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노인이 푸념했다. 그는 모든 희망을 놓은 듯 허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름진 얼굴을 벅벅 문지르는 두 손의 손톱 열 개는 흉할 정도로 닳아 빠져 있었다. 평생 동안 죽도록 고된 노동을 한 자의 손이었다. 일생을 소처럼 일했으나 갈아입을 옷도 없이 더럽고 구멍 난 옷을 입은 빈민층.
맞은편에 앉은 젊은 사내가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영감님,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하늘이 내다니, 누구는 삼신할미한테 점지받지 않고 이 세상에 나온 자가 있던가? 대체 왕이라고 뭐가 달라서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있어야 한단 말이야? 이 상황에!”
사내는 입을 벌리고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다. 싸구려 술의 냄새가 고약했다.
“게다가 지금 왕은 진짜도 아니잖아? 사촌형을 제 칼로 죽이고 왕 위에 오른 자라고. 더러운 새끼!”
“말 조심하게, 조심해.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들으니.”
“들으라지!”
젊은 사내가 다시 술을 벌컥 들이켰다. 아무런 안주도 없이 그저 독하디 독한 술만 그대로 마시는 중이었다. 술기운이 돌아서 벌건 얼굴로 그가 식탁을 두드렸다.
“난 이대로 여기서 굶어죽지는 않을 거요. 절대로. 나는 내 힘껏 싸워볼 것이니.”
“그러다 개죽음당해. 대체 오합지졸인 반란군이 얼마나 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겐가? 그저 이곳에서 안전히 버티는 쪽이…….”
“아니, 절대로 그러지 않을 거요, 영감님.”
사내는 주변을 둘러보고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골목에 나와 있는 것은 개 한 마리를 제외하면 그들뿐이라 쓸데없는 짓이었으나 말의 내용이 가볍지 않다는 것은 분명했다. 백호는 호기심에 귀를 기울였다.
“아시오, 영감님? 성벽 밖에는 이미 반란군이 득세했소. 군사들이 있어 수도에 들어오진 못하고 있지만 산 속에는 수많은 녹적(綠賊)들이 푸른 깃발을 올리고 혁명을 요구하고 있지.”
“그런 소리 말게!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이러나!”
기겁하는 노인을 보면서 사내가 낄낄 웃었다. 그의 눈이 번들거렸다.
“아까도 말했지만, 들으라지! 시대의 흐름인데 제까짓 것들이 어쩌겠소. 나 하나 죽인다고 일이 달라지는가!”
노인은 고개를 움츠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텅 빈 골목에는 아무도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그는 좌불안석인 채 싸구려 술을 마셨다.
그들의 탁자 바로 곁에 서서 흥미롭게 그 이야기를 듣던 백호는 몸을 돌렸다. 인간계의 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으나 이런 흐름에는 가끔 재미를 느꼈다.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신령계에는 도통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백성들의 삶이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평등한 법칙을 따르는 백호의 세계와 너무도 다른 곳이 인간계였다.
백호에게 축복을 받은 개가 인간들의 탁자 곁으로 다가와 꼬리를 흔들었다. 실상 개는 백호에게 꼬리를 흔들며 애교를 부리는 것이었으나 그것을 모르는 인간들이 손을 저어서 그를 쫓아냈다. 멀리로 쫓겨가는 개를 보면서 백호는 다시 자리를 옮겼다.
이렇게나 같은 인간들의 삶을 도탄으로 몰아넣고 있는 왕이라는 자가 궁금했다. 시간은 많이 남았고, 왕궁에 역시 수많은 짐승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겸사겸사라 좋은 일이군, 하면서 백호는 바람을 타고 몸을 띄웠다.
수도의 하늘을 날면서 백호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번화가와 빈민가의 차이가 극명하게 보였다. 겨우 1할도 될까 말까 한 멀쩡한 동네와 나머지 빈민가. 그는 다른 것보다 연화가 걱정되었다.
‘아마도 여전히 수도 내에 머물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데.’
다행히도 그녀의 정인이 부유하고 권세 있는 자라 배를 곯거나 힘든 일을 겪지는 않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정말 아까 그들의 말대로 반란군이 득세하고 나라가 뒤집어진다면, 현재 권세가 있는 자라 해서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반대일지도 몰랐다. 만약 세상이 뒤집힌다면 가장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 핑계로 연화를 찾아볼까 하는 마음이 불쑥 솟아올랐다.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그 생각에 이끌렸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연화의 의지와 운명에 간섭하는 것은 그만둬야 한다. 그녀가 스스로 원해 떠났다면 그 이후의 일이 어떻게 흐르든 그것은 연화에게 맡겨야 했다.
“그만두자.”
다른 흥밋거리에나 신경을 쏟자. 백호는 눈앞에 다가온 수국의 왕궁을 보며 중얼거렸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화려한 궁의 건물은 그가 잘 아는 누군가의 취향과 꼭 닮아 있어서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샜다. 수십 년 전에도 보긴 했으나 다시 보니 새삼스러웠다. 짙푸른 색의 기와에 황금색의 장식이 화려하게 새겨진 건물들.
“청룡 놈은 제 취향을 여기에도 쏟아부었어.”
호사스러운 것을 좋아하는 청룡의 나라답다.
그러고 보니 인간계를 다스리는 두 사방신은 모두 화려한 장식을 선호했다. 청룡과 주작 둘 다 어디에고 장식을 못 달아 안달이었다. 색조가 정반대라는 점이 다를 뿐이었지만. 둘 모두 남들의 취향을 몹시 무시한다는 점도 닮아 있었다.
백호의 흰 옷자락이 날렸다. 그는 허공에서 왕궁 안을 훑어보았다. 마굿간의 말들은 꽤 관리가 잘되어 살이 쪄 윤기가 흘렀다. 굳이 백호의 축복이 필요 없을 정도로 건강했다. 그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말들을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짐승을 잘 보살피니 왕은 들은 것처럼 나쁜 녀석은 아닐지도 모르겠군.”
왕궁 안의 짐승들은 대부분 건강했다. 먹이를 충분히 먹었고 관리를 잘 받았다. 인간계임에도 인간들보다 훨씬 잘 지내고 있었다. 그는 재미있어서 푸른 눈을 가늘게 떴다.
“왕궁 안의 금수들은 내가 관계하지 않아도 되겠군.”
적어도 수국의 왕은 자신이 책임지는 짐승들은 홀대하지 않았다.
인간들이 고통받는 것은 백호에게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청룡의 백성들이고 그는 청룡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왕이 짐승들에게 자비롭다는 점에 점수를 높게 주며 그는 건물 안 어딘가에 있을 쥐들을 살펴보기 위해 아래로 내려갔다.
잘 가꿔진 정원의 바닥에 백호의 발이 소리 없이 안착했다.
그는 정원의 나무를 쓰다듬으며 느리게 걸었다. 가장 잘 꾸며진 정원으로 들어가 꽃을 구경했다. 아주 아기자기하고 정성스레 가꾸어진 정원이었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로 자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더 선호하지만 이것 역시 색다른 미감이 있다.
그는 흥미로운 기분으로 이곳저곳을 살펴보다가 건물 가까이에 이르렀다. 전각의 창문이 활짝 열린 방이 있어, 그는 이곳에 어떤 인간이 사는지 들여다보았다. 순전한 호기심이었다.
“…….”
백호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은 연화였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떠나기 전과 마찬가지로 연화의 얼굴은 희고 보드라웠다. 그녀는 검은 눈을 깜박이며 창밖을 보고 있었다.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시선은 백호를 알아채지 못하고 그를 통과해 저 멀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네가 여기에 있느냐.
남자는 멀거니 그녀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바로 창문 앞,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검고 둥글고 순한 눈동자가 바로 그곳에서 반짝였다.
믿을 수가 없어서 그는 모든 생각을 잃고 멍청하게 서 있었다. 이 넓은 세상에서 이런 식으로 연화를 보게 될 줄이야.
그는 마른 침을 삼켰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가 흠칫했다. 연화는 하늘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었고 백호의 심장이 저려 왔다.
그녀가 혼자 중얼거렸다.
“날이 좋구나.”
하늘이 높고 푸르다. 환한 햇빛 아래 신록이 우거졌다. 만희는 궁의 안이라면 원하는 대로 걸음을 옮겨도 된다 말했지만 연화는 나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나가 봤자 새장 안의 새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왕께 혹시라도 마을에 대해서 여쭈어볼까 연화는 고민했다. 비록 처음 끌려온 날은 험한 꼴을 봤지만 만희는 그녀에게만은 그리 거칠지 않았다. 간혹 스치는 얼굴에서는 나름대로 그녀를 배려하는 듯한 표정도 보았다. 나라 안 유일한 치유사라서일 것이다.
왕은 여전히 무서웠지만 마을에 대해서 여쭈면 지금 어떤 상황인지, 혹은 아주 운이 좋으면 어머니의 소식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가 그저 끌려온 천민이라는 사실 때문에 말을 꺼내기 저어되었다. 더구나 연화가 밥을 먹지 않으려던 때 시녀를 해하려 했던 만희의 행동에 대한 기억도 있었다.
‘지금 당장이야 괜찮지만 역시 두려운 분이라.’
연화는 한숨을 쉬었다. 하마터면 스스로를 위로하던 장면을 들킬 뻔한 적까지 있어 아직 그에게 말을 걸기조차 무서웠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바느질거리를 아예 내려놓고 창밖으로 몸을 조금 내밀었다. 햇빛이 쨍해서 자꾸만 백호 생각이 났다. 사실 신령계의 날은 이렇게까지 무덥지는 않았다. 다소 춥고 더운 정도야 있었으나 언제나 기분 좋은 정도를 유지했다.
“덥네, 바람도 불지 않고.”
여름이긴 여름이다. 날씨를 느낄 때마다 백호와 함께 하던 신령계가 자꾸 맴돌았다. 그의 품에 안겨 있어도 전혀 덥지 않고 적당히 선선한 바람이 불어주던 곳. 백호는 금수의 왕인 동시에 그의 힘은 바람을 닮아 있었다. 그의 품에 안겨 허공을 날 때도 백호의 발을 옮겨주는 것은 부드러운 공기의 움직임이었다.
더위에 연화의 뺨에 머리카락이 조금 젖어 붙었다. 시녀들이 차가운 물과 귀한 얼음을 넣은 화채를 가져다주었으나 그 정도로는 이제 더 이상 더위를 막을 수 없을 정도의 계절이었다.
“……?”
순간 연화는 고개를 들었다. 뺨 주위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목덜미와 귀 뒤로도 적당히 기분 좋을 만한 상쾌한 공기가 흘러들었다.
이상한 일이다. 눈앞 정원의 나무들은 잎 하나도 흔들리지 않았다. 쥐죽은 듯 고요한 여름의 낮, 쨍하게 내리쬐는 햇볕 밑에서 가을처럼 서늘한 바람을 느끼다니. 그녀는 어리둥절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화의 바로 옆, 창문의 위쪽에서 내려온 가림막과 비단술이 조금씩 날렸다. 자신의 머리카락 역시 뒤로 흘러내렸다.
기이한 기분이었다. 기억 속 신령계에서 느끼던 공기의 흐름과 똑같아서 그녀는 그리움에 눈가가 조금 젖었다. 조금 더 시원함을 잘 느껴보고 싶어서 연화는 눈을 감았다. 땀이 나서 촉촉한 피부 위로 흐르는 서늘한 바람이 마치 백호와의 기억 같았다.
그녀의 눈앞에서 백호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더워 보이는 연화에게 바람을 흘려보내 준다는 핑계로 손을 뻗어 뺨 위를 살며시 만졌지만, 실체화하지 않은 그를 연화는 당연히 알아보지 못했다. 나타나지 않은 신의 존재를 인간인 그녀가 알아볼 수야 없는 노릇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조금 서글퍼져서 백호는 눈을 감은 연화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백호가 불러낸 공기로 발간 얼굴을 식히고 있는 그의 반려.
“여전히 곱구나.”
그의 목소리에 서글픔이 섞여들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자신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연화가 슬펐다. 동시에 여전히 아름답고 고와서 기뻤다. 이제 반려라고 부를 수 없는, 그리운 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