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일단 마비독을 모두 몰아낸 이후, 외부 상처를 하나씩 봉합하기 시작했다. 붉게 드러났던 살점들이 느리게 모아져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게 상처가 사라지는 모습에 주위에 서 있던 모두가 신기한 눈으로 주시했다.
연화의 이마가 땀으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치유의 능력을 쓰는 것은 분명 몸에도 부담을 주었다. 작은 능력을 쓸 때야 큰 부담이 아니라지만 이렇듯 큰 상처를 셋이나 치료하는 건 분명 평소보다 무리였다.
그녀의 양뺨과 턱에 땀이 맺히기 시작하자 만희가 곧 그녀의 소매를 잡아당겨 은연으로부터 떼어냈다.
“그만해라. 이제 됐어.”
“아, 하, 하지만 전하, 아직 마지막 상처가.”
가장 큰 상처가 제대로 봉합되다 말아서 흉하게 안의 붉은 살점을 내보이고 있었다. 한참 느끼던 따스한 온기가 사라지자 은연이 흠칫 눈을 떴다. 그녀의 눈앞에서 만희가 무감정한 눈으로 은연을 훑어보았다.
“아니, 됐어. 이제 내가 궁금했던 건 풀렸으니. 저 정도 크기의 상처도 일단 봉합은 되는 거군.”
“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저분의 상처 치료를 마저…….”
“그만해라. 너, 땀이 나고 있어. 여봐라, 시원한 과일화채를 마련해라. 정원으로 자리를 옮기겠다.”
만희는 망설이지 않고 일어섰다. 연화의 뒷덜미를 잡아 자신의 옆에 세운 뒤 그는 매몰차게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의료실을 나섰다.
엎드려서 그 광경을 보던 은연은 잠시 멍해졌다. 자신의 상처를 잠시라도 보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저…… 궁금했던 것을 보기 위해,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왔단 말인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왕은 위기의 순간에 자신을 구해주었다. 적어도 은연의 생사와 안전에 관심을 기울였던 게 아니란 말인가. 그녀는 아연해져서 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연화는 당황한 얼굴로 만희에게 끌려 나가며 은연 쪽을 연신 돌아보았다.
늙은 의원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취급을 보니 이 침방시녀는 그리 왕이 아끼지 않는 여인 같았다. 그는 히죽거리며 은연의 등에 남은 상처 위로 약을 발랐다.
“아무래도 왕께서는 저 치유사가 마음에 드신 것 같군. 얘야, 너 침방 시중은 아무래도 그른 것 같으니 나하고 자지 않으련?”
노골적이고 파렴치한 희롱에도 은연은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완전히 바닥으로 처박혔다는 기분에 얼굴을 침상에 파묻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
“전하, 전하.”
“왜? 자꾸 시끄럽군.”
만희가 짜증을 냈다. 그는 정원까지 연화를 끌고 와서 강제로 자신의 맞은편에 앉혔다. 그가 화를 내자 연화는 겁을 먹은 얼굴이었지만 입을 다물지는 않았다.
“아까의 그 사람, 치료를 마저 하고 오겠습니다. 허락을.”
“필요 없어.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지 마라.”
만희의 단호한 불허에 연화는 채 일어나지도 못하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시녀와 내관들이 재빠르게 높은 탁자와 고운 무명 식탁보를 가져오고 그 위에 시원한 과일화채와 마실 것을 내왔다. 다디단 당과도 함께 나왔다. 그녀는 맛있는 다과상을 보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아 계속해서 의료실 쪽을 흘긋거리며 바라보았다.
“딴 데 신경 쓰지 마.”
“예? 아, 예.”
다시 한 번 청해볼까 했지만 만희의 얼굴은 빈틈이 없었다. 결국 연화는 치유를 포기하고 얌전히 앉아 입 안에 화채를 밀어 넣었다. 자꾸 먹으라고 만희가 재촉했기 때문이었다.
‘죽을 만큼 심한 상처는 아니었으니까.’
의료실 안이기도 했고 의원도 있었다. 이미 마지막 상처만 제외하면 봉합은 해두었고. 지금 자신이 걱정하는 쪽이 오만일지도 모른다.
“자꾸 다른 생각을 하는군.”
만희가 짜증스럽게 말하면서 당과 꼬치를 집어 들어 연화의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빈틈을 찔린 연화가 깜짝 놀란 채로 입 안에 들어온 당과를 씹었다. 그녀의 커진 눈을 보면서 만희가 히죽거렸다.
“시녀 따위는 생각하지 말란 말이다. 어차피 네가 생각한다고 상처가 저절로 낫는 것도 아니잖나.”
“……죄송합니다.”
그녀는 조그맣게 사과했다.
“네 앞에 왕이 있는데, 집중해라.”
입 안에 들어온 당과는 달콤하고 말랑거렸다. 천민 부락에 살 때는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고, 백호의 궁에 가서는 과일이나 더 신선한 먹거리들이 많아 당과를 많이 입에 대지 않았다.
다른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오히려 여러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연화는 조용히 당과를 씹어 삼켰다.
바람이 불어와서 열기를 식혔다. 머리 위로 어느새 내관들이 들어 올린 차양 덕분에 시원하게 그늘이 졌다. 정원 가득한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잎사귀가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방금 전 암살 사건이 일어났다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평온했다.
왕은 곁에 선 내관에게 물었다.
“아까의 그 암살자 조사는 어찌 진행되고 있느냐?”
“이미 죽어 넘어진 자라 심문이 불가하여 일단 거처 물품의 조사와 함께 검에 묻은 독의 정체와 출처를 조사하고 있나이다. 아직까지는 특별히 나온 사항이 없습니다.”
내관이 허리를 굽혔다. 왕은 심상한 표정으로 등받이에 기대 방만하게 앉았다. 조금 전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마치 평상시처럼 나른하고 편안한 얼굴이었다. 자신의 눈으로 상처를 보지 않았더라면 암살 사건이 있었다고 짐작도 하지 못했을 거라 연화는 생각했다.
“주변인들을 철저히 조사해라. 필요하다면 고문도 해. 그게 효율적일 테니.”
“예.”
고문을 말하는 말투도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연화는 그것을 막고 싶었지만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아마 그녀가 말한다 해도 고문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방관만 해야 한다는 사실이 연화를 괴롭게 했다.
“그리고 제사장 성현 님께서 알현을 청하셨습니다.”
“성현이? 지금?”
“예, 암살 사건을 전해 들으셨다고 합니다.”
그 돼지 같은 제사장이 바로 뛰어왔군. 그래도 대귀족 중에 눈치가 있는 자라 살려두고 있는 만큼 성현은 궁 안의 모든 사건에 귀를 열어두고 있다. 그런 쪽으로는 제법 쓸모가 있었다.
제사장의 이름을 들은 연화의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만희는 거기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좋아, 들어오라고 해라.”
“예.”
잠시 후 제사장의 뚱뚱한 몸이 구르듯 정원으로 달려 나왔다. 그는 매우 과장된 동작으로 만희의 앞에 엎드려서 통곡했다.
“아니, 어떤 흉괴들이 전하의 몸을 해하려 했단 말입니까! 이 무슨 비극입니까 전하! 옥체에 해는 입지 않으셨습니까!”
“…….”
“악당들! 감히 세상에서 가장 귀중하신 전하를 해하려 시도하다니! 천하고 악하며 멍청한 자들이 아니옵니까! 전하!”
너무 시끄러워서 만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계속해서 떠드는 성현의 혀를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서 그는 물끄러미 제사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에게 어리는 기묘한 살기에 맞은편에 앉은 연화는 목을 움츠렸다. 그 기색을 알아채고 성현 역시 재빨리 입을 다물고 엎드렸다.
정원이 조용해졌다. 모두가 만희의 눈치를 보았다. 연화 역시 눈을 아래로 내리고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설핏 성현의 뒤로 눈을 옮겼다. 그의 뒤에 함께 들어와 엎드려 있는 여인 중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검은 머리에 창백한 얼굴. 연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는 얼굴인데 뭔가…….’
평범한 얼굴인데 뭔가 이질적이다. 주변을 둘러싼 인간들 사이에서 그녀는 차분한 표정으로 연화를 흘긋 바라보다가 눈을 돌렸다.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인데 어디선가 많이 느낀 기색이었다.
그것이 신령계에서 느꼈던 신령들의 기색이라는 것을, 연화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저, 옥체는 평안하시온지요…….”
간신히 조용해진 성현이 입을 열었다. 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다. 손바닥의 작은 상처 외에는.”
“저런. 치료를 받으셨사옵니까!”
목소리를 줄였어도 여전히 호들갑스러운 반응이다. 만희는 턱으로 연화를 가리켰다.
“그래, 내 치유사가 솜씨가 좋아 흔적도 남지 않았지.”
“오오, 천것이 제대로 일을 하였다니 천만다행이옵니다. 제가 이 계집을 데려올 당시 고생을 하였으나 그 보람이 있습니다, 전하.”
성현은 자신이 연화를 데려왔다는 사실을 뻐기면서 뿌듯한 어조로 말했다. 만희는 그 말투가 거슬려서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대귀족이니 가능하면 죽이지 않는 게 귀찮지 않은 길이다. 그는 그래서 검을 드는 대신 지적했다.
“천것이라 부르지 마라.”
“……예?”
“내 치유사를 천것이라 부르지 말라고 했다.”
말투는 평이했지만 만희의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검은 머리 밑에서 성현을 주시하고 있는 적안은 형형했다. 눈 안에서 불길이 이는 것 같았다.
제사장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해서 연화와 만희를 번갈아 보았다. 그저 치유의 이능을 지녔을 뿐, 연화는 천한 신분이 맞았다. 그러나 그 단어가 왕의 기분을 거스른다는 사실을 알아챘으니 다시 그렇게 부를 수는 없었다.
성현은 머리를 조아리면서도 흘긋거리며 연화를 살폈다. 설마 저 계집이 그사이에 침상에서 밤일로 왕을 홀렸나? 싶었다. 천한 것들이라면 그러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왕이 천것이라 부르지 말라 경고까지 했겠지.
연화는 성현의 눈빛에 어깨를 움츠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 기색을 만희가 눈치챘다. 그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차를 마셨다.
“됐으니 이제 물러가라.”
“예, 전하, 예…….”
성현이 급히 엎드려 절을 하고 뒤로 물러났다. 물러나는 중에도 그 검은 머리의 여자가 신경 쓰여서 연화는 그녀를 찾았지만 사람들 사이에 섞여 보이지 않았다.
***
사영은 성현의 지시에 따라 연화의 거처가 있는 전각의 시녀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그녀는 아주 평범한 외모로 둔갑한 터라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성현은 왕을 제외하면 이 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권세가였고 만희가 워낙 포악하여 시녀로 들어오려는 처녀가 부족한 터라 사영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시녀로 소개받아 들어갈 수 있었다. 시녀를 관리하는 내관은 성현과 같은 대귀족이 잘 아는 처녀를 시녀로 들어가게 한다는 것이 특이하다는 듯 의아하게 한 번 바라봤을 뿐이었다.
“그래도 전하의 시녀가 아니라 작은 전각의 일을 돌보게 되었으니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게야.”
내관의 말에 사영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말이 없는 아이로군, 하며 그가 사영의 신분증에 시녀가 되었음을 확인하는 도장을 쾅 찍었다.
그날부터 바로 일이 시작되었다. 가장 허드렛일인 빨래 담당이 되어 그녀는 이곳저곳으로 세탁물을 날랐다. 능견으로 된 저고리와 치마는 전부 솔을 뜯어내어 해체한 뒤 빨아 다시 바느질을 해야 했으므로 아주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사영은 별다른 불만 없이 일을 따라했다. 평생 아가씨로만 살아와 해보지 않은 일이었지만 손이 빠른 편이라 따라가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그녀는 오전이면 작은 전각의 전부를 돌면서 세탁할 옷감들을 거두어 들였다. 동시에 새로 빨아 바느질한 옷들을 개어 장에 넣어두었다.
사영의 눈에 비친 연화는 아주 평화로워 보였다. 그녀가 옷감을 가지러 들어간 첫날, 연화는 수줍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사영은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그저 말없이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다. 연화 역시 마주 고개를 숙였다. 무표정한 사영의 얼굴을 보면서도 연화는 곱게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