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문이 조금 열려 있더군.”
왕의 말에 연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 이런 실수를 한단 말인가. 수치스러운 짓을 하면서 제대로 문단속도 하지 않고. 혹시라도 그가 보지 않았을까? 작은 소리였지만 목소리를 듣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어서 연화는 무릎이 떨릴 지경이었다.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하는 그녀를 보고 만희가 고개를 저었다.
“그대로 있어. 몸이 안 좋은 거냐? 쓸모없이, 이런 날 이불 속에나 누워 있고.”
“아, 예…….”
예상 외로 앉아 있을 것을 허락하는 왕의 말에 연화는 엉거주춤하게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직 절정의 여운이 남아 있어 허벅지에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무엇에 대해 죄송한지 그녀 자신도 몰랐지만 연화는 고개를 숙였다. 만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내는 별다른 표정 없이 방을 둘러보았다. 연화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불을 꼭 쥐었다. 문을 열어놓았고, 이불 밑의 일이라 그가 갑자기 이불을 들춰보지 않는 한은 알 수 없다. 아는데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만희는 무표정해 보였다. 혹시라도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본 것이 아닌가 싶어 연화는 좌불안석이었다. 그의 안색은 별 변함이 없어보였으나 적안이 어두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는 생각에 잠긴 채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댔다. 연화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에 여러 가지 감정이 얽혀 있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한참 만에 나온 왕의 말에 연화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
만희는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알 수 없는 눈으로 한동안 연화를 훑어보았다. 특별히 뭔가 눈치챈 것 같지는 않은데, 뭘 본 것 같지는 않은데……. 불안한 채로 연화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빌어먹게 날이 덥군.”
“예……. 갈수록 더워집니다.”
과연 만희의 얼굴이 붉었다. 연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흥분과 불안까지 더해 땀이 목덜미를 살짝 적시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뒷목에 붙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떼어주려 무심코 손을 뻗다가, 연화가 흠칫하며 목을 움츠리자 만희는 자신도 놀라며 손을 거두었다.
그는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는 듯 손을 들고 있다가 얼른 다시 팔짱을 꼈다. 그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이윽고 몸을 돌렸다.
“쉬어라. 날도 더운데 앓기나 하다니 치유사 주제에 몸도 약해서 어디에 쓰겠나.”
“예……. 죄송합니다.”
더 이상 방에 머물지 않고 나가는 왕의 모습에 연화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도 아무것도 묻지 않은 것을 보니 부끄러운 장면을 보지는 못한 것 같았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과 몸을 씻기 위해 얼른 욕탕으로 향했다.
밖으로 걸음을 옮긴 만희는 어처구니없는 기분에 실소를 터뜨렸다. 그의 뒤를 따라오던 내관이 왕의 눈치를 보았다.
“전하……?”
“정말,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어.”
내관의 말에 대답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저 혼잣말을 할 뿐이었다.
왕은 뒷짐을 지고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이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연화의 방으로 뛰어들어 가 그녀를 침상 위에 눕히고 범하고 싶은 마음이 치솟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깜찍하게도 혼자 방 안에서 스스로를 위로하던 모습과 그 가냘픈 음성을 들어버렸으니.
옷을 전부 찢어버리고 그 가느다란 허벅지를 벌려 안고 싶었다. 배꽃처럼 희고 가냘픈 몸을 쥐고 안으면 듣기 좋게 울고 높이 신음하겠지.
이미 첫날 그녀에게 은연을 안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때도 이미 조금만 더 흥이 솟았다면 연화에게까지 손을 댔으리라.
만희는 자신의 양물이 아까부터 이미 잔뜩 서서 바지가 갑갑할 정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처음 열린 문틈으로 연화가 손을 움직이는 광경을 봤을 때부터.
희고 부드러운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보기 좋았다. 벌어져 언뜻 혀가 보이던 입술도, 쾌락이 치밀어 눈을 감고 조금씩 흔들리던 고개까지도. 가슴까지도 착실히 애무하고 있었지.
만희가 머리 저 끝까지 달아오르는 게 당연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단 하나 마음에 들지 않던 것은…….
“‘백호 님’이라.”
그의 적안이 깊게 가라앉았다. 다른 사내가 있었던 것인가.
깊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만희의 본성대로라면 다른 정인이 있든 말든 상관없이 마음에 든 여인을 강제로라도 취했을 것이다. 외로운 여인을 보고 그 몸을 취하는 것이 뭐 어떻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그대로 뒤돌아 나왔다. 그래서 만희는 오히려 알 수 있었다.
그는 연화에게 함부로 손을 대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부르던 이름이 다른 사내의 이름이었음에도 그랬다. 그럴 수가 없었다. 만희의 마음 저 밑바닥에서부터 그녀에게 강제로 손을 댄다는 생각 자체가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여태껏 강제로 범한 여인의 숫자를 나도 기억 못 하거늘. 심지어 내 어미조차 겁간당해 나를 낳았는데.’
상상도 해보지 못한 상황에 그는 이마를 문지르면서 웃었다. 대체 이것이 무슨 마음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이럴 리가 없어. 뭔가 이상해.’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턱을 쓸었다. 점점 더 어두워지는 만희의 표정에 곁에 서 있던 내관이 불안한 얼굴로 눈치를 보았다.
***
“꽤 신경 쓰이는 존재감이 하나 이리저리 오간다 했더니 너였느냐.”
성현의 집 안에 있던 청수희는 가만히 뒤를 돌아보았다.
제사장의 저택에는 하인들도 함부로 다니지 못하도록 명을 내려놓았다. 물론 청수희에게 정신을 일부 점령당한 성현이 내린 명이었다. 그래서 제사장의 저택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연못으로 흘러드는 작은 폭포의 물소리만이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목소리가 들려왔음에도 샘의 정령인 그녀조차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청수희는 놀라지 않았다. 그녀가 느낄 수 없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청수희가 텅 빈 집 안에 서있는 사내를 보고 우아하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인간계 절반의 지배자이신 청룡 님.”
사내의 머리카락은 청수희보다 훨씬 짙은 청색이었다. 늘씬한 체격의 그는 긴 머리카락을 위로 틀어 올리고 황금색의 커다란 잠화(簪花)를 꽂고 있었다. 옷 역시 짙은 청색 위에 금실로 정교히 수를 놓아 지독히 화려했다. 사내, 청룡은 집 안을 둘러보다가 천천히 청수희에게 눈을 돌렸다.
“여전히 제멋대로구나, 청수희.”
“제가 누굴 닮았겠습니까. 세계를 자유로이 다니며 모든 사방신의 백성이지만 제게 가장 가까운 분은 청룡 님이신 것을요.”
청수희가 미소 지었다. 청룡은 날카로운 눈매로 그녀를 흘긋 보다가 의자에 앉았다. 그의 긴 옷자락이 의자 밑으로 흘러내려 바닥에 끌렸다.
청룡이 다스리는 본래의 영토가 바다를 포함하며 청수희가 물에서 비롯되었으니 둘은 가까운 친척관계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너라도 함부로 내 영토에 들어와 휘젓고 다니는 건 용서하지 않는다.”
“함부로 휘젓다니요, 저는 그저 마음에 드는 거처를 발견해 신세를 지고 있는 것뿐이랍니다.”
“넌 사방신을 너무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어.”
청룡이 코웃음을 쳤다. 청수희는 긴장을 숨기며 미소를 지었다. 대범하며 사소한 일은 호쾌하게 넘어가 주는 백호와는 달리 청룡은 까다로운 존재였다.
“설마 그럴리가요. 한낱 정령인 제가 어찌.”
인간을 다스리는 그는 이기적인 신이다. 그에게 도움되는 일이 아니라면 자신의 영토가 침범당하는 일도 극도로 싫어했다. 청룡의 금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청수희를 훑어보았다. 금안 속 검은 홍채가 선명했다. 청수희는 마르는 입 안을 숨겼다.
“내가 가호하는 수국까지 와서 네가 이 저택에 머무는 이유가 뭘까, 응?”
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희고 날카로운 턱선 위로 손을 올리면서 청룡은 금안을 깜박였다. 파충류 특유의 냉기 도는 눈매가 섬뜩했다. 청수희는 감히 대답하려 하지 않고 침묵을 택했다.
“제사장의 정신까지 침범하면서 말이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인간의 발걸음이었다. 청수희 역시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퇴청하자마자 청수희의 명에 따라 집 안 한구석의 침실에 박혀 꼼짝도 하지 않던 제사장 성현이었다. 그가 느릿하게 걸어와서 청룡의 옆에 무릎 꿇고 엎드렸다. 엎드린 성현의 눈은 희게 뒤집혀 있었다.
청수희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그래, 청룡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걸 좋아했다. 청수희의 술수를 자신의 힘으로 덮어 강제로 그 조종을 빼앗아간 것이다.
“아무리 기울고 있다 한들 내 영토이며 내 가호를 받는 나라다. 대귀족인 이자 역시…… 왕실의 피가 조금은 섞여 있지.”
수국의 왕실은 청룡에게 보호를 받고 있다. 최근 총애가 사그라들고는 있으나 한때 신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냈던 나라이기도 했다. 한 번 정을 떼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청룡의 성격상 현재까지도 나라가 유지될 만큼 가호를 주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조금의 재미를 찾아다니고 있을 뿐이라 거기까지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청룡의 웃음은 서늘했다.
“하하, 재미라.”
그는 뭔가 계산하는 듯한 눈초리로 청수희를 쏘아보았다. 그의 머릿속을 짐작하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신의 의중은 겹겹이 숨겨져 있어 샘의 정령으로서도 알기 어려웠다.
“백호가 인간계를 넘나들며 난장을 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멍청하고 폭력적인 녀석이니 한순간의 충동을 막기야 힘들었겠지. 거기에 업혀서 네가 이곳저곳을 쏘다니는 것도 그렇고.”
청수희는 가만히 숨을 삼켰다. 이 예민한 자가 사실 모를 리야 없었다. 자신의 영토에 대해서라면 언제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니 백호가 연화를 처음 데려갔을 때 이미 알았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 일을 약점으로 잡고 백호에게 다른 것을 요구할지도.
“이미 아시겠지만 그리 험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인간들끼리의 작은 충돌일 뿐이지요.”
“작은 충돌?”
청룡이 킬킬 웃었다.
“헛소리 마라. 이미 저승의 명부에 올라 있던, 죽을 운명인 인간이 수십 명이나 사라져 버려서 현무가 몸을 일으키고 있다. 그 엉덩이 무거운 놈이 일어날 때에는 이미 일이 커졌다는 뜻이지. 만약 그 목숨들을 찾지 못하면 아마도 염라대왕까지 나서는 건 시간문제일 테지.”
“…….”
청수희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백호에게 말을 전했을 뿐 자세히 어찌 되었는지 결과까지는 알지 못했다. 백호 님이 늦지 않게 움직였군.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슨 생각으로 저승의 눈을 피해 죽을 인간들을 대피시키는 짓을 했는지 모르겠군. 아, 네게 하는 말은 아니다. 백호를 말하는 게지. 멍청한 신령계의 원로들과 함께 말이다.”
청룡은 마치 모든 광경을 본 듯이 말했다. 아마도 그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수희는 교묘히 웃었다.
“저승의 명부는 양이 중요할 뿐 누가 죽어야 하는지는 둘째 문제 아니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