찾는 양어머니와 마을은 모두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이 일을 만약 연화가 알면 어떻게 될까. 만희는 침착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의 마음은 아주 간신히 평정을 잃지 않았지만 대신 두통이 시작될 기미가 보였다. 그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짚었다.

“저는 정말 말리려 노력하였으나…… 정말로 불가능했습니다. 제사장님의 명이 워낙 지엄하여 군졸들이 그것을 수행하느라…….”

“그랬군.”

“예, 그래서 결국 마을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 주민들은 어디로 갔는지 찾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

만희는 벌떡 일어나서 방 안을 돌아다녔다. 우리 안을 서성이는 맹수와 같은 걸음이었다. 그는 분노에 차 눈을 손으로 눌렀지만 화가 가라앉지는 않았다.

“제사장 성현의 명을 받들었던 내관이 누구지? 고약한 놈이로다, 궁의 내관인 주제에 제사장의 명을 사사로이 받들다니.”

“내관은 중앙전각에서 일하는 황(黃)씨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관 황씨라면 왕의 제법 가까운 심부름꾼 중 하나였다. 화가 눈앞을 까맣게 가리는 것 같았다.

분명 자신은 마을 주민들을 죽이고 불을 놓으라는 명까지는 내린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은 성현이 멋대로 행한 일이었다. 아마도 연화가 천민 부락 출신인 주제에 애를 먹였던 것에 대한 복수였겠지. 대귀족들이란 그런 인간들이다.

제사장의 얕은 마음이 빤히 보여서 왕의 눈에 불길이 치솟았다.

“여봐라!”

밖을 향해 만희가 소리를 높여 불렀다.

“예, 전하.”

“이자를 끌고 가서 감옥에 가두어라.”

“전, 전하?”

군졸이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는 그제서야 도깨비 같은 얼굴의 왕과 눈이 마주쳤다. 새빨간 눈동자를 지닌 눈에 핏발이 서서 마치 눈 전체가 붉은색인 듯 보였다. 그는 차마 말을 잇지도 못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곧 경비병들이 들어와 그를 끌고 나갔다.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없다. 왕은 이미 그를 벌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만약 말 한마디라도 더 했다간 감옥에 끌려가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목이 잘릴 수도 있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깨달은 군졸은 입을 다물고 경비병들에게 끌려갔다.

“더러운 것들, 감히 내가 모르는 사이에……!”

만희는 이마를 짚었다. 눈의 실핏줄이 터져 나가고 두통이 점차 뇌리를 점령해 왔다. 활화산 같은 분노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추가로 명령을 내렸다.

“제사장 성현을 끌고 와라. 눈치채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비밀에 붙인 채 끌고 와!”

병사들이 명을 받고 사라졌다. 그리고 만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손이 후들거리며 떨릴 만큼 길 잃은 분노가 뇌리를 잠식했다.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는 무작정 밖으로 향했다.

전각 밖에서 왕의 명을 기다리고 있던 내관 서너 명 속에 황씨가 있었다. 꽤 오래 일했고 왕도 얼굴과 이름을 알 만큼 출세가도를 달리던 자였다.

그는 얌전하게 소매 속에 손을 넣고 허리를 굽히고 있었으나, 자신을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오는 왕의 모습을 보고 눈이 커지기 시작했다. 왕의 얼굴이 살기로 흉흉했다. 두려움으로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만희는 검을 빼 들었다. 발걸음을 빠르게 하면서 그는 히죽 웃었다. 얼굴 근육은 통제를 벗어나고 머릿속은 다시 엉망이 되었다. 뇌를 곤죽으로 만들어버릴 기세로 고통은 빠르게 그의 두개골 안을 두드렸다.

세찬 두드림 속에 누군가 고막 안으로 속삭여 왔다.

피를 봐, 죽여. 최소한 너만 고통스럽지는 않아야 하잖아.

왕의 살의가 자신을 향하는 것을 깨닫고 내관은 뒷걸음질 치다가 도망쳐 달아나기 시작했다. 검을 꺼내 든 만희를 보고 곁에 서 있던 시녀가 급히 다른 쪽으로 달음박질쳤다. 왕의 광증이 도진 듯하니 치유사를 불러와야 했다.

시녀는 황급히 뛰어가 가까운 전각에서 처음으로 만난 시녀에게 매달렸다. 갑자기 달려온 시녀를 붙들고 이웃 전각의 시녀, 은연은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저, 전하께서 또 광증, 이……. 제발 빨리 치유사님을.”

전력으로 달린 시녀가 숨을 헐떡였다. 은연은 그 말에 들고 있던 쟁반을 모두 집어던지고 연화의 방으로 뛰어갔다.

방 안에서 가만히 수를 놓고 있던 연화는 깜짝 놀라서 은연을 뒤따라 뛰어나왔다. 왕이 귀신같은 모습으로 사람을 쫓고 있다는 말에 지체할 수가 없었다.

“어디입니까?”

“저, 중앙전각 쪽……. 전하께서 내관을 뒤쫓아 따라가셨는데…….”

“빨리 가시죠, 치유사님.”

“예.”

은연과 시녀가 앞장서고 연화는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걸음을 급히 옮겼다. 그 때 중앙전각 쪽에서 뛰어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앞서서 달려오는 사내는 연화 역시 익히 아는 내관 황씨였다. 그는 두려움에 새파랗게 질린 상태로 숨이 턱까지 찬 채 도망 오고 있었다.

“사람 살려!”

비명과 같은 외침이었다. 목소리가 가닥가닥 갈라져 나왔다. 그 필사적인 외침에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 뒤를 따라서 오고 있는 만희의 눈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어 뒤로 흩날렸다. 거무스름한 피부 위 선명한 적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거구의 사내는 검을 흔들며 마치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 내관을 놀리며 따라왔다.

내관 황씨의 등 뒤는 왕의 검으로 이미 모두 찢기고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피가 이리저리 튀었다.

“전하, 전하!”

연화가 황급히 그를 말리려고 불렀지만 만희는 마치 소리를 못 듣는 것 같았다. 그는 히죽 웃으며 내관을 따라가 그의 뒷덜미를 잡아 땅에 내팽개쳤다.

힘없는 헝겊인형처럼 땅에 나가떨어진 내관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을 기었다. 실금을 한 것인지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더러운 새끼.”

욕설을 중얼거리며 만희가 검을 들었다. 연화는 있는 힘껏 뛰어가서 왕의 팔에 매달렸다.

“전하!”

또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사람을 죽이면 원혼이 늘어난다. 틀림없이 후회할 결과만 생길 것이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만희에게 매달렸다.

“전하, 제발!”

“……이게 누구야. 연화 아니냐.”

왕이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담하고 예상치 못한 그녀의 행동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숨을 멈추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왕이 검을 들어 연화의 목을 내려쳐도 놀랍지 않았다. 왕의 눈은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연화는 그의 목덜미와 머리에 틈 없이 매달린 원혼들을 바라보았다. 너무 촘촘히 붙어 있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 중 몇은 연화를 보고 이빨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갈수록 원혼들을 달래서 보내기가 힘들어지고 있어.’

연화는 노란 가피의 빛을 내보내면서 만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을 마주 보고 있던 왕의 눈이 아주 약간이나마 가라앉으며 이성을 찾는 듯했다. 거기에 힘을 얻어서 연화가 작게 속삭였다.

“전하, 정신을 차리셔요. 제가 곧 두통이 가라앉도록 하겠습니다.”

“두통? 그래…… 그래, 두통. 이 빌어먹을 것을……. 너는 할 수 있지.”

“예, 저를 믿어주세요. 잠시만 눈을 감으시고.”

그녀는 손을 뻗어서 조심스럽게 그의 이마에 댔다.

만희는 눈을 깜박였다. 그는 연화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내관 쪽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그는 틈을 봐서 도망가려고 버벅이며 기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만희의 얼굴이 다시 귀신에 씐 듯 험악해졌다. 그는 입꼬리를 찢어 올리며 연화에게 말했다.

“아느냐? 저것이 네 마을을 불태웠다고 하더구나.”

순간 연화는 몸이 굳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손에서 나오던 노랗고 따스한 빛도 멈췄다. 검고 커다란 눈동자가 얼어붙은 앞에서, 광기에 휩싸인 만희가 속삭였다.

“네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없앴다더구나. 그래도 저것을 가만 두어야 할까?”

만희가 히죽거리며 물었다. 마치 도깨비 같은 형상이었으나 연화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고, 정수리부터 찬물을 부은 것처럼 뼛속까지 차가워졌다.

그게 무슨 말인가.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없앴다고? 모두가 죽었다는 말인가. 어머니도, 이웃집의 아저씨도, 앞집 소녀도, 모두가? 그들이 무사하기만을 바라서 백호를 떠나 이곳까지 왔는데?

믿을 수 없는 말에 연화는 몸에 힘이 풀려서 멍청하게 서 있었다.

만희는 그녀에게서 눈을 돌려 이제 도망가고 있는 내관을 바라보았다. 그는 쫓아가려는 병사들을 웃음을 지우지 않고 제지했다.

귓가가 물속에 들어간 것처럼 먹먹하고 여러 목소리가 중첩해서 들려왔다. 속삭임은 피를 달라고 요구했다.

“됐으니 활과 화살을 내놔라.”

병사들에게서 활을 받아 든 그는 활시위를 당겼다.

벌겋게 달아올라 미쳐 버린 정신이었으나 시위를 매기는 시선은 정확했다. 오래 걸릴 것도 없었다.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사내의 등을 보며 만희는 비웃었다. 저리 달린다고 살 수 있겠느냐?

핑! 하고 팽팽하던 시위가 놓여진 순간 내관의 뒤통수에 화살이 꽂혔다. 커다란 장궁이라 위력이 몹시 강해 두개골이 거의 관통되었다. 눈으로 나온 화살촉이 시체가 땅바닥에 쓰러지며 꺾였다.

“도망간다고 살 줄 알았나 보지? 멍청한 놈.”

만희는 마구 웃으면서 시체 쪽으로 다가가 직접 화살을 잡고 시체를 질질 끌고 왔다. 그의 걸음마다 핏줄기가 흉하게 묻어 나왔다.

두통으로 인해 머릿속은 곤죽이 되는 것 같았다.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계속해서 죽음을 요구했다.

더 필요해, 더 죽여.

이건 대체 누구의 목소리일까. 아주 잠시 그런 의문을 가졌다.

또 누구의 피를 볼까. 살기등등하게 만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주변에 있던 내관들이나 시녀들이 흠칫하며 물러섰다. 모두가 한 걸음씩 물러선 가운데 만희는 검을 뽑았다. 누구의 것이라도 더 피를 보아야 머릿속의 목소리가 만족할 것 같았다.

그 순간 부드러운 손 한 쌍이 다가와 머리를 짚었다.

“전하, 잠시만 무례를 무릅쓰겠습니다.”

작게 잠긴 목소리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까이 다가와 품으로 파고든 연화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검고 둥글고 순한 눈동자는 여전했지만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눈물이 맺혀 있었으나 울지는 않았다. 얼굴도 감정의 동요로 인해 붉었다. 흰 피부에 달아오른 홍조가 열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아름답다,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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