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이 벌레가 대체 뭐라고 떠드는지 들어보기나 할 심산이었으나 점차 재미가 없어지고 있었다. 머리가 점점 더 조이며 아파왔다. 속삭임도 커지고 있었다.
만희의 눈을 보고 그가 흥미를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내는 분통을 터뜨렸다.
“밖에는 당신을 쓰러뜨리기 위해 수많은 반란군이 속속 일어나고 있소! 이대로 천년만년 계속 지배할 것 같은가, 더러운 자!”
한 번 욕설을 시작한 사내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쏟아냈다. 그는 묶인 손으로도 손가락질을 했다.
“오라비가 제 여동생을 겁간하여 그 사이에서 낳은 더러운 자! 그런 자가 왕위에 있으니 수국이 저주를 받아 이렇듯 고통받는 것이다!”
“저, 저놈이!”
사내가 쏟아놓는 말들에 병졸들과 백관이 기겁했다. 모두가 알지만 쉬쉬하며 누구도 입밖에 꺼내지 않았던 사실이다. 하지만 죽음을 각오한 중년 사내는 입에 거품을 물며 다물지 않았다.
“네가 죽인 사촌형은 실은 친형 아니냐, 이 개 같은 놈!”
“당장 저자의 입을 막아!”
신하들이 외쳤고 병졸들이 달려들어 그를 때려눕혔다. 그 때 만희가 일어나서 천천히 중년 사내의 앞으로 내려섰다.
팔척장신의 사내는 조용히 다가와 사내의 코앞에 섰다. 얻어맞아 쓰러진 사내는 눈앞에 놓인 왕의 발끝을 보았다. 고개를 들어 만희를 보는 중년 사내의 독기 어린 눈에 만희는 씩 웃어 보였다.
“인두를 가져와라.”
주변에서 숨을 삼켰지만 곧 인두가 준비되었다.
새빨갛게 달궈진 쇳덩이를 꺼내 눈앞에 들어 살펴보며 만희는 느릿하게 그 위에 침을 뱉었다. 치익 하며 금세 증발해 버렸다.
“최근 며칠은 내 기분이 꽤 좋았는데 말이지. 그걸 꼭 이런 식으로 부수는 놈들이 나와.”
“더러운 작자! 네놈이 뭘 하든 난 겁먹지 않아!”
“아, 그러시겠지. 그러실 거야, 물론.”
만희는 머리를 꽉 짚었다. 그의 적안이 번들거렸다. 뇌가 한 점씩 조각칼로 떠지는 듯한 고통이 켜켜이 쌓여갔다. 눈이 그대로 안와에서 빠져나와 버릴 것 같은, 혹은 직접 손으로 파내 버리면 그나마 고통이 줄어들 듯한 두통에 만희는 이를 악물었다.
눈을 부릅뜨며 왕은 히죽 웃었다. 그는 인두를 들고 서 있다가 예고 없이 사내의 입을 지졌다. 치직거리며 살이 타는 끔찍한 냄새가 났다!
“끅, 윽, 읍……!”
제대로 입을 열지도 못해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숨 막히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몸부림쳤다. 병사들이 재빨리 그의 사지를 잡아 꼼짝도 하지 못하게 했다. 만희는 곧 이어 사내의 목덜미에 인두를 가져다 댔다. 성대가 있는 자리였다.
바람 빠지는 소리만이 입 안에서 샜다. 고약한 냄새가 났다. 사내가 오줌을 지렸는지 바지 주위가 젖어들었다. 만희는 신경 쓰지 않고 그를 걷어찼다. 거센 발길질에 뻐걱 하고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팔다리를 잘라 인간돼지를 만들까 고민했는데 네놈에게 들어가는 사료도 아깝겠어. 그냥 죽는 쪽이 돈이 덜 들겠군.”
검을 빼 들고 중년 사내에게 다가가며 왕이 웃었다.
“네놈이 먹을 사료값으로 반란군을 수색하는 비용을 충당하지. 좋은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맙다.”
그리고 곧 사내의 목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 굴렀다. 단칼에 베었으니 차라리 자비로운 것이다. 만희는 검을 털어내고 다시 검집에 넣었다.
“아차, 이자를 심문해서 누가 배후인지를 알았어야 했는데.”
뒤늦게 깨닫고 만희는 몹시 아쉬운 표정이 되었다. 간만에 피를 볼 생각에 너무 흥분해서 앞뒤 생각하지 않고 목을 잘라버렸다.
대체 누가 배후가 되어 이런 짓을 사주했는지 알아냈어야 했다. 저런 버러지들이 스스로 생각해 의지를 가지고 행할 리가 없는 노릇이다.
그는 잠시 머리를 짚고 고개를 숙였다. 피를 보았음에도 두통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왕은 숨을 가다듬으려고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다. 눈치를 보던 내관이 주춤거리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
답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지는 듯한 고통에 만희가 검집째로 땅을 짚었다. 지팡이처럼 검집을 짚고 서서 그는 크게 신음했다.
“몇 놈을 더 죽여야 이게 좀 나아지는 거지?”
“저, 전하? 전하…….”
내관이 떨었다. 그러나 그가 아니면 왕을 말릴 사람이 없었다. 내관은 조심히 왕의 옆에 가서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최대한 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전하, 치유사를 불러올 테니 부디 안정을…….”
“……그래, 치유사. 연화, 그래.”
만희는 입속으로 연화의 이름을 굴렸다. 그녀의 이름을 듣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아주 조금쯤 통증이 가라앉는 듯했다. 그는 고개를 들려다가 여지없이 조여드는 고통에 신음하며 내관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뭘 하는 게야, 죽고 싶으냐?”
“전하, 전하, 곧 그 치유사를…… 불러오겠나이다. 전하!”
만희의 손이 내관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그는 검을 뽑을까 말까 망설였다. 예전 같으면 망설임따위 없이 저 내관의 목을 베었을 것이다. 머릿속의 통증이 계속해서 피를 원한다고 속삭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충동을 참아냈다. 연화의 이름이 한 번 더 그의 입 안에서 굴렀다.
“빨리 불러와라. 내가 네놈의 멱을 따기 전에 말이야.”
왕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이미 그의 흰자에 핏발이 가득 서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시녀 한 명이 황급히 달려갔다. 전각에서 쉬고 있을 연화를 부르기 위해서였다.
***
‘대체 저들을 언제까지 중간 지대에 놓아두어야 하나…….’
호접은 고민했다. 마을의 인간들은 한둘도 아니고 수십이었다. 비록 중간지대의 환영에 이끌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지내고 있다지만, 저대로 있으면 영양실조로 멀쩡한 이들이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다행히 중간지대는 다른 곳보다 확연히 힘의 소모가 적어서 아직 쓰러진 자들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중간지대에서 저들을 지내게 할 수는 없었다. 인간계로 돌려보내야 하는데 아직은 안전한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음식물들을 가지고 중간지대로 날아들어 갔다. 백호에게도 묻지 않은 독단적인 행동이었다. 그에게 물어서 또 한 번 연화를 생각나게 했다가는 간신히 조금 가라앉아가는 신의 감정을 또다시 흔들어놓는 일일 테니까.
인간들을 중간지대에 데려다 놓은 이후로 시간이 지나며 백호는 조금이나마 감정을 추스른 모습이었다.
나비의 날개가 팔락였다. 중간지대에 누워 환영에 홀려 어두워져 있던 사람들의 눈이 나비를 따라 느리게 움직였다. 호접은 정신이 흐려진 사람들의 틈으로 날아들어 한 명씩만을 깨웠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물과 죽을 먹고 사람들은 한 명씩 조용히 다시 잠이 들었다.
저 멀리에서 저승에 가지 못하고 떠도는 원혼들이 이곳을 넘보는 것이 느껴졌으나 호접은 단호하게 그들을 쫓아냈다. 적어도 원혼들이 작정하고 달려들지 않는 이상 이곳의 사람들은 안전했다. 그리고 대부분 원혼들은 자신의 원한이 서린 자에게만 달라붙으므로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나비의 날개가 팔랑였다.
마지막으로 깨운 자는 연화의 양어머니였다. 그녀는 환영에 눈을 빼앗긴 상태에서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걱정이 되어 그녀를 깨우자 노파는 눈을 깜박였다. 입모양으로 연화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을 보고 호접은 덜컥 걱정이 되었다. 마치 실성한 것 같은 모양새였기 때문이었다.
“자, 정신 차리세요. 이 죽과 물을 좀 잡수시고.”
호접이 그녀를 일으켜 죽을 입에 흘려 넣었다. 그러나 영 받아먹지 못하는 상태였다. 노파는 죽을 먹으면서도 계속 중얼거렸다.
“연화야, 연화야……. 너는 잘 있는 게냐…….”
양어머니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계속해서 딸을 보고 쓰다듬는 것처럼 손을 앞으로 뻗어 움직이고 있었다. 호접은 그 손을 잡았다.
노파와 직접적인 대화는 세계의 규칙을 깨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그녀의 잠꼬대를 간접적으로 듣는 것은 규칙과 상관없다. 호접은 노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궁까지 끌려가서…… 멀쩡한 게냐, 대체 네가 뭘 잘못했다고, 우리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다고. 네 치유의 능력이 그리도 탐이 났을까, 수도에는 더 대단한 사람도 많을 텐데 대체 왜.”
말의 부분 부분이 뭉개져 어눌했지만 대충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연화야, 내 딸아. 내 딸아…….”
노파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널 보고 싶단다. 이 세상이 어쩌면 이리도 무심한지, 내게 남은 것은 내 딸인 너뿐인데.”
노파의 말에는 한가득 딸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물과 죽을 조금 더 마시게 한 뒤 호접은 그녀를 다시 자리에 눕혔다. 그리고 환영을 불러 잠들게 했다. 잠시라도 편안하게, 딸과의 환영 속에서 쉴 수 있도록.
호접은 잠시 중간지대의 어둠 속에서 앉아 있었다.
‘연화 님은 치유의 이능 때문에 누군가의 눈에 띄어 수도로 가게 된 것인가.’
노파의 말을 종합해 보면 그랬다. 그리 나쁜 일은 아닐 텐데, 대체 왜 마을을 없애려 했는가.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궁이라면 왕에게 끌려갔다는 사실을 의미할 터.
지난번 백호가 했던 말로 미루어보아 연화는 정인과 함께 있다고 호접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설마 왕이 정인인가, 허나 치유의 이능 때문에 수도로 갔다면 그도 아닐 것이다. 왕이 정인이라면 마을을 불태울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왕은 치유의 능력 때문에 거짓되게 연화의 정인 노릇을 하고 있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호접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매일 허한 얼굴로 슬픔에 젖어 있는 백호가 눈앞에 스쳤기 때문이었다.
‘아니, 함부로 추측해서는 안 된다.’
호접은 마음을 다잡았다. 생각할수록 점점 더 머릿속이 복잡해져 갔다.
더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안다. 호접은 선을 그어야 했다. 백호가 저렇듯 힘겨워하고 있을 때 자신마저 흔들리고 일을 허투루 처리해서는 안 된다. 신령계와 인간계의 경계는 유별하므로 안됐지만 인간들의 일은 인간들이 처리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연화가 걱정되었다. 인간의 여인은 여리고 부드럽고 상냥했다. 호접은 그녀와 함께 지내는 사이 어느새 마치 자매 같은 애정을 품었다. 연약하고 보살펴주어야 할 것 같은, 어린 여동생.
그녀는 가라앉은 눈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 때 노란 나비의 날개에 홀린 원혼이 손을 들고 느리게 접근했다. 그를 쫓아내면서 호접은 날개를 푸른색으로 바꾸었다. 마치 도깨비불처럼 차가운 색이었다.
저승에 가지 못하고 중간지대를 떠도는 망령이 입을 쩍 벌리고 뒤로 물러섰다.
【따뜻한…… 온기…… 아냐…….】
“나는 네가 찾는 온기가 아니다, 썩 꺼져라!”
【노란 빛……. 보살의 빛…… 아냐…….】
보살의 빛? 호접은 잠깐 휘두르던 손을 멈췄다.
노란 보살의 빛. 그녀가 알기로, 세상에 남은 보살의 가피는 몇 없었다. 그리고 그중의 하나는 연화였으며 오색찬란한 보살의 빛 중에서도 그녀는 노란색을 가졌다.
대체 연화의 빛을 대체 저 원혼이 어찌 아는가. 호접은 어딘가 이상한 기분으로 원혼을 노려보았다.
뭔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원혼이란 이성적인 사고나 대화가 불가능한 자들. 그들에게 뭘 더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호접은 왠지 불안한 기분에 주먹을 쥐었다.
돌아가기금수의 붉은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