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오전의 햇살 속에서 희게 배꽃처럼 빛나는 연화의 모습을 보고 과연 미인이로구나, 하며 사영은 속으로 감탄했다.
작은 전각의 일을 하면서 사영은 의도치 않게 연화의 일상생활을 전부 구경하는 셈이 되었다. 궁의 빨래라는 것은 지독히도 많아서, 오전과 오후, 저녁 시간에 규칙적으로 옷감을 걷고 배분하는 일이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오전에 일어나면 연화는 말끔히 차림을 단장한 후 수를 놓았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수를 놓는지 모를 일이었다. 다만 그녀가 놓는 수가 흰 호랑이의 그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사영은 말없이 인정했다.
그립겠지, 그리도 사랑해 주던 신의 얼굴이. 그녀 자신은 얻고자 해도 수치만 당하고 쫓겨났던 사방신의 사랑이 아닌가.
오후가 되면 왕이 방문하는 일이 많았다. 만희는 연화의 맞은편에 앉아서 다과를 들거나 술을 마셨다. 두통이 있으면 연화가 간혹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치유를 행했다. 노랗게 빛나는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쓸어주고 나면 만희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앉아서 그녀에게 기대고 있었다.
혹시 밤에 침상을 나누는 사이가 아닌가, 하면서 며칠을 살펴보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왕은 정말 그저 치유사에게 기대는 것처럼 그저 이야기만 나누다가 돌아가곤 했다. 그의 욕구를 받아내는 것은 침방시녀들이었다.
‘정말로 평범하군.’
생각보다 연화는 정말 평범한 인간 여인이었다.
사영이 새로 가져온 금침으로 침상을 다시 만들려 하면 연화는 급히 일어나 그녀의 손을 막았다. 일을 새로 배운 사영보다 평생 천민 부락에서 스스로 빨래하고 침상을 정돈해 온 연화의 손길이 훨씬 빨랐다.
야무지게 침상을 정돈하고 나서 그녀는 미안하다는 듯 헌 금침을 내주었다. 만약 할 수 있었다면 그 빨래마저 연화가 했을 것이다. 평생 그렇게 살아온 사람 같았다.
그 야무진 손매가 부럽지는 않았다. 세도가 있는 일족의 아가씨로 살아온 평생이 사영은 자랑스러웠다. 그게 그녀의 인생이었다.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야.’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연화는 좋은 사람이었다. 마음 저 속에서부터 연화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던 사영은 더 이상 그것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마냥 나쁘게만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또 패배한 것 같아서 괴로웠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알았다.
“아, 피곤하네.”
궁의 시녀들은 나름대로 대우받는 편이라 좁아도 개인실이 주어졌다. 사영은 일과시간이 끝난 뒤 피로한 몸을 침상에 뉘였다. 예전에 쓰던 것보다는 초라하고 좁고 낡은 침상이었다.
불과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몸이 이 생활에 적응해 버렸는지 침상에 누운 이 시간이 꿀처럼 달콤했다. 지금쯤 교대한 동료 시녀들은 열심히 또 밤을 새 일할 생각에 지쳐 버리고 있겠지만.
소박한 흰 찻잔에 찻물을 따라내며 사영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말이 없고 성실한, 평범한 얼굴의 신입 동료를 다른 시녀들은 잘 받아들여 주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생활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찻물을 들여다보며 사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이곳에 들어오며 생각했던 것이 무엇이었나. 그녀는 연화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싶었다. 아마도 더 깊은 곳에서는, 연화가 나쁜 사람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사영 자신의 인생을 이토록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 장본인. 정확히 말하면 그 원인 제공자는 사영 자신과 아비인 사혈이었으나 연화 역시 원인의 하나였다.
그녀는 복잡한 기분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연화가 나쁜 사람도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지금, 미워할 대상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어때, 사영 아가씨?”
고요한 개인실에서 흘러나온 여자의 목소리에 사영은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따름이었다.
“글쎄, 잘 모르겠네요.”
찻물에 은은하게 비치는 것은 푸른색이다. 청수희가 여기까지 오지는 않고 그저 목소리만 보내는 방식이었다. 사영은 찻물을 한 모금 마셨다.
“연화를 알고 싶다고 했잖아. 원하는 결과를 얻었어?”
“…….”
분명히 청수희는 뻔히 알고 있다. 사영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을. 굳이 알면서도 묻는 말에 바로 대답하기가 싫어서 사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침묵만으로도 이미 청수희가 충분히 재미를 얻고 있을 거라는 사실도 알았다.
“좋은 사람이에요.”
침묵은 길지 않았다. 그녀의 대답에 청수희가 웃었다. 다행히 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래,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싫어하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할 것 같네요.”
사영은 우울하게 말했다.
작은 전각에는 만희가 품계를 내리고 잊은 후궁들도 몇 있었고, 급이 높은 시녀들도 있었고, 간혹 높은 손님이 다녀가기도 했다. 연화는 그들과 다른 삶을 살아왔고 그래서 행동도 달랐다. 전각에 머무는 자들 중 고약한 자가 제법 있었지만 그들과도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사영은 연화의 고요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보면서, 이런 여인이기에 백호가 사랑에 빠진 것일까 생각했다.
청수희가 저 건너편에서 웃는지 찻물이 연신 흔들렸다. 그녀는 웃으라고 내버려 두고 사영은 홀로 생각에 잠겼다. 이곳에 더 있어야 하나? 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 때 청수희가 물었다.
“어때, 사영 아가씨. 거기 더 있을 거야? 더 있어봤자 원하는 결과는 못 얻을 텐데.”
“…….”
놀리는 듯한 목소리에 순간 울컥해서 사영은 찻잔을 엎어버릴까 했지만 다행히 순간적인 자제력으로 그러지는 않았다. 그녀는 불퉁하게 답했다.
“그거야 봐야 알죠. 좀 더 있어볼게요. 한길이어도 모르는 게 사람 속이니.”
“뭐 그러든지. 소용은 없겠지만.”
끝까지 속을 긁는 소리를 하는 청수희를 마음으로 노려보면서 사영은 찻물을 홀짝 마셨다. 계속 놀리면 아예 입천장이 데든 말든 한꺼번에 다 마셔서 없애버릴 테다, 하면서.
“그리고 사실 연화를 싫어해 봐야 백호 님이 아가씨한테 간다는 보장도 없고……. 여러모로 쓸모없는 행동이긴 하네. 쯧쯧.”
그 쓸모없는 걸 도와준 게 당신이잖아?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기어올라 왔다. 사영은 차를 쭉 마셨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미리 알았는지 청수희가 숨넘어가게 웃었다.
“아, 그래, 그래. 알았어, 미안해. 그만 놀릴게.”
“소용없어요. 다 마셔버릴 거니까.”
웃음소리에 고막이 울릴 지경이다. 뭔가 더 청수희가 말했지만 사영이 진저리를 치면서 찻물을 마구 흔들었다. 그 와중에도 다음 말이 들려왔다.
“그래, 다 마셔. 어차피 찻물이란 마시기 위해 따라놓은 거잖아.”
좋습니다, 그럼 사양 않고. 사영이 완전히 찻잔을 들어 올려 마지막 방울까지 깨끗이 마셨을 때, 청수희의 마지막 말이 들려왔다.
“괜찮아. 아가씨도 싫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거든. 힘내라구!”
***
암살 사건의 조사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검을 들고 만희를 공격했던 내관은 알고 보니 얼마 전 궁으로 들어왔던 시녀의 오라비라 했다. 시녀의 오라비인데 왜 나를 공격했는가, 하는 물음에 조사관은 눈을 피했다.
“그것은, 그……. 시녀가 얼마 전 사망하여.”
“내가 죽인 건가?”
아아, 하며 왕은 귀를 후벼 팠다. 예의 없는 행동이었으나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워낙 많은 수를 다양하게 죽여서 누구인지 기억에도 없었다. 궁에서, 특히 왕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자들은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연화가 들어온 이후에는 덜했으나 그 전까지는 이유 없이 심해지는 두통이 몰려올 때면 만희는 간헐적으로 발작을 일으킬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반드시 누구 한 명은 죽어서 시체로 실려 나갔다. 한 명이면 다행일 지경이었다.
“그 오라비를 궁내에 그대로 뒀다니 관리가 소홀했군.”
궁내 인력을 관리하는 내관이 창백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하기사, 이놈도 빼고 저놈도 빼다 보면 궁내에서 일할 자들은 아무도 남지 않을지도 모른다. 좀 많이 원한을 사댔어야지. 자신도 뻔히 아는 사실에 만희는 재미있다는 듯 웃어댔다.
“그래서, 관련자는 색출했나?”
“대부분 꼬리를 끊고 내뺐습니다만 궐 밖에서 마비약을 구해준 자를 잡았습니다.”
마비약이라 해봐야 약효도 그다지 많지 않은 하급의 약이었다. 그런 것을 독이라며 구해줬을 정도면 보나마자 빈민일 게 분명했다. 독 역시 효과가 좋을수록 비쌌으니. 궁의 내관이라 하여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것은 아니라 독을 살 만한 비용은 외부에 의존했을 게 뻔했다.
왕의 앞에 끌려온 자는 역시나 빈민이었다. 추레한 차림새에 창백한 낯의 중년 사내는 그러나 겁도 없이 왕을 노려보았다. 뒤에서 오금을 쳐 무릎을 강제로 꿇렸으나 눈빛만은 결코 복종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빈민가에서 약을 파는 약사라고 합니다.”
관리의 귀띔에 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약사라면 마비약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구의 명을 받아 이런 짓을 벌였지?”
만희는 물었다. 이런 자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이리 무도한 짓을 했을 리는 없었으니 분명 뒤에 이웃 국가나 국내의 권세가가 있으리라. 외부의 적이라면 전쟁을 일으킬 것이고, 국내에 왕위를 찬탈하려는 권세가가 있다면 짓밟을 것이다.
왕의 입가에는 웃음이 걸렸다. 더러운 것들, 감히 내게.
그러나 중년 사내는 눈을 번들거릴 뿐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엉뚱한 소리를 했다.
“당신은 궁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있나?”
무엄한 말투에 병사들이 달려들어 죄인을 치려 했으나, 만희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간만에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 놈이다. 말은 들어보고 싶었다.
순간, 고막 속에서 기묘한 울림이 들려왔다. 관자놀이가 당겨서 만희는 인상을 찌푸리고 목을 주물렀다. 서서히 두개골 전체가 조여드는 듯 고통이 시작되고 있었다.
피를 보고 싶지 않은가.
만희는 두통을 따라오는 충동에 귀를 기울였다. 마치 뇌에 대고 직접 새겨 넣는 듯한 욕구와 충동이었다. 잘 드는 조각칼로 뇌를 한 점 한 점 파내면서, 눈앞에 있는 인간을 죽이면 이 고통이 사라질 거라고 누군가 속삭이는 듯한 착각.
그는 이마에 손을 짚고 히죽 웃었다.
“궁 바깥? 나가지, 자주.”
“…….”
“너 같은 벌레들을 죽이러.”
해충은 죽여야 사람이 편하지. 만희가 낄낄 웃었다. 그를 보며 중년 사내의 얼굴은 극도의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 얼굴을 감상하면서 왕은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댔다.
“대체, 대체 왜.”
간신히 꺼낸 말은 그 한마디뿐이었다. 사내의 표정을 보며 만희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뭐가 말인가?”
“왜 우리들을…… 사람이 아니고 벌레로 보는 것이오. 우리는…… 우리는 사람이란 말이오.”
사내는 호소했다. 그는 묶인 두 손을 들고 무릎걸음으로 걸어 만희의 앞으로 나왔다.
“최소한…… 살게는 해줘야 할 것 아니오. 밖의 빈민들, 아니, 평민들마저도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지 아는 게요?”
“…….”
“밥을 굶는 것은 예사요, 어미의 젖이 말라 젖먹이가 죽어가오. 물이 말라 마실 물이 없고, 고기가 없어 키우던 개를 잡아먹고 있소. 내 아내 역시 배를 곯다가 병에 걸려 죽었소. 대체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요?”
왕은 느른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