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수의 붉은 달-64화 (64/113)

64화

“뭐라?”

“만약 명부에 오른 자들이 죽지 못한다면 일정 기간 후 그 명부는 무명(無名)으로 바뀌어 기재되어 숫자만이 지정되는 것으로 압니다.”

그녀의 말에 청룡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청수희가 거기까지 알 줄이야. 아무리 저승에도 큰 강이 흘러 영토를 가로지르고 있다지만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는 못마땅하게 그녀를 훑어보았다.

“의도가 수상하군. 그 말은, 그자들을 대신할 목숨을 따로 구하겠다는 뜻이냐?”

“설마 그럴 리가 있사옵니까. 단지 그리 큰 소란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청룡의 심기가 불편해 보이자 사과의 표시로 청수희가 나붓이 절을 했다. 제가 구하지 않겠다는 것일 뿐, 다른 이가 일을 벌이지 않는다는 건 아닙니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녀는 눈을 휘며 웃었다. 굳이 신의 성격을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불쾌해진 청룡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입을 열었다.

“좋아. 일단 지금은 넘어가지.”

“…….”

“그러나 더 이상 깊게 개입하지 마라. 네가 움직이면 내가 알 수 있으니, 또 한 번 헛짓을 하면 내가 본체로 직접 찾아오겠다.”

신이 직접 인간계에 현신하겠다는 뜻이었다. 신령계와 달리 인간계의 생물들은 훨씬 연약했고 인간들끼리 얽힌 인과관계의 실은 훨씬 복잡했다. 게다가 청룡의 본체는 용이었다. 사방신이 직접 인간계에 육신을 드러내고 현신한다면 어떤 영향이 생길지 모른다.

그것은 오히려 청룡에게 큰일이 아닌가 생각하는 청수희를 보고 청룡이 피식 웃었다.

“내가 현현하여 생기는 피해는 모두 원인제공자가 책임지게 될 것이다. 원인이 없었다면 왜 내가 굳이 본체까지 끌고 인간계에 오겠느냐? 충돌이 없더라도 피해가 있다면 벌을 받겠지.”

“…….”

“네가 그랬지, 수십 명의 목숨은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가 된다고. 내가 인간들의 목숨을 좀 앗아가더라도 그것으로 갚음이 되겠구나.”

교활한 자. 청수희는 입을 꾹 다물었다. 굳이 자신이 피해를 보며 백호와 충돌하지 않더라도 세상의 규칙이 어그러진 죄를 백호에게 묻겠다는 뜻이었다.

신이 영토에 직접 개입하면 인간들의 운명이 어그러진다. 그래서 죽는 자들은 운명에 어긋나게 죽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저승의 입장에서는 명부에 적힌 숫자 안이면 그리 문제될 것이 없었다. 다만 피해는 수국 자체에 미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청룡은 수국을 언제쯤 버릴 것인가 시기를 재고 있던 참이었다. 그에게는 기실 영토에 머무는 백성들의 목숨 따위는 그리 소중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세력이 침범당하는 것을 참지 못할 뿐이었다.

저승과의 마찰도 없이 백호를 벌할 수 있다니 청룡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손해도 보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녀의 입매가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청룡은 만족한 듯 희미하게 웃었다.

“네가 허튼 짓만 안 하면 된다. 순리대로 흐르게 내버려 두거라.”

“명 받들겠나이다.”

“그래, 샘과 물의 정령답게 순리를 놔둬.”

그가 킬킬거리고 웃었다. 발치에서부터 물웅덩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검고 둥근 파도가 몰아치는 수면이었다. 고요한 물을 타고 다니는 청수희는 조금 질려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윽고 파도가 청룡의 다리를 감싸고 올라왔다. 바닷가로부터 먼 내륙에서도 만들어낸 작은 바다 속에 서서 청룡이 무심하게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금안 속으로 자신의 용궁이 보였다.

“지켜보고 있겠다, 샘의 정령.”

속을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청룡의 모습이 파도 속으로 완전히 삼켜졌다. 그의 신형이 사라진 직후 파도치던 작은 바다 역시 흔적도 없이 소멸되었다.

그 자리에 성현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청수희는 아무것도 없이 깨끗해진 나무바닥을 노려보았다.

‘앞으로는 신중히 움직여야겠어.’

그녀는 분명 청룡과 친척이나 다름없었지만 결코 그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신령계에 더 자주 머무는 이유도 좀 더 자유분방한 백호의 기질을 선호해서였다.

‘사영 쪽도 조심시켜야겠군.’

청룡이 사영의 일까지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애초에 신령계에서 둔갑하여 인간계로 들어왔으니 이미 경계 전부터 인간의 기운이었을 것이다. 예민한 사방신이지만 설마 거기까지 알고 있을까.

***

백호가 인간계로 넘어갈 수 있는 공식적인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중 대부분이 인간들이 산주(山主)와 신령에게 제사를 올리는 날이었다. 제사가 있는 날은 세계의 규칙이 사방신의 걸음을 허용했기 때문에 그가 경계를 넘는다 해도 영향이 가지 않았다.

마치 연화와 처음 만났던 날처럼 말이지. 백호는 한숨을 쉬었다. 연화가 떠나버린 이 마당에 굳이 인간계에 발걸음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흔치 않은 기회에 경계를 넘어 그녀와 같은 하늘 아래라도 있고 싶은 마음이 엇갈렸다.

‘차라리 천리안으로 위치까지는 알지 못해서 다행이다. 알았다면 찾아가고 싶어 몸이 달았을 테니.’

안다 한들, 간다 한들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할 텐데 참으로 쓸모없는 욕망이다. 인간인 그녀가 자신의 의지로 정인을 찾아갔으니 백호는 그녀의 의지를 존중해 물러서는 것이 마땅했다.

아무리 신이라 한들 다른 세계에 있는 존재의 운명에 간섭하는 것은 최소한으로 줄여야 했고 백호 스스로도 연화의 생각을 꺾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비록 자신의 슬픔으로 돌아올지라도.

제(祭)를 받기 위한 의복을 차려입느라 시녀들이 다가와 복장을 정돈해 주었다. 인간들이 올리는 공물과 제례는 때마다 그 의미가 달랐고 역할도 달랐다. 이번에는 그저 산주인 백호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한 제사였다.

“수국 수도 뒤를 둘러싸고 있는 산맥 어귀입니다. 가축들이 여름을 잘 나기를 바라며 바치는 공물이니 편안히 다녀오시면 되지만 피로하시다면 제가 대신 다녀와도.”

“피로라니, 날 뭘로 보는 게냐.”

묘우의 말에 백호가 피식 웃었다. 사방신에게 피로라니 그보다 안 어울리는 말이 없었다. 물론 원로로서 걱정에서 하는 말이라는 것은 알았다. 그는 여전히 인간계에 있을 연화를 백호가 찾아갈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해 주려다가 백호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사실 스스로도 그런 욕망을 품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푸른 비단의 허리띠를 맨 뒤 그는 몸을 돌려 인간계로 이동했다. 흰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지며 공간과 공간 사이의 바람결에 흩날렸다. 인간들이 그가 나타나는 것을 목격한다면 바람과 구름을 두른 채 갑작스럽게 허공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이리라.

한순간 경계를 열어 공물이 바쳐진 곳에 도착한 백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인간계는 밤이라서 하늘이 어두웠다.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혀서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딱 이런 밤이었지.’

공물을 받아야 발정기를 잠재울 수 있던 밤, 붉은 달이 떠 그의 심신이 안정되지 않고 흔들리던 흔치 않은 밤. 하필이면 운이 나빴던 연화가, 어머니의 고운 손수건을 되찾기 위해 밤을 틈타 숲을 찾았던 밤.

‘그날이 아니었다면…… 아예 연화를 만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비록 가슴이 아팠으나 그날 그녀를 만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거칠 것 없었던 사방신은 인간의 여인으로 인해 감정을 알고 가질 수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후회라는 것이 끼어들 여지가 있는 일도 아니었다. 연화를 만난 건 사고와도 같이 갑작스레 찾아온 운명이었으니.

‘우리들 역시 어차피 상제의 피조물.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 없지.’

백호는 아무도 없는 숲 속을 걸어 공물이 놓인 앞에 섰다. 갖은 음식과 과실, 곱게 수놓인 비단이 올려져 있었다. 최근 들어 인간들이 점점 더 신을 모시는 일에 소홀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충분히 정성을 들인 상이었다. 여름의 더운 날씨를 집에서 키우는 짐승들이 잘 나기를 소원하며 바친 공물이었다.

현재 수국의 왕은 사방신에게 바치는 제사를 기꺼워하지 않아 수국의 수호신인 청룡에게 올리는 제례마저 그 규모가 줄었다고 했다. 게다가 계속된 왕의 실정(失政)으로 백성이 도탄에 빠져 인간들은 생계를 잇기마저 힘들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다.

이 공물도 마련하느라 제법 힘이 들었을 것이 뻔했다.

“고마운 일이군. 그래도 이렇게나 정성을 들이다니.”

신은 제상 앞에서 인간들의 염원과 정성을 확인하고 흡수한다.

사방신의 영토는 서로를 침범할 수 없으나 자연물을 타고 흐르는 각자의 힘은 경계 밖에서도 유지된다. 신령계 안에 존재하는 바다가 청룡의 관할 안에 있듯 인간계에 있는 금수는 백호의 관할이다.

‘정성이 가상하니 특별히 수국 수도의 가축들을 돌아보고 갈까.’

어차피 그가 인간계로 나올 수 있는 날의 시간은 아직 남아 있었다. 수국 수도의 짐승들을 한 바퀴쯤 돌아본다고 해도 여유롭다. 작은 제례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염원을 흡수하는 것도 금방이었다.

속도 복잡했으니 그저 한 바퀴 바람만 쐬고 갈 생각이었다. 간만에 정성스러운 공물이었으니 그 보답으로 한 번씩 손길을 내려줄 겸.

그의 발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구름이 백호의 모습을 감추고 바람이 그의 발을 옮겼다. 아마도 인간은 그저 바람 한줄기가 지날 뿐이라고 느낄 것이다.

허공에 몸을 맡기고, 신은 낯선 인간계의 냄새를 맡으며 수국의 수도로 향했다.

백호는 수도로 들어서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이 본래도 이러했는가. 기실 실제 이곳을 들른 것은 이미 수십 년도 더 된 일이라 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길거리에 기력 없어 보이는 인간들이 많았다. 번화가 쪽에야 많은 인간들이 나와 장을 벌리고 있었지만 그조차 지난번 방문과 비교하면 생기가 없었다. 번화가가 아닌 뒷골목은 한층 심각했다. 힘없는 얼굴로 나와 앉아 있는 인간의 아이들은 비쩍 말라서 뼈가 보였다.

본래 빈민가가 있기는 했지만 그 구역이 훨씬 넓어져, 번화가를 제외한 구역은 전부 극빈층이 사는 듯 했다. 길바닥에 오물이 뒹굴었고 가난한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돈을 내놓으라고 위협을 하는 사내들이 보였다. 병자처럼 마른 남자가 그를 말렸지만 곧 주먹에 맞아 나뒹굴었다.

‘부패의 냄새가 난다.’

살아 있는 인간들이 거주하는 공간인데도 썩은내가 진동했다. 백호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이 냄새를 알고 있었다.

하나의 시대가 저물 때의 냄새다. 나라가 기울고 이제 새로운 해가 뜨기 직전, 온통 썩어버린 진흙탕 속에서 나는 악취.

‘곧 큰일이 일어나겠군. 청룡이 요즘 이상하게 조용하다 했더니 이제 슬슬 가호의 손을 놓고 있는가.’

길에 힘없이 엎드려 있는 개 한 마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축복을 내리면서 백호는 싸우고 있는 인간들을 돌아보았다. 백호의 존재를 알 수 없는 인간들은 술을 마시다가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지금 왕은 미친놈이라니까!”

“그건 맞아. 미친놈이지. 그러나 왕이니 어쩌겠는가.”

나이가 많은 영감 쪽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술을 마셨다. 코가 시뻘건 것이 어지간히 고주망태인 모양이었다.

“왕은 하늘이 낸 것이야, 우리 같은 아랫것들이 어쩔 수가 없는 존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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