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연화가 아주 밉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밉지도 않은 게 스스로도 신기했다. 그녀의 존재 때문에 자신의 꿈이 망가졌는데도 별다른 감정이 없을 수가 있다니.
심지어 며칠간 지켜보며 오히려 호의적인 감정이 생기다니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 덕분에 이제 사영은, 백호의 반려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아예 접어 넣을 수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모두가 사영과 같지는 않았다. 오랜 기간 왕의 곁에 있던 자들은 연화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치유사가 들어온 덕에 왕이 충동적으로 살인을 하는 일은 확연히 줄어들었으나 사람들은 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천한 여자가 들어앉아 왕의 예쁨을 받는다고만 했다.
‘특히 방금 저 침방시녀.’
이름이 은연이라 했던가. 연화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요염하고 아름다운 얼굴 밑으로 분노가 흘렀다. 왜 그녀가 그토록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게 되었는지 자세한 사정을 알 도리는 없었으나 몹시 찜찜하기는 했다. 다른 이들이 경멸에 가깝다면 은연의 감정은 증오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감정이란 도대체 모르겠군.’
사영은 고개를 저었다.
***
아침이 되어 제사장 성현은 눈을 떴다. 시야가 흐릿했다.
괴이한 일이다. 마치 오랜만에 집에 들어온 것처럼 어딘가 낯선 느낌이 들었다. 한동안 집을 떠난 일은 거의 없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낯설다. 그는 눈을 껌벅거리다가 일어나 앉았다. 여름의 무더위 때문인지 땀으로 목덜미가 축축했다.
하인이 들어와 세숫물을 들여놓았다. 제사장은 세숫물에 손을 담갔다가 충분히 시원하지 않아서 다시 가져오라고 꾸짖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그가 다시 가져온 물 역시 미적지근했다. 불쾌감에 제사장이 소리를 질렀다.
“뭘 하는 게냐! 시원한 물을 가져오라니까!”
“그, 그것이.”
하인이 쩔쩔 맸다. 새로 받아온 물도 계속해서 미지근했다.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성현은 결국 시원찮은 물로 세안을 하고 땀에 젖은 채 일어섰다.
“며칠 전만 해도 집안에 놓아두었던 물도 차가웠는데 도통 무슨 일인지.”
하인이 중얼거렸다. 날이 더워져서인가, 했지만 청수희가 부리던 술수를 거두어서 그렇다는 사실을 일개 인간이 알 리가 없었다.
찝찝한 상태로 궁으로 나아간 제사장은 왕이 부른다는 소식에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간 자신을 찾지 않던 왕이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달려간 왕의 침실에는 그 치유사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성현을 보고 움찔해서 고개를 돌렸다. 머리를 짚고 있던 만희가 흘긋 성현을 바라보았다.
연화가 그에게서 손을 떼려 했지만 왕은 고개를 저었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에 다시 손을 댔다.
“왔나?”
성의 없는 인사였지만 성현은 감지덕지하며 왕에게 엎드려 절했다. 암살 사건도 있었던 터라 궁 안의 모두가 행동을 조심하고 있었고 제사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지엄하신 전하를 뵙고자 달려왔나이다. 부르심이 계셨다 하여.”
“그래.”
만희는 턱을 매만졌다. 두통은 없었지만 연화가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좋아 일부러 그녀를 불러 곁에 앉혀둔 참이었다.
제사장을 불러온 것은 연화의 말 때문이었다. 두통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에 만희의 곁으로 달려온 연화는 말을 꺼내기 위해 한참을 애썼다. 보다 못한 만희가 뭔가 말하고 싶으면 하라고 채근을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이마를 만지면서 연화가 조심스럽게 건넨 말.
‘혹시…… 제 마을의 안위를 알 수 있을지요. 전하의 자비에 기대어 천것이 감히 여쭙습니다.’
‘마을이라. 네가 떠나온 곳 말이냐.’
‘돌아가겠다는 심산이 아니옵니다. 그저 알고만 싶어서.’
만희는 천천히 턱을 두드렸다. 연화는 다소 조심스럽게, 자신의 심기를 어지럽힐까 무서운 듯 말을 꺼냈다.
‘그들이 안전한지, 어머니는 몸이 어떤지 그것만이라도 알고 싶습니다…….’
돌아가겠다는 생각은 아니라고 연화는 반복해서 말했다. 원하는 것은 그저 그들의 안부를 아는 것뿐이라고 말하는 연화는 우울하면서도 슬퍼 보였다.
가만히 연화의 말을 들은 만희는 별다른 대꾸 없이 제사장을 불러오라 일렀다.
발 앞에 엎드린 성현을 내려다보면서 왕이 입을 열었다.
“제사장, 내 치유사를 데려오라고 했던 그 마을의 소식. 알고 있나?”
성현은 왕의 의도를 읽어내려 애썼다. 만희의 적안은 안정되어 보였다. 그리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순간 돌변할 수도 있는 자다. 그리고 곁에는 그 치유사 여인이 아주 친근하게 왕의 머리에 손을 짚고 있었다.
그는 궁 내에 도는 소문을 잘 알았다. 치유사의 방에 자주 들르며 호의적인 대화를 나누는 왕, 연화와 그가 이미 정을 나누었다는 소문. 제사장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마을을 불태우고 모두를 죽여버리라 명을 내린 것은 그였다. 하지만 지금 그걸 그대로 말했다가는 어떤 사달이 날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왕은 기꺼워했겠지만 만약 치유사에게 혼이 팔린 상태라면 성현 자신에게 죄가 떨어질지도 몰랐다. 더구나 두통이 없을 때의 왕은 이유 없는 죽음을 썩 즐기지 않았다.
“그 마을의 소식은 제가 알지 못합니다. 전하께서 알고자 하신다면 제가 노력하여 알아오겠나이다.”
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가 떠나온 마을의 소식을 신경 쓰는 것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자신의 곁에 있을 것이니 소식 정도야 알아보는 게 나쁘지는 않다. 안심시키고 아예 마음 놓고 지내게 하는 쪽이 좋다. 거기에 더해 그 ‘백호’라는 사내를 아예 잊어버리게 하는 것도 좋고.
“좋아. 일단 그 마을의 소식을 알아와라. 연화의 어머니 소식도 함께.”
“명 받들겠나이다.”
대답하며 성현의 뒷덜미에 다시 축축하게 땀이 났다.
그는 분명 떠나오며 마을을 전부 불태우고 죽이라 명했고, 그 명을 이행했던 내관은 돌아와서 군졸들이 충실히 성현의 명을 따랐다고 전했다.
대체 어떻게 일을 수습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왕은 단지 치유사를 데려오라 명했을 뿐이니 그 죄는 온전히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었다.
‘당시 일을 했던 무관에게 죄를 뒤집어씌워야겠어.’
마을이 멀쩡하다고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만약 연화의 양어머니나 마을 사람들을 데려오라는 명이 떨어진다면 큰일이다. 애초에 모두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다른 이에게 뒤집어씌우는 쪽이 백배 나을 것이다. 그는 속으로 계산을 하며 머리를 숙였다.
연화는 어두운 얼굴로 계속 성현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제사장이 일어나 나갈 때까지 그녀가 고개를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만희는 물끄러미 연화를 바라보았다. 연화는 뭔가 묘하게 성현을 꺼리는 기색이었다.
그는 입을 열어 직접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녀는 불편한 일을 솔직하게 입 밖에 내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알고 싶은 게 있다면 만희가 직접 알아봐야 했다.
***
왕궁 지붕에 푸른 머리의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머리를 높이 묶어 올린 그는 왕궁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머리에 꽂은 잠화(簪花)가 탐스럽게 빛났다. 가볍게 지붕을 딛고 움직이는 발걸음에 거침이 없었다.
“수령아.”
그의 말에 푸른 정령 하나가 남자의 어깨 위로 나타났다. 형체가 흐물흐물한 날개를 등에 단 자그마한 사람 형상을 한 정령은 눈알이 없는 눈을 깜박였다. 청룡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기와지붕 위에 앉아버렸다.
“네가 말한 백호의 인간 신부가 여기 있다는 게지?”
【그렇습니다, 청룡 님.】
“재미있구나.”
청룡이 해사하게 웃었다. 선이 고운 그의 흰 얼굴이 달빛을 받아 빛났다.
그는 턱을 고이고 앉아서 인간계를 내려다보았다. 고요하고 평화롭다. 밤은 소리 없이 수국의 왕궁을 덮으며 흐른다. 달빛이 요요하고 물결은 잔잔하다.
물론 겉으로만 그렇다. 저 밑으로 얼마나 썩어 문드러진 일들이 많이 벌어질까. 물론 그는 모두 알고 있었지만 딱히 손을 댈 생각은 없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평민들은 반란군을 조직해 들고 일어나고 있지만 아직 규모가 충분치 않았고, 수국 왕실의 피는 아직 청룡의 가호를 간직하고 있었다.
언제쯤 이 나라가 무너질까. 그건 청룡 자신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상제의 안배에 따라 운명이 흘러갈 뿐이었다. 희례연에 연꽃이 피면 왕조가 바뀐다―그것은 상제의 말이기 때문에 청룡 역시 그저 뜻을 짐작만 할 뿐이었다.
“청수희가 이곳을 어지간히 오가더니 요즘은 좀 잠잠하군. 눈치가 있는 편이니 내 말을 알아듣기는 했겠지만.”
그 재미만 찾아 쏘다니는 샘의 정령이 인간에게 관심을 기울이다니 희한한 일이다. 항상 예쁘게 웃으며 청룡을 약 올리듯 이리저리 인간계 일에 간섭하고 다니는 청수희를 생각하면서 청룡은 조용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백호는 성질이 불같은 신인데, 과연 제 여인을 빼앗기고도 가만히 있을까? 제것을 애먼 사내에게 내주었으니 얼마나 속이 끓어오르고 있을까. 생각만 해도 재미있어서 청룡은 입맛을 다셨다.
“어떻게 생각하냐, 수령아. 설마하니 백호가 인간 하나 때문에 다른 계로 진입할까?”
【글쎄요.】
수령은 날개를 흔들었다. 그녀와 친한 신령인 호접이 몹시 힘들어 하여 그녀가 알아본 바로는 대단히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둘 모두 세계를 넘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들이어서 친해진 기묘한 인연이었다. 비록 속한 세계가 다르다고는 하나 수령과 호접은 그것을 넘어선 우정을 지속하고 있었다.
힘들여 이곳 저곳으로 알아본 바 어렴풋이 알게된 사정은 수령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무려 신령계의 신인 백호가 인간의 반려를 떠나보내고 깊이 상심하여 하루 종일 궁 안에서 벗어나질 않는다던가. 백호는 다혈질이고 잔인한 사방신이다. 어떤 짓을 할지는 예상할 수가 없었다.
만약 백호가 노한다면 그 분노는 수국의 왕을 향할 것이다. 현재 왕실의 핏줄을 잇는 자는 단 하나, 만희만 남았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왕조의 대가 끊기는 결과가 될 수도 있었다.
“이 나라의 왕조 역시 좀 손을 볼 때가 되긴 하였다. 하지만 그건 내 손에 의해서지, 백호가 손을 댈 것은 아니지.”
청룡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는 백호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동료 사방신의 인간 신부라면 구해줘도 별 상관은 없겠으나 그게 백호라면 별로 구해주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 여자에게 그리 빠져 있다니 애간장 좀 닳는 모습을 봐도 괜찮지 않은가. 아무리 예측불허의 백호라도 사방신의 경계를 깨는 짓은 할 수 없을 테니. 여자를 볼모로 약을 좀 올려도 흥미로울 것이다.
“흠. 인간이란 재미있지만 역시 역겨운 존재야.”
인간계의 영토를 주작과 나누어 다스리는 청룡은 인간에 대해 다소 냉소적이었다. 그는 감각을 열어 궁 아래쪽을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