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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70화 (70/113)

70화

곧 백호의 상처가 슬금슬금 아물기 시작했다. 새로 수복되어 올라온 새살이 붉은 상처를 덮었다. 아무리 그래도 동급의 사방신인 청룡에게 꽤 큰 양의 살점을 빼앗겨 타격은 상당할 터였다. 어쩌면 여태까지 겪지 못한 고통을 인간처럼 겪을지도 몰랐다.

상처가 모두 새살로 덮인 뒤 녹색 장포를 다시 어깨 위로 덮고 허리띠를 매고서 백호는 청룡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면 거래를 성실히 이행해라.”

“좋아, 이렇게나 많은 식량을 얻었으니. 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지.”

“맹세를 해라.”

백호가 요구했다.

“나는 지금 여기서 거래의 대가를 지불했다. 그러니 너 역시 제대로 이행하겠다고 맹세해.”

“까다롭기는.”

청룡은 투덜거렸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대가를 받았으므로 그는 망설임 없이 세계의 규칙에 대고 맹세했다.

《나 청룡은 수국의 멸망을, 시대 흐름이 역류하지 않는 한까지 최선을 다해 늦추기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

사방신의 말은 준엄하다. 그가 약속의 말을 내뱉은 이상, 아무리 사방신이라 해도 그 말에 얽매이게 될 것이다. 상황이 어떻게 흐르든 상관없었다. 백호는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는 마음을 놓을 수 있겠군.”

“나를 너무 믿지 못해, 너는.”

“당연하지 않은가.”

백호의 싸늘한 웃음에도 청룡은 입을 삐죽거렸다. 그는 그대로 자신의 영토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 백호의 살점에서 떨어지고 있는 피가 마르기 전에 빨리 돌아가야 했다. 순식간에 열린 길 너머로 청룡이 발을 옮겼다.

“인간 반려 때문에 별짓을 다하는군. 내 긴 평생 사방신이 제 육신을 그따위 이유로 내주는 것은 처음 본다.”

청룡이 남기고 떠난 비웃음이 이제 백호 혼자 남은 방 안에 울렸다. 그 말에 동감이라서 그는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호는 새살이 돋은 옆구리와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뜨끈하게 열이 올라 있었다. 생전 처음 맛보았던 날카로운 통증이 여전히 몸 안에 남아서 전신을 돌고 있는 것 같았다. 비록 본신의 힘에 영향이 갈 정도는 아니었으나 이 육신에는 고통이 한동안 계속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청룡의 힘이 담긴 단검으로 찔렸으니 더했다.

상처가 났던 부위가 욱신거렸다. 정말 익숙지 않은 고통이었다.

그는 미간을 손으로 눌렀다. 머리까지 통증과 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입을 열자 뜨거운 숨이 올라왔다.

“내 고통이 네 행복에 거름이 될 수 있다면…… 더한 것도 내줄 수 있다, 연화야.”

그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정인의 나라라도, 최소한 연화의 생 중에는 무너지지 않도록. 그것을 위해서라면 사실 청룡이 끝내 백호의 안구를 원했더라도 내주었을 것이다. 옆구리와 가슴의 살점 정도면 싸게 먹힌 셈이었다.

백호는 침실로 가서 너른 침상 위에 누웠다. 연화와 함께 나른하고 행복한 오후를 보내며 뒹굴었던 침상이었다.

그녀가 그리워서 백호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고통보다 그녀가 떨어져 나간 고통이 수백 배는 더 힘들었다.

열이 전신으로 번져서 몸이 나른했다.

비록 신이라 하나 백호가 연화의 행복을 보장해 줄 수는 없었다. 난생처음으로 그는 무력감에 휩싸여서 눈을 감았다.

살점이 베어져 나간 만큼 마음도 베어져 나가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러나 연화를 향한 연심은 조금의 퇴색도 없이 여전히 불타올랐다.

***

만희는 아무래도 연화의 표정이 걸렸다.

제사장 성현이 그 이유 같았다. 그와 한 공간에 있을 때마다 연화는 다소 불안하고 불편한 표정이 되었다. 이유를 물었으나 그녀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그저 아니라고만 답했다. 별다른 까닭은 없고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물론 만희는 거기에 속지 않았다.

‘제사장 그 능구렁이가 제대로 답할 리는 없을 테고.’

그는 턱을 두드렸다. 마을의 소식을 알아오라 명했을 때도 제사장의 표정이 흔들렸다. 뭔가 다르다는 낌새를 만희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만희가 소리를 높여 밖의 내관을 불렀다.

“여봐라!”

대답하며 내관이 들어와 그의 발치에 엎드렸다. 왕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치유사 연화가 이곳에 올 때 동행했던 군졸을 찾아서 데려와라. 가능한 입이 무겁고 성실한 자를 찾아라.”

“예, 명 받들겠습니다.”

“단, 제사장 성현이나 그 측근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비밀리에 데려와라.”

“예.”

내관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바로 왕의 명을 받들어 물러났다.

왕궁에서 일하는 자를 불러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난데없이 왕의 부름을 받은 군졸은 벌벌 떨면서 그의 앞에 엎드렸다.

백관이 모이는 전각도 아닌 왕의 사실이었다. 잔뜩 긴장한 군졸은 모자를 벗어 들고 이마를 바닥에 댔다.

두통이 조금 시작될 기미가 있기는 했으나 아직 제정신이라 살의가 치밀지 않는 만희는 군졸의 떨리는 등을 내려다보았다.

그간 참 많은 인간을 죽이고 공포스럽게 만들기는 하였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깨달음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리 후회스럽지는 않았다. 지금조차 그 지독한 두통이 찾아오면 눈앞에 있는 자를 누구고 할 것 없이 모두 죽이지 않을 자신이 없었으니까.

“눈을 들어라.”

군졸은 간신히 긴장을 삼키고 눈을 들었다. 붉은 비단옷으로 몸을 감싼 왕의 소매 끝에서 거무스름한 피부에 강건한 손끝이 보였다. 도저히 더 이상 시선을 올리지 못하고 그는 그저 왕의 손끝만 바라보았다. 괴물이나 다름없다는 새빨간 눈동자나 귀신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볼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네게 물을 것이 있으니, 정직하게 대답해야 한다.”

“예, 예 전하.”

왕의 손끝은 의자 팔걸이를 두드리고 있었다. 의외로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지난번, 치유사 연화를 데려올 때 너와 동료들이 따라갔다고 들었다. 맞느냐?”

“예, 맞습니다.”

“그래……. 천민 부락에도 들어갔고?”

“그렇습니다.”

“데려오게 된 과정을 소상히 말해 봐라.”

군졸은 긴장한 상태에서도 열심히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앞에 앉아 있는 왕의 존재는 그 자체로 공포였다. 대체 왜 다 지난 일을, 그것도 말단의 군졸인 자신을 불러 묻는지 알 수 없었으나, 왕이 묻는다면 당연히 최대한으로 대답해야 했다. 자신의 답이 왕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무슨 사달이 일어날지 몰랐다.

“그, 천민 부락에서 꽤 지체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그 천민 여자……. 아니, 치유사님이 계시지 않아서 어디로 도망간 거냐 물었지만 아는 자가 없어서…… 제사장께서 무척 분노하시어 매일 집을 한 칸씩 태우고 마을 주민들을 벌주었습니다. 여자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마을이 전멸할 때까지 하겠다고…….”

만희는 흠, 하면서 턱을 두드렸다. 제사장의 방식은 도망간 자의 위치를 마을 사람들이 알 때나 효과적인 것이었다. 뭐, 마을 주민들 중 아는 자가 있었을지도 모르니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뭔가 못마땅해서 그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서 여자, 아니, 연화 님이 나타났고 그 자리에서 죄수용의 마차에 태워 수도까지 이송했습니다.”

“묶었느냐?”

“예. 죄수와 다름없이 팔 다리를 모두 묶어 한 치도 움직일 수 없게 하였고 식사는 멀건 죽을 주었습니다.”

왕은 잠시 말이 없었다. 팔걸이를 두드리는 손가락 역시 멈췄다. 대신 손이 허리에 찬 검집 위로 옮겨가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별로 좋은 징조 같지 않아서 군졸은 침을 삼켰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팔이 묶여 있는데 어찌 먹었느냐.”

“엎드려 핥아먹도록 바닥에 던져 두었습니다. 전신을 너무 꽉 묶어뒀던 터라 접시에 얼굴을 대고 핥는 것도 힘겨워하셔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군졸은 대답을 망설였지만 피할 곳은 없었다. 말을 지어낼 재간도 없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답했다.

“예, 죄수용 마차는 창살로 되어 있어 가릴 곳이 없는지라.”

그 순간 왕의 손이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군졸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그저 명을 받들었을 뿐이라……!”

“…….”

왕이 총애하는 여인이다. 그녀를 데려오며 그다지도 모질게 굴었으니 변덕스러운 왕에게 당장 벌을 받는대도 할 말이 없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양손으로 빌었다.

“전하, 제발 용서를!”

만희는 이를 악물고 검의 손잡이를 놓았다. 팔걸이를 움켜쥔 다른 쪽 손은 의자를 부술 기세였다. 그의 새빨간 눈동자가 칼날처럼 곤두서 있었다. 그는 애써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 외는?”

엎드려 떨고 있는 군졸의 머리 위로 떨어진 왕의 목소리는 그의 공포 섞인 예상보다 훨씬 차분했다. 거의 실금이라도 할 기세로 겁에 질려 있던 군졸은 훨씬 작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저 다른 죄수들과 마찬가지로 실려 온 것밖에는.”

“마을은 괜찮은 것이냐.”

“마을은…….”

군졸은 다시 한 번 망설였다.

그는 사실 무관과 함께 천민 부락을 불태우는 데도 동참한 자였다. 내관의 시중을 들며 쫓아가서 다른 군졸들이 재미를 보는 것을 함께 즐겼다.

설마 그것이 큰 죄가 되는 일일까, 하며 그는 두려운 눈으로 왕의 손어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두텁고 커다란 왕의 손은 다시 안정을 되찾고 팔걸이에 올라와 늘어져 있었다.

다소 마음을 놓고 그는 머리를 굴렸다. 만약 왕이 치유사의 대접을 소홀히 한 죄를 물을 예정이고 이게 취조의 시작이라면, 서로 말을 맞출 겨를 없는 사이 가장 밑바닥의 군졸들에게 죄가 뒤집어씌워질 가능성이 높았다. 높은 자들은 언제나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만약 여기서 내가 전부 불어버리면 나만은 살 수 있지 않을까.’

군졸은 눈을 굴렸다.

“대답해라.”

왕이 독촉했다. 군졸은 고개를 숙였다.

“사……실, 그 이후의 일이 또 있었습니다…….”

“뭐지?”

“저, 저……. 제 잘못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뒤를 따라갔을 뿐이며.”

뭔가 일이 있기는 했군. 뛰는 심장과 다르게 만희는 목소리를 부드럽게 꾸며내었다.

“무슨 일이 있었든 물론 네 잘못이 아니다. 윗사람의 잘못이지. 그리고 진실을 말하는 자의 죄는 언제나 경감되는 법.”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군졸이 머리를 바닥에 박으며 감사를 외쳤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는 만희의 얼굴이 마치 귀신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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