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수의 붉은 달-69화 (69/113)

69화

“부처를 모시는 승려들이 참으로 좋아하겠군.”

“부처 이야기는 하지도 마. 골치 아픈 작자.”

청룡이 시끄럽게 구는 게 귀찮아져서 백호는 시녀를 불러 생선찜을 내가도록 했다. 대신 올라온 잡채에 그제야 청룡이 제대로 젓가락을 잡고 음식을 입에 넣었다. 고소하고 따뜻한 맛이 일품이었다. 맑은 청주 역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맛이 깔끔했다.

“이런 음식을 할 줄 알면서 생선찜 따위를 내다니.”

그가 투덜거렸다. 어차피 뭔가 용건이 있으니 불러냈을 텐데 이런 걸로 기분을 거슬리게 수작을 부리다니 역시 백호와는 친하게 지낼 수가 없었다.

밖에서 비 오는 소리가 들렸다.

청룡은 잠시 놀라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넓게 열린 미닫이 창 밖으로 흐린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빗방울은 굵었고 바람 없이 수직으로 땅바닥에 낙하했다. 온 세계가 젖어서 흔들리고 축축하게 젖은 공기가 피부를 적시는 느낌이었다.

“신령계에 비가 오다니 드문 일이군.”

언제나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는 공간이 신령계다. 폭풍우나 홍수와 가뭄 같은 것은 문자 그대로 다른 세계의 일이다. 간혹 이례적으로 일부러 백호가 날씨를 조종하여 비를 내리는 경우는 있으나 인간계처럼 많지 않았다. 그래도 자연계의 정령들 덕분에 수량은 풍부히 유지되었기 때문이었다.

청룡은 물끄러미 건너편에 앉은 동료를 바라보았다.

“슬픈가?”

그러나 지금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보니 청룡은 능히 백호의 마음이 짐작되었다. 백호 역시 딱히 부정하지 않고 조용히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인간계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청룡이 모를 리야 없었다. 어디까지 아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라면 아마 거의 다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슬프지. 안 슬플 수가 있나.”

“이렇게나 차분한 네놈 모습은 처음이야.”

“나도 이런 내가 처음이라 이상해.”

청룡이 킬킬 웃었다. 둘은 말없이 비 오는 풍경을 바라보며 잔을 기울였다. 호리병이 거의 비어갈 무렵 백호가 입을 열었다.

“부탁이 있다.”

청룡이 말해 보라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백호의 시리게 푸른 눈은 비 오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수국의 멸망을 가능한 늦춰다오.”

“…….”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청룡은 잔을 들다가 말고 내려놓았다. 소박한 상 위에 손을 짚고 눈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다.”

백호는 호리병에서 다시 술을 따라냈다.

“제사를 받으러 인간계에 갔었다. 수국의 수도에 있는 금수들을 보살필까 하여 잠시 둘러보았는데…… 냄새가 나더군. 부패의 냄새가.”

“…….”

청룡은 속을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다.

시대의 흐름을 말하는 것은 사방신들 사이에서도 드문 일이다. 게다가 백호가 언급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세계의 흐름이었다. 과연, 그 여인 때문에 그러는 거군. 청룡은 속으로 실소했다.

“멸망을 늦춰달라니, 그건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알아, 많은 시간을 달라는 게 아니다. 다만 가능한 만큼만 미뤄달라는 것이지.”

“왜?”

“…….”

백호는 답하지 않고 다시 술을 마셨다. 청룡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유를 말해 주지 않으면 거절이다.”

“말해 준다면 수락할 건가?”

“조건을 봐서.”

허, 하면서 백호가 웃었다. 과연 청룡은 자신이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는 자다. 이기적인 동료를 익히 잘 아는 그는 한숨을 쉬었다.

“내 반려가 그곳에 있다.”

“그건 알아. 그런데 왜 그 여자를 데려다 달라는 것이 아니라 수국의 멸망을 늦춰달라는 게 부탁이냐는 거다.”

“연화의 정인이 수국의 현재 왕이다.”

청룡은 침중한 얼굴로 백호를 바라보았다. 그의 반려가 인간계로 넘어와 왕의 손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수령에게 전해 들었지만, 그것을 백호에게 듣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려오면 되는 일이잖나. 정인이야 바뀔 수도 있는 것이지.”

“……난 그녀의 행복을 방해할 생각은 없어.”

“맙소사, 세상 순정적인 사내 나셨군.”

못마땅하고 이해가 되지 않아서 청룡은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지만 연화와 만희를 지켜보았을 때, 그들이 연인일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만큼 둘의 관계가 담백해 보였던 탓이다. 청룡은 자신의 눈썰미에 제법 자신이 있었다. 다소 의아해서 그가 물었다.

“그런데 수국의 왕이 그녀의 정인이라는 건 정말 확실한 거냐?”

“그래. 이곳을 떠날 때도 그랬고, 돌아가서도 바로 그의 곁으로 갔다.”

정인인 건 확실하다. 아니라면 어찌 일국의 왕이 인간의 여인인 연화를 그토록 잘 돌보아 줄까.

수국의 왕은 그녀에게 좋은 옷과 음식을 주고 안락한 거처에 머물게 해주었다. 연화는 평화로워 보였다.

왜 연화의 마을이 엉망이 되는 것을 그대로 두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왕이 모르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 아닐까 싶었다.

복잡한 속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들끓었다. 구해내서 중간계에 머물게 하고 있는 연화의 양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을 돌려보내야 하나, 왕이 그들을 돌보고 연화가 외롭지 않도록 해야 하나 싶었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가지 않고 백호의 보호 아래 있다면…… 연화가 그들을 보기 위해 잠시라도 이곳에 시선을 두어주지 않을까 욕심이 났다.

신답지 않은 치졸한 마음이었으나 백호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자꾸만 다른 길로 새는 생각을 다잡으며 백호는 청룡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유를 말했으니 이제 네가 원하는 조건을 말해라.”

“……뭐, 좋아.”

청룡은 의심이 많은 자다. 그는 과연 왕이 연화의 정인인가부터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굳이 그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역사의 사건을 뒤로 미루는 건 제법 힘이 드는 일이다. 알고 있겠지.”

“가능한 한도 내에서 미뤄달라는 뜻이다.”

“어쨌든 말이야. 시대의 흐름이 역류하지 않는 지점을 찾아내는 것도 힘들다. 인간의 역사는 섬세하니까 말이야. 흐른 듯 만 듯한 신령계와는 달라.”

“…….”

백호는 한숨을 쉬었다. 이자가 대체 얼만한 반대급부를 요구하려 이렇게 말이 많은가 싶었다.

청룡은 대담하게 말했다.

“네 한쪽 눈을 달라고 한다면 어떤가.”

제정신인가 하는 시선이 돌아왔다. 그러나 청룡은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앉아서 백호를 바라보았다.

“금수의 신의 눈, 그 정도라면 역사의 흐름을 막는 것에 합당한 대가라고 보는데. 아닌가?”

“왜 내 눈을 달라는 거지?”

“가장 중요한 신체 부위 중 하나에 담긴 바람의 정수를 가지고 싶어서 그러지.”

백호는 헛소리 작작하라는 얼굴이 되었다. 설마 청룡도 진심은 아닐 게다. 상제가 안다면 벼락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백호뿐 아니라 요구한 청룡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저 거래를 유리하게 하기 위한 수작일 뿐이다.

“불가하다. 내 눈이 없다면 모든 신령계를 돌보지 못한다.”

“어차피 나머지 하나가 남잖아? 까다롭군. 그럼 조건이 안 맞다고 봐도 되나?”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겠지? 진짜 조건을 말해 봐라.”

다혈질이던 놈이 생각보다 치밀해졌어. 청룡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백호의 표정 없는 눈을 보면서 그는 좀 더 쉬운 조건을 내걸었다.

“그럼 네놈의 살을 내놔라.”

“그건 또 왜.”

“지금 바다 밑의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아서. 네놈의 살 몇 점이라면 바다의 생물들을 한참 먹일 수 있겠지.”

백호는 청룡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닷속 역시 다른 영토나 다를 것이 없었다. 신령계나 인간계보다 오히려 더 수많은 풍랑과 조류에 휩쓸리는 곳이라 영토의 식량 상태는 자주 뒤바뀌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번연히 앞에 앉아 있는 자신의 살점을 베어다가 영토의 주민들을 먹이겠다니 정말 뻔뻔하기 그지없는 작태다. 청룡은 물론 태연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이기적인 동료의 모습에 백호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흠, 거래 성립인가?”

“그래, 받아들이지.”

청룡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술잔을 끝까지 비웠다. 밖에는 비 오는 소리가 들리고 술이 맑고 시원했다. 나름의 정취가 있군. 그는 이 날씨가 백호의 마음과 같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즐거워했다.

“살은 어디서 떼어낼 건가.”

“너의 정수에서 가장 가까운 곳.”

“성격 한번 고약하군.”

그 말은 심장 근방에서 살을 도려내겠다는 뜻이다. 백호는 눈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군말 없이 일어서서 허리띠를 푸르고 장포를 젖혔다.

옅은 녹색의 장포가 벌어지고 그의 넓게 벌어진 어깨와 가슴이 드러났다. 흰 피부 아래로 촘촘하게 근육의 결이 보일 정도였다.

잘 짜여진 몸을 보면서 청룡이 허리춤에서 단도를 빼냈다. 백호보다 키가 작은 그가 다가서자 시선은 아래에서 위를 향했다. 백호의 시퍼런 시선을 마주 보면서 청룡이 씩 웃었다.

“이대로 심장을 찌르면 어떨까. 혹시 아나, 천하의 백호가 죽을지?”

“네놈이 어떻게 찌르든 살을 떼어내든 안 죽으니 걱정 마라.”

별 시답지 않은 소리를 다 한다. 어차피 이 신체에 모든 힘이 담긴 것은 아니었다. 사방신은 그 세계의 곳곳에 자신의 힘을 깃들여 놓았고, 그 중심 의식이 육체로 화한 것이 현재의 몸이었다.

어쨌든 신의 살이니 조금만 베어가더라도 바다의 주민들을 전부 먹일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백호의 생명에는 어떠한 지장도 없었다.

다만.

“생명과는 관계가 없지만…… 고통은 꽤 크겠지.”

비웃음과 섞인 냉소였다.

아무런 경고도 없이 청룡이 단검을 백호의 옆구리로 찔러 넣었다. 일반적인 검이라면 흠 하나 낼 수 없는 피부였지만 이건 백호와 충돌하는 사방신의 힘이 깃든 검이다.

망설임 없이 단번에 들어온 검날에 백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타는 듯한 열감이 순식간에 전신으로 번졌다. 고통스러운 그의 표정을 보면서 청룡은 그대로 위로 올려 그었다.

뼈나 내장을 다칠 만큼 깊지는 않았다. 살이 많지 않은 백호의 옆구리와 가슴 옆면을 도려내면서 청룡은 생각만큼 유쾌하지 않았다.

생으로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백호의 몸은 미약하게 떨렸다. 식은땀이 순식간에 희고 반듯한 이마 위로 났지만 그는 신음성을 내지 않았다.

“독한 놈.”

이를 악물고 참는 백호를 보며 청룡이 투덜거렸다. 그는 순식간에 도려낸 백호의 살점을 손수건에 놓고 잘 감쌌다. 붉은 피가 흘러 수건을 적셨고 그 한 방울도 떨어뜨리지 않으려 청룡은 재빨리 접시를 그 밑에 댔다. 팔을 내려 자신의 상처를 살피던 백호는 그런 청룡을 보고 기가 막힌 표정이 되었다.

“피도 아깝다 이건가.”

“당연하지. 사방신의 피라면 한 방울로도 호수를 정화할 수 있을 텐데.”

청룡은 접시와 살점을 함께 쥔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냉큼 대답했다. 신의 살과 피는 곧 힘의 정수다. 누구에게도 쉽게 내주지 않는 것이었고 그래서 더 귀중한 것이었다. 청룡은 히죽거리며 손에 든 백호의 살덩어리를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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