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요 며칠, 기묘하게 살인의 욕구가 들지 않았다. 아마 두통이 없어져서일지도 모른다.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고통을 안고 있을 때는 어느 누구를 매질하고 죽여도 견딜 수가 없었다. 무슨 짓을 해도 두통에서 주의를 분산시킬 수가 없었다.
‘그 계집의 손길이 대단하긴 하군.’
만희는 피식 웃었다. 그는 오랜만에 신하들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하며 업무를 돌봤다.
사촌형을 죽이고 두통에 시달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팽개쳐 둔 국정은 이미 엉망이었다. 그는 턱을 괴고 지루함을 참으면서 서류를 들여다보고 신하들의 보고를 들었다. 백관이 늘어선 자리에서 나오는 업무 이야기는 손댈 곳이 많아 보였다.
이미 며칠째 이어진 국정 업무에 신하들은 조심스럽게 왕의 회복을 점쳤다. 만약 두통만 없다면 그리 나쁜 왕은 아닐지도 모른다. 많이 기울어진 나라의 기세를 다시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죽어 넘어진 자들이 많지만 앞으로 조심만 하면…….
서로 눈길을 나누는 백관들의 낌새를 만희가 모를 리 없었다. 신경이 거슬렸으나 그래도 전과는 달리 참을 만했다.
그는 오전 업무를 끝내고 전각을 나섰다. 그의 뒤를 내관들이 우르르 따랐다. 돌계단을 내려가며 만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과 쨍한 햇빛이 맑았다. 다소 더운 날이라 목덜미에 습하게 땀이 찼다.
“덥구나.”
“욕탕을 준비시킬까요?”
“아니, 내천으로 가겠다.”
왕궁 안에는 뱃놀이를 할 수 있는 작은 천이 흘렀다. 왕실 사람들은 더우면 그곳에서 간혹 물놀이를 즐겼다. 만희는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고, 급히 왕의 물놀이를 준비한 시녀와 내관들이 발소리를 죽여 그 뒤를 따랐다. 그 안에는 침방시녀 은연도 있었다.
물가에 도착해 그는 항상 차고 다니던 검을 풀어놓고 옷을 벗었다. 복장을 풀어헤치는 그를 보며 내관과 시녀들이 시중을 들었다. 무거운 왕의 옷을 전부 훌훌 벗어버린 뒤 그는 천으로 뛰어들었다. 물보라가 일며 방울이 이리저리 튀었다. 은연이 조심스럽게 왕의 옷을 젖지 않도록 뒤로 거두어 들였다.
한참 수영을 즐기며 물놀이를 하던 만희가 물을 털며 걸어 나왔다. 그는 흰 수건을 받아들어 머리를 털었다. 가까이에서 수건을 받쳐 들고 있던 은연을 보고 왕은 음심이 솟아 씩 웃었다.
“너, 예전의 그 침방시녀지?”
“예? 아, 예에…….”
은연은 흠칫해서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은연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단편적인 얼굴만 기억할 뿐이었다.
“너, 좀 더워 보이는데.”
“아, 아니옵니다.”
“더워 보여.”
왕은 손으로 물을 떠서 은연의 가슴팍에 뿌렸다.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고스란히 물을 맞은 은연은 눈을 꽉 감았다. 속눈썹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완전히 젖어버린 가슴 부위가 가뜩이나 얇은 옷 위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제야 좀 시원해 보이는군.”
왕이 씩 웃었다. 얇은 옷감 아래 놀란 숨을 쉬며 들썩이는 풍만한 가슴이 만족스러웠다.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가슴을 잡았을 때, 내관들 사이에서 검은 형체 하나가 그에게 쏟아져 들어왔다.
“죽어라, 이 악마!”
검을 든 암살자였다. 그는 검끝을 예리하게 만희에게 겨눴다.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만희는 순간 당황했으나, 멍하니 서 있던 은연을 밀어내 검의 궤적에서 비껴나게 하고는 자신도 재빨리 암살자를 피했다. 독이 묻은 검 끝이 팔을 스치고 은연이 비명을 질렀다.
“건방진.”
만희가 으득 이빨을 물었다. 감히 이 기분 좋은 오후의 물놀이를 이런 식으로 망치다니. 은연을 한 번 더 밀어 완전히 암살자의 공격 범위에서 밀어내며 그가 반격했다. 암살자의 검끝이 만희의 손바닥을 스치고 지나갔으나 그는 상관하지 않고 그 검의 손잡이를 잡아챘다. 암살자의 정강이를 걷어차 넘어뜨리고 그는 검을 도리어 주인의 어깨에 박아넣었다.
“크윽!”
비명이 궁의 하늘을 울렸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급히 달려온 경비병들은 왕이 다칠까 함부로 접근하지도 못했다. 왕은 단숨에 제압한 암살자의 목에 검을 꽂아 넣어 절명시켰다. 처절한 단말마가 울렸다.
“전, 전하!”
“괜찮으십니까? 맙소사, 이것이 대체.”
눈을 홉뜬 채 죽어 넘어진 암살자는 내관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는 내관이었다. 만희조차 희미하게 그 얼굴을 아는 자였다.
“꽤 오래 일한 내관 아니냐, 이것은.”
만희가 발끝으로 시체를 툭 걷어찼다. 그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대체 뭐지? 왜 궁 안에서 일하는 내관이 내게 칼을 들이댄단 말이냐.”
“그, 그것이…….”
“상세히 조사하라 일러라. 결과에 따라 곁에 있던 자들의 생사를 결정할 것이다.”
그 말에 죽은 내관과 관계가 있는 자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병사들이 내관들의 주위를 둘러싸 포박했다.
만희는 검에 스친 손바닥을 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상처로부터 마비가 서서히 퍼지는 것 같았다. 아주 치명적인 독은 아니고 단지 마비독일 뿐이며 그리 강하지도 않은 것이었다.
그래도 일단 치료는 해야지. 약을 가지고 달려오는 의원을 무시하고 그는 대충 옷을 주워 걸친 뒤 발걸음을 돌렸다.
“전하, 해독약을!”
“전하, 치료를 하고 움직이소서.”
“됐다.”
따라오는 신하들을 무시하고 만희는 길을 정했다. 연화가 머무는 전각이 있는 쪽이었다. 치유사가 있다면 치유사를 활용해야지. 그 누구보다 유능한 자가 아닌가.
전각의 바깥 작은 정원에 앉아 수를 놓고 있던 연화는 갑작스러운 왕의 행차에 놀라 얼른 절을 했다.
“오셨습니까, 전하.”
맨 가슴팍을 내놓은 매우 방만한 옷차림의 만희는 휘적거리며 작은 정원에 걸어들어 와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이곳에는 수상한 자가 없었느냐?”
“수상한 자라니, 어떤 자를 말씀하시는지.”
“검은 옷을 입었거나 낯설거나 검을 들거나, 아무튼 거동이 수상한 자 말이다.”
“아뇨, 이곳엔 저밖에…….”
왜 그러냐는 듯 의아한 연화의 얼굴을 보고 만희가 잠자코 손을 들어 보였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에 대각선으로 그어진 자상을 보고 연화가 놀랐다. 그녀는 재빨리 일어나서 만희의 손을 잡았다.
“이것이 대체……. 어쩌다 상처를 입으셨습니까?”
연화의 놀란 시선이 자신의 상처에 와 닿는 것을 기분 좋게 느끼면서 만희가 중얼거렸다.
“내관 사이에 암살자가 끼어 있더군.”
“……세상에.”
그녀는 서둘러 손에 빛을 떠올렸다. 은은한 노란 빛의 힘이 연화의 손에서 일어나 만희의 손바닥으로 향했다. 그녀는 정신을 집중하다가 말했다.
“독이 있군요.”
“그것도 알 수 있느냐? 그래, 마비독이더구나.”
“…….”
그녀의 손이 닿은 주위로 마비가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 노랗고 은은한 빛은 느리게 퍼져나가 만희의 손으로 옮겨갔다. 빛나는 피부 위 상처가 서서히 아물기 시작했다. 만희는 그 광경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신묘한 힘이로다. 상처가 이렇듯 눈에 띄게 아물다니. 큰 상처에도 이렇게 작용하느냐? 궁금하구나.”
“아닙니다. 제 힘은 미약하여 상처가 크면 힘이 모자라 치유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낫는 속도가 조금 빨라지기는 하겠으나…….”
“내가 한번 상처를 내볼까? 얼마나 큰 상처에 얼마나 큰 힘으로 작용하는지 궁금한데. 실험을 해보고 싶군.”
“안 됩니다! 그 무슨 말씀을.”
기겁해서 연화가 자신도 모르게 만희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아야, 하는 작은 신음성을 듣고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그녀가 사색이 되어서 손을 놓았다. 겁에 질린 그녀와는 달리 만희가 웃었다.
“그래, 알겠다. 따로 상처는 내지 않도록 하지. 쯧, 왕의 낫지 않은 상처를 움켜잡다니 하여간 분수를 모르는 계집이야.”
말과는 달리 말투는 유쾌했다. 그는 짐짓 엄숙한 표정을 가장했지만 연화 역시 그의 표정이 거짓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서서히 상처가 거의 아물어갔다. 그는 신기한 기분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그제야 생각난 듯 은연을 떠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상처 입은 것이 하나 더 있지.”
“예? 어디, 어디에 상처를 또 입으셨습니까.”
“아니, 나 말고 다른 계집이. 그 계집은 지금 어디 있느냐?”
은연을 찾는 왕의 말에 내관이 고개를 숙였다.
“은연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지금 의원의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상처는 어떻다고 하느냐?”
“제법 커서 출혈이 있다고 합니다. 위험할 정도는 아니라 하지만…….”
“그래?”
만희는 벌떡 일어섰다. 왕궁 안에 있는 의료실이라면 바로 가까이에 있었다. 그가 일어서다 연화가 손을 떼려 하자 혀를 찼다.
“아직 통증이 남아 있는데 지금 손을 떼는 게냐? 몹쓸 치유사로군.”
“아, 아직 아프십니까?”
연화가 당황해서 그의 손에 다시 매달렸다. 그녀를 손에 그대로 달랑달랑 단 채로 만희는 멋대로 걸음을 옮겼다. 근처에 있는 의료실이 목적지였다.
갑자기 들이닥친 왕의 일행 때문에 의료실은 난리가 났다. 갑작스러운 암살 사건으로 다친 시녀를 치료하는 것만 해도 조용하던 의료실이 시끄러워질 만한 일이었는데, 거기에 왕까지 행차했다.
만희의 앞에 엎드린 의원을 보다가 그는 히죽 웃었다.
“저 시녀가 많이 다쳤느냐?”
“예,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옵고 그저 자상이 커서 봉합되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이옵니다.”
늙은 의원이 떨면서 말했다. 만약 왕이 아끼는 시녀라면 그 고운 피부에 흉터가 질 경우 그 책임은 고스란히 자신이 떠맡을지도 몰랐다. 그는 제발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서 벗겨지길 바라며 땅에 엎드렸다.
“그래……. 너, 괜찮은 게냐?”
만희의 말투는 언뜻 다정하게도 들렸다. 간신히 일어나 앉은 은연은 자신을 보기 위해 왕이 여기까지 행차했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했다.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침방시녀를 보기 위해 이곳까지 오다니. 게다가 옆에는 치유사까지 대동한 상태였다.
왕은 아무 의자에나 다리를 꼬고 앉았다.
“다시 저 시녀를 눕히고 치료를 시작해라.”
다시 은연을 의료 침상 위에 엎드려 눕히고 의원과 의녀들이 그녀의 옷과 붕대를 풀었다. 은연은 왕의 곁에 있어 위험했지만 그가 밀어 구해준 덕분에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 그러나 완전히 피하지는 못해 은연의 팔과 등에는 큰 자상이 세 개나 나 있었다. 아직 치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피는 멎었지만 상처는 벌어진 채였다.
채 피가 꾸덕하게 마르지도 않은 생생한 상처에 연화는 눈을 찌푸렸지만, 곧 손에 치유의 빛을 띄워 올렸다.
“긴장을 풀고 누워 계십시오.”
그녀의 손에서 노란 빛이 은연에게로 옮겨갔다. 은은한 온기가 팔과 등의 상처를 덮어오자 은연은 눈을 감았다. 다소 얄밉기는 했지만 왕 전속의 치유사가 직접 시녀의 상처를 봐주다니 대단한 배려였다.
연화는 정신을 집중했다. 이 정도 크기의 상처는 그녀의 능력으로 치유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상처의 봉합은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내부의 상처와 통증까지 어쩌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