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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66화 (66/113)

66화

가슴 속에서 그리움과 애틋함이 섞여 소용돌이쳤다. 이 감정을 무어라 정의해야 하는가, 연화가 떠난 내내 가슴의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백호는 알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심장 저릿한 아픔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확신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구나.”

연화의 뺨에 실체 없는 손을 얹으며 백호가 속삭였다. 설사 연화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더라도 알아듣기 힘들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너를 정말로 사랑하게 되었구나…….”

스스로도 믿기 힘들어서 백호는 눈을 깜박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방신은 영토의 주민들과 다르다. 사적인 감정은 태생적으로 크게 느끼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래야 오랜 시간 흔들리지 않고 세상의 규칙에 온전히 봉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방신이 인간의 여인을 사랑하게 되다니.

백호는 우두커니 서서 연화를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세상의 규칙 앞에, 영토의 주민들이나 다름없는 작고 힘없는 미물이 된 기분이었다. 의도치 않았던 감정에 휩쓸려 풍랑을 만난 조난자. 이 연약하고 가느다란 인간의 여인을 사랑하게 된 신.

아무리 속삭여도 이제 그녀에게 다정한 말을 전할 수 없게 된 남자.

그 때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얼 하고 있는 게냐?”

“전하.”

남자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 연화가 바로 몸을 돌려 바닥에 내려가 절을 했다. 백호의 눈앞에 나타난 남자는 큰 키에 체격이 좋은, 흑발 적안의 사내였다.

그는 무표정하고 싸늘한 표정이었으나 연화가 고개를 들자 거짓말처럼 냉기가 녹아 사라졌다. 표정에 큰 변화는 없었지만 누가 보더라도 부드러운 감정이 뒤에 흐르는 얼굴이다.

백호의 눈에 사내의 머리 위로 드리워진 푸른 장막이 흐리게 보였다. 수국의 왕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청룡의 가호였다.

‘전하라……. 수국의 왕이 정인이었던 것인가. 놀라운 일이군.’

어느 정도 부유하고 권세 있는 자일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왕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분명 중앙의 관리가 연화의 마을을 불태우라 명했다고 들었는데 이게 어찌된 일이지?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불쾌함이 치솟았다.

“그놈의 수틀 때문에 더 덥겠군. 옷감이 죄다 네 다리를 덮지 않느냐.”

왕의 타박에 연화는 얼른 수틀을 뒤집어 탁자 밑에 놓아 숨겼다. 신령계에서도 언제나 바느질을 하며 소일하던 연화를 기억하는 백호는 어딘가 그리워져서 그녀가 숨긴 바느질거리를 보았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궁 앞에 핀 작은 야생화들을 그려 그것을 자수로 놓고는 했는데 그림 솜씨도 바느질 솜씨도 좋아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생생했다.

‘이곳에서는 정인의 얼굴을 그려 수를 놓고 있으려나.’

어딘가 비참해져서 백호는 혼자 생각했다.

수국의 왕은 뒷짐을 지고 들어와 그녀를 의자에 앉히고 자신도 맞은편에 앉았다. 연화는 고개를 숙였고 왕의 눈은 천천히 그녀를 훑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마주 앉아 있었다. 침묵은 진하고 부드러웠다.

‘부러운 사내로구나.’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자리에 자신이 있었다. 그 대신 저 사내를 택한 것이 연화의 의지라면, 백호는 기꺼이 그것을 존중할 것이다. 다만 가슴이 아프고 저릴 뿐이었다.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발길을 돌리려던 그는 잠깐 멈칫했다. 날카로운 사내의 눈매, 그리고 그 뒤로 어릿한 그림자들을 발견한 탓이었다. 백호는 푸른 눈을 가늘게 떴다.

‘원혼.’

저 멀리 흐릿한 그림자들이 서성거린다. 단번에 백호는 그들이 원한을 지닌 혼령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원한은 다름 아닌 저 사내에게 가진 것이리라.

본래 한 국가의 왕쯤 되면 원한을 사지 않을 수는 없다. 거리가 웬만큼 있는 것을 보니 그저 그 정도의 원혼이겠지. 백호는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 발 물러섰다.

연화의 정인이기 때문에 색안경을 쓰고 보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는 사방신이었고, 세계를 이루는 각 구성원에게 개인적인 감정을 갖는 일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미 연화에게 가진 감정만으로도 충분히 규칙 위반이었다.

그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연화가 머무는 거처를 눈에 새기면서, 백호는 작은 바람들을 불러 모았다. 적어도 여름을 나는 동안만은 이곳의 공기가 정체되어 멈추는 일이 없도록.

‘청룡 놈이 이 정도로도 시비를 걸지는 않겠지.’

그가 기이하게 여긴다고 해도 연화를 보고 바로 알 터이다. 아니, 이미 알고서 히죽거리며 웃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바다와 인간계의 절반을 다스리는 사방신은 눈치가 빠르고 고약한 성격이었으니.

‘웃는다 한들 어쩌겠는가.’

수백 년 동안 놀림거리가 된다 한들 후회 따위를 할 일도 아니었다. 인간의 여인에게 마음을 주고도 선택받지 못한 신, 인간의 사내에게 패배해 떠나는 여인을 잡지 못한 신. 그러나 백호는 그 모든 호칭을 받는 것도 그리 불쾌하지 않았다. 모두 사실이었으니까.

모여든 작은 바람들이 연화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흔드는 것을 보며 백호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떠나야 했다. 더 이상 머물면 욕심은 더욱 커지리라. 그는 신형을 띄워 하늘로 날아갔다.

연화는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더위 속에서도 바람이 살랑거리며 불어와 땀을 식혀주었다. 시녀들이 애써 가져다준 얼음과 화채 따위보다 훨씬 시원하고 상쾌한 기분을 들게 해주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낀 만희 역시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밖의 나뭇잎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만희는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재미있구나. 실내에만 부는 바람도 있던가.”

“……글쎄요.”

그리운 기분이 들어서 연화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백호와 함께 허공을 노닐던 신령계의 나날들이 자꾸만 뇌리에 맴돌았다.

***

은연은 전각에 새로 들어온 신입 시녀의 방에 들어섰다.

아직 다친 상처가 쑤시며 아팠다. 겉으로는 상처가 대충 봉합이 되었으나 속까지 치료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마냥 쉬고만 있을 수도 없는 것이 시녀의 운명이었다.

그녀는 새로 온 시녀 사영의 일과를 점검하고 주의점을 알려줄 참이었다.

“제사장 성현님의 소개로 들어왔다지?”

“예.”

사영은 침착한 태도였다. 창백한 얼굴이지만 강단은 있어 보였다.

“전각은 넓어. 높은 분들이 오시는 곳이니 바닥의 깔개까지도 보름마다 바꿔야 한다. 지난번에는 가장 큰 방의 깔개를 바꾸지 않았다지?”

“죄송합니다. 미처 알지 못해서…….”

“앞으로는 모든 깔개를 신경 써라. 그리고 특히…….”

은연은 한숨을 쉬었다.

“치유사인 연화 님의 방 깔개는 특별히 나흘에 한 번씩 바꿔라.”

“나흘 말씀이십니까?”

“그래. 전하께서 유독 자주 행차하시는 공간이니.”

“예.”

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 전하께서 어떠한 행동을 하시는 걸 목격하더라도 절대 함부로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

“행동……이라면.”

“전하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말한다. 누구의 방에 자주 가신다, 어느 시녀와 놀이를 나가셨다 이런 것들.”

은연은 한숨을 쉬었다. 여태껏 말조심을 못 해서 다친 시녀들이 참 많았다. 새는 말은 반드시 시녀들이 흘린 것이 아닌데도 항상 첫 번째 희생자는 그녀들이었다. 그래서 은연은 밑으로 들어오는 시녀들에게 항상 입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다치는 사람을 줄일 수가 있었다.

“함부로 전하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지도 말고.”

“예.”

“예를 들어, 치유사인 연화 님의 방에 자주 가시지만 그건 두통의 치료를 위한 것이다. 그걸 이상한 눈으로 보고 동기들과 말을 퍼뜨리면 곤란해질 게야.”

사영의 의아한 눈을 보고 은연은 말을 이었다.

“요즘 들어 시녀들 사이에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다지, 전하께서 치유사와 자주 밤을 보내신다고. 그런 일은 없으니 절대 너는 말을 옮기지 마라.”

“알겠습니다.”

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연은 만족해서 다른 주의점들까지 알려준 뒤 자리를 떴다.

과연 그런 소문을 듣기는 했다. 왕이 새로 데려온 치유사에게 빠져 계속해서 그녀의 방을 드나든다는 소문. 내관들이 수군거리며 연화의 방 쪽을 가리키며 험담을 하는 것도 들었다.

천것이 두통을 물리치는 재주가 있다며 들어앉아서는 창피도 모르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천민 부락에서 온 여자가 지체 높은 귀한 분들의 전각에 머문다는 사실을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는 험담들이었다.

‘백호 님과 함께했던 연화 님이 일 없이 인간의 왕 따위에게 왔을 리가.’

사영은 그 말들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연화를 잘 몰랐다. 연화의 얼굴을 본 것조차 이곳에 와서가 처음이었다. 다만 백호가 연화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잘 알았다.

‘신의 반려라는 자리를 버리고 겨우 한 나라의 왕 정도로? 웃기는 소리.’

한 세계를 다스리는 사방신, 그의 옆자리. 사방신의 반려라는 그 자리를 사영 자신이 얼마나 탐냈던가. 만약 백호가 연화에게 그러하듯 그 전폭적인 사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다면 그 누구도 눈에 차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사영은 그랬다.

그녀는 청수희가 건네주었던 반려의 증표, 자그마한 노리개를 품 안에서 꺼내보았다.

‘이걸 가지고 있으면 세상은 너를 신의 반려로 생각할 거야. 세계의 규칙은 이 노리개의 주인이 사방신의 옆자리에 있는 자라고 말하지.’

청수희의 말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그녀가 말하는 세상이란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요 며칠 청수희에게서 연락이 없다.’

시시때때로 청수희는 사영에게 말을 걸어오곤 했는데 며칠간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다. 빨래를 하는 빨래터에서도, 정원의 작은 연못에서도, 심지어 세수를 하려고 떠놓은 대야물에서도 청수희의 목소리가 들려와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개의치는 않았다. 비록 정령이라 하나 청수희의 힘은 사방신의 바로 밑쯤 된다. 바다와 물을 다스리는 청룡이 있었으나 육지의 민물은 청수희의 관할이었다. 그 누가 감히 샘의 정령에게 위해를 가하겠는가. 그것이 가능한 것은 사방신 정도 외에는 없었다.

‘연화 님의 심중은 어떨까.’

비록 끌려왔다고 하지만 연화는 그리 억압받는 상태가 아니었다. 분명 만희에게 사랑을 느낀 것은 아닐 텐데 그리 떠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적어도 사영이 볼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그랬다.

인간계로 넘어오며 둔갑한 터라 일반 인간 여인이나 진배없게 되어 전처럼 술수를 부려 자세한 사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오가며 들은 말이나 직접 본 바로는 연화가 탈출하려 노력하는 모습은 없었다.

‘만약 그녀가 떠나고 싶어 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사영은 만약의 경우를 상상했다. 보는 것과 달리 연화가 백호에게 돌아가고자 한다면 그녀 자신은 연화를 도와야 하는가. 아니면 그저 모른 체하고, 백호에게 자신과 일족이 당했던 수모를 간접적으로나마 갚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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