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왕의 침실 바로 위 지붕 위에 앉아서 물의 사방신은 만희를 내려다보았다. 또다시 그의 희생자로 저승의 주민이 된 이들이 만희의 머리맡에 기웃거렸다. 굳이 쫓아줄 의리는 없어서 청룡은 무심히 그 광경을 보기만 했다.
왕의 미간에 주름이 지기 시작했다. 지독한 두통이 또다시 시작된 것이다.
‘저승의 주민들이 앙심을 품기 시작하면 골치가 아플 텐데.’
청룡은 만희를 비웃었다. 그가 세우기를 허용했던 왕조는 이제 스러질 때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언제쯤 스러질지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청룡의 마음은 떠난 지 오래였다.
‘언제 어떻게 무너질지는 상제폐하만이 아시겠지만 가호하는 나의 마음도 중요한 것이니.’
만희는 사촌형을 살해하여 왕이 된 자로 정통성이 없었으나 청룡이 판단하는 것은 그런 부분이 아니었다. 그냥 이 수국 자체에 청룡이 갖는 애정이 사그라진 것이다.
만희가 수호신에 대한 충성심을 갖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의 발아래에서는 한 나라의 왕일지라도 한낱 개미에 불과한 인간이니까.
이 수국의 영토 자체가 청룡의 물 위에 떠 있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아예 모른다. 청룡은 본래 물속의 인어들을 지배했으나 인간 쪽이 더 흥미롭다는 이유로 물 위의 영토를 만들었다는 사실 역시도.
사실 청룡의 진짜 백성은 뭍 위의 인간이 아닌 물 아래의 인간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가 관심을 준 물 위의 인간은 왕이 아닌 다른 쪽이다. 청룡은 고개를 돌려 왕의 후궁전에 갇힌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전각의 지붕을 뚫는 청룡의 눈에 확실히 보였다.
약사여래의 가피를 받은 그녀의 몸에서는 은은한 노란 빛이 새어 나왔다. 일반 인간에게야 보이지 않겠지만 사방신의 눈에는 명확하게 보인다.
‘약사여래의 가피와 백호의 애정을 받는 여자라. 신기한 존재야.’
청룡은 턱을 괴고 그녀의 가느다란 등을 내려다보았다. 잠을 자고 있어 그녀는 조용했다. 몸이 아주 가늘고 버드나무 가지 같은 여인이었다. 청룡은 그녀를 자세히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화가 미인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과연 사방신의 사랑을 받을 만큼인가, 그것은 알 수 없었다. 인간이라는 한계마저도 딛고 백호의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간 여자인 게 아닌가.
그는 잠든 연화의 얼굴을 훑어보았지만 역시 그의 취향은 아니었다.
‘난 좀 더 키가 크고 대담한 미인을 좋아하니까.’
청룡의 취향에 연화는 지나치게 얌전하고 곱기만 하다. 하지만 백호는 아니었던 모양이지. 청룡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걸렸다.
수령이 전해준 이야기는 꽤 재미있었다. 붉은 달이 뜨는 밤에 일이 꼬여서 관계를 맺게 된 인간 여인과 어느새 진심이 되어버린 신. 세계를 공평히 다스리기 위해 사감(私感)이 최소화된 상태로 태어난 사방신이 사랑을, 심지어 인간 여인 따위를 상대로 진심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청룡은 희한하게 여기며 감탄 비슷한 것을 했다. 심지어 저승에서 나와 헤매는 혼령까지도 없애버렸다지 않은가. 그 엉덩이 무거운 현무가 신령계까지 행차했다고 들었다.
그는 턱을 긁었다. 백호는 과연 어디까지 저 여자를 위해 해줄 것인가. 여인은 비록 무슨 연유에서인지 수국의 왕실로 와 머물고는 있으나…… 백호의 마음 역시 식었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사방신끼리는 가능하면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다. 지나치게 큰 존재들이며 동시에 지나치게 다른 기운을 품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이 슬쩍 닿는 것만으로도 세계 어딘가에는 이변이 생겼다. 물론 청룡은 이변에 대해 크게 관심을 두지는 않았지만 상제가 좋아하지 않았다.
상제는 사방신들이 오갈 때마다 책임이 있는 자의 영토에 번개를 내렸다. 특히나 바다에서는 그 전류가 잘도 퍼지기 때문에 바다 밑이 몹시 시끄러워져서 청룡은 번개를 매우 싫어했다.
그 때 수령이 눈을 빛냈다. 눈동자가 존재하지 않는 안구가 환하게 빛나면서 그녀가 뭔가 중얼거렸다. 다른 곳에서 소식이 전달된 모양이었다.
【저, 청룡 님?】
“왜 그러느냐?”
수령이 허공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그녀는 반짝이는 눈을 돌려서 청룡 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교신을 유지 중이라는 뜻이었다.
【백호 님께서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백호가? 왜?”
“얼굴을 본 지 오래되었으니 교분을 나누고 싶다 하시며.”
청룡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교분?”
교분이라니, 이보다 더 안 어울리는 말이 있나. 청룡도 알았다. 저 말은 당연히 핑계다. 그들 둘은 교분 따위를 나누려고 따로 만날 정도로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다. 비록 오래된 관계로 인해 친구라 부를 수는 있었으나 사방신 중에서도 만나기만 하면 아웅다웅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상제가 좋아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별다른 용무 없이 만나고 싶어 한다고?
“아니지. 분명히 용무가 있겠구만.”
어차피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백호, 상제는 책임 있는 자에게 화를 내니 번개는 신령계로 내릴 것이다. 흥미로움에 청룡이 눈을 반들거리며 빛냈다.
“역시 제 말 하면 오는 게 호랑이로군.”
그가 낄낄대며 웃었다.
***
신들은 대다수 시대의 흐름을 안다. 정확한 시기와 위치를 특정할 수는 없어도 그들은 한 일족이, 혹은 한 세대가 흥하고 망하는 과정을 육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대체적으로 십여 년 안에 그들의 예감은 현실로 드러나고는 했다. 그것이 자신의 영토가 아닌 다른 세계여도 마찬가지였다.
인간계에 내려갔을 때 백호는 그것을 느꼈다. 아주 진하고 끈적한, 쇠퇴와 멸망의 냄새. 아마도 곧 다가올 새로운 세계의 풋내. 거기에는 짙은 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그 과정에서 희생될 인간들의 피 냄새일 것이다.
지독하게 많은 혼령이 새로 생겨날 것이고 수많은 은원이 해소되지 못한 채 사라질 것이며 오래된 나라는 저물고 새로운 세대가 나타날 것이다.
그는 이마를 짚었다. 문제는 그 부분이었다. 연화의 정인인 사내는 수국의 왕이었다. 만약 나라가 전복된다면 가장 먼저 신변에 문제가 생길 위치다. 그렇다면 그의 곁에 있는 연화 역시 마찬가지다.
왕비로 올릴지 올리지 않을지 알 수 없었지만 정식 왕비로 삼아도, 곁에 두고 총애만 하여도 결과는 같았다.
수도를 날아다니며 직접 목격했던 바로 미루어보면 수국의 왕은 결코 성군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다. 백성들에게 있어 가장 큰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저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왕조 교체의 시기에 선대 왕은 당연히 처참하게 목숨을 잃을 것이고 그의 곁에서 총애를 받던 연화도 같은 처지가 될 것이다. 그것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최소한 현 왕의 치세가 끝날 때까지라도 시대가 저무는 것을 막아야 했다. 다른 것이 아닌 연화의 안전을 위해서. 폭군의 치세가 길어져 그만큼 연장될 수국 백성들의 고통에 대한 고민 따위는 백호의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
금수의 신인 그가 인간계에 직접 손을 댈 수는 없으니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인간계를 다스리는 청룡을 설득하는 것.
비록 청룡 역시 운명의 흐름에 따르는 존재라지만 분명 세계를 다스리는 신의 자격으로서 역사의 좌표를 미세하나마 움직이는 것은 가능했다.
오래도 필요 없었다. 그저 연화가 생을 다할 때까지만, 백 년도 안 되는 시간이라도.
“일단 수령에게 전했습니다. 바로 곁에 청룡 님이 계시다더군요.”
“그래.”
백호의 얼굴에서는 어둠이 가시지 않았다. 그것이 그리움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호접은 조심스럽게 허리를 굽혔다.
“청룡 님께서 행차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상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놈이 수경을 통해 들어온다면 곧이겠지. 간단한 주안상을 내오거라.”
바닥에 정좌하여 앉은 채로 백호는 흰 호리병에서 술을 따라냈다. 청명하고 맑은 청주(淸酒)가 흰 술잔 안으로 흘러들었다. 상 위에는 갓 무쳐낸 갖은 산채와 생선찜 요리가 올라가 있었다.
그가 두 잔에 모두 술을 채웠을 때, 그의 정면 허공에 서서히 소용돌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물방울이 거품을 일며 빙글거리고 돌았다. 둥그런 원은 점차 넓어져 이윽고 저편의 광경이 보였다.
바닷물로 넘실거리는 안쪽 저 너머로 건물들이 늘어선 것을 보니 용궁의 마당인 모양이었다. 저편으로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푸르고 화려한 전각이 보였다. 새파란 기와 위로 황금색의 장식들이 수놓아져 있다. 수국의 왕실과 일견 비슷하였으나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하고 세련된 건물이었다.
백호는 턱을 괴고 그 광경을 구경했다.
“여전히 악취미로군.”
냉정하게 평가하면서 그는 술을 홀짝 마셨다. 모든 것이 자연에 가깝게 소박한 것을 좋아하는 백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계를 다스리는 청룡과 주작은 유달리 화려한 것을 좋아했고, 현무와 백호는 소박한 것을 선호했다. 서로 맞지 않는 취향이었다.
“먼저 불러놓고서 남의 취향을 존중도 하지 않는 건가?”
불쾌해하는 목소리가 원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백호는 시큰둥하게 다시 한 번 술을 마셨다.
“어차피 네놈도 여기 와서 초라하네 어쩌네 할 거잖아.”
“그거야 실제로 초라하니까.”
“네놈이 악취미인 것도 사실이야. 건물 주변을 쓸데없이 죄다 금으로 둘러싸 놓고서 좋은 취향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게냐.”
소용돌이 속에서 청룡이 나타났다. 그는 물길을 헤치고 나와 마른 땅에 발을 디뎠다.
긴 푸른 머리를 높이 묶은 채 잠화를 꽂은 것이 변함없이 화려한 모습이었다. 키는 컸으나 늘씬하고 고운 생김새라 일견 여인으로도 보일 법한 모습이었다. 백호는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상제의 노여움도 마다 않고 나를 부르다니 대체 무슨 일이지?”
청룡이 빙글거리며 웃었다. 그의 도마뱀과 같은 눈이 깜박였다.
“……글쎄, 좋은 술이 들어와서라고 하면 믿어줄 건가.”
“그럴 리가. 하지만 재미있는 일일 것은 확실할 듯해서 왔지. 재미없는 일이라면 여기다가 바다를 소환하고 가버릴 테다.”
“그러든지. 상제가 싫어할 테지만.”
“상제는 지금 이 초대도 좋아하지 않을걸. 들키면 신령계에 칠 일간 벼락이 내리꽂힐 게다.”
백호가 피식 웃었다. 신령계에 꽂히는 벼락은 이미 각오하고 있는 일이었다.
청룡은 백호의 건너편에 앉아 주안상을 들여다봤다. 예상과 다르지 않은 술상에 그는 비웃음을 머금으려다가 생선찜 요리를 발견하고 인상을 구겼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왜 하필 생선찜이야?”
“아, 이런.”
백호가 중얼거렸다.
“네가 생선 요리를 안 좋아한다는 사실을 또 잊어버렸지 뭔가.”
“잊어버릴 게 따로 있지, 감히 내 영토의 주민을 잡아다 요리해서 내 앞에 내놔?”
“민물고기야.”
“모습으로 구분은 안 되잖아!”
“거 참, 희한하단 말이야. 네놈은 왜 생선을 안 먹는다는 거냐? 난 고기 요리를 먹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데. 약육강식, 강자가 먹는 게 자연의 섭리상 당연하지 않나.”
“닥쳐. 야만적인 놈. 난 바닷속에서 나는 건 해초만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