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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57화 (57/113)

57화

몇 번을 두드려도 작은 창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두드렸고, 차 한 잔 마실 시간쯤 되어가자 다시 창이 열리고 하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얼굴을 구기고 짜증을 냈다.

“거, 끈질기구만! 계속 그 짓을 하면 내 병졸을 불러다 쫓아내겠다!”

당장 병졸을 부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하인은 충분히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사영은 그 사실을 몰랐지만 험한 말을 하는 인간을 참을 만한 인내심 정도는 가진 신령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물었다.

“혹시, 이 집에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이 살지 않소?”

“……뭐야? 청영 님을 말하는 건가.”

“청영(靑影)…….”

푸른 물에 비친 그림자를 이르는, 청수희의 다른 이름이다. 사영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래. 만나러 온 사람은 청영 님이오.”

하인은 미간을 풀지는 않았지만 시선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수상하다는 낌새는 지워지지 않았지만.

“……청영 님이 곧 오실 시간이긴 하지만……. 집 주인도 아니고 방문객을 여기서 찾으면 어떻게 하나?”

“한 번만 뵈면 되니 여기서 기다려도 되겠소?”

사영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하인이 투덜거렸다.

“아니. 그냥 들어오쇼. 찝찝하긴 하니까.”

“고맙소.”

그녀는 열린 대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사람들이 거니는 시끄러운 대로와는 달리 집 안은 한적하고 고요했다. 불과 문과 담벼락 하나로 세상이 바뀐 듯한 분위기였다.

너른 정원 안으로 굽이굽이 돌아가는 돌길, 그리고 정면에 있는 거대한 전각 앞에 연못이 있었다. 사영은 한눈에 그것을 알아보았다. 청수희는 아마도 저기로 드나들 것이다. 그녀는 재빨리 연못 근처로 가서 섰다.

하인이 뭐라 하려다가 평민의 여인을 굳이 전각 안으로 이끄는 것도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이라 생각했는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그녀가 이곳에 있대도 특별히 위험한 짓은 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집 주인 성현은 한 번 방에 틀어박히면 잘 나오지 않았으니 들킬 염려도 없었다.

“여기 있다가 청영 님을 만나거든 빨리 돌아가쇼.”

“알겠소.”

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마저 전각을 뒤돌아 사라지고 나니 정원은 그야말로 고요했다. 담벼락 바깥으로는 경비를 서는 사병들이 있었으나 안쪽에는 그나마도 없다. 그녀는 뚫어져라 연못을 바라보았다. 푸른 물이 고요했다.

“빨리 나오세요, 청수희. 아니, 이곳에서 쓰는 이름은 청영이라 하였나.”

사영이 중얼거렸다. 참으로 고약한 취미다. 방문객으로 있는 집이라면 미리 그렇게 말해 주면 어디 덧나나.

그 말에 답하듯 수면이 서서히 흔들렸다. 방울 같은 건 올라오지 않았다. 동그란 공기 방울 따위는 숨을 쉬는 존재들이 내는 것이다. 청수희는 호흡을 필요치 않는 샘의 정령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치 물 그 자체인 듯 수면에서 아주 미끄럽게 올라왔다. 수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사영조차도 미처 청수희가 올라올지 예상하지 못해 흠칫하고 놀랄 정도였다.

수면 아래에서 머리꼭지가 나타나 서서히 위로 올라왔다. 비록 인간의 형체를 하고 있었으나 청수희의 움직임은 생명체가 아닌 흐르는 물과 닮아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이 사영과 마주치며 살짝 휘어졌다.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수면으로 걸어 올라온 샘의 정령이 머리카락을 몇 번 빗어 넘겼다. 물에 젖어 연못에 연결되어 있던 긴 푸른 머리가 스르륵 짧아지며 보송하게 말랐다. 부드럽게 허리까지 늘어진 머리카락을 쥐어 비녀를 꽂아 틀어 올리며 청수희가 웃었다.

“제대로 왔네, 뱀의 일족의 딸.”

“오는 데 고생을 좀 했습니다.”

신령계에서 인간계로 오는 통로는 수도에서 사나흘 정도 말을 달려야 하는 산 속에 있었다. 다른 통로도 있었을 것이나 청수희는 알아보기 귀찮다며 그곳만을 알려주었다.

“때문에 군졸 하나를 살해하고 그 말을 빼앗아 타야 했습니다. 마을을 돌며 집을 태우고 있더군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청수희는 대답 없이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녀는 다른 소리를 했다.

“그래도 능력이 좋네, 인간계에 와서도 군졸을 능히 상대할 수 있다니.”

“불을 지르느라 정신을 놓고 있는 인간 뒤를 찌르는 정도야 아이도 할 수 있을 걸요.”

사영은 투덜거렸다.

“당신은 이리도 자유롭게 다니면서, 날 데리고 와줬다면 그 고생도 안 했을 텐데. 며칠이나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달려왔단 말이지요.”

“나는 물을 통해 자유로이 다닐 뿐, 다른 이를 함께 데리고 나올 수는 없거든. 내가 물로 끌고 들어와 이동해 버리면 넌 익사해 버릴 테니까. 물에 둥둥 떠서 배를 뒤집은 뱀으로 수면에 떠오르고 싶은 건 아니겠지?”

꼴사나울 거야, 하고 말을 덧붙이며 청수희가 몸을 돌렸다. 어느새 샘의 정령은 완벽한 인간 여인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머리카락이 푸른색이라는 것 정도가 특이할 뿐이었다.

“청영이라고 이름도 따로 쓰고. 게다가 완전히 인간의 모습을 하다니. 아예 머리색도 바꾸지 그러시나요?”

그 말에 청수희는 활짝 웃었다.

“머리색 정도는 내 재미라고 생각해 줘. 특이하고 재미있잖아?”

“…….”

하여간 저 재미를 찾는 성격은 못 말린다. 애초에 그녀가 사영의 유배지까지 찾아왔던 것도 재미 때문이었으니까. 청수희는 우아한 걸음으로 앞장섰다.

“자, 마침 성현 님이 안에 계시니…… 함께 들어가 볼까?”

이 집의 주인 말이군. 사영은 눈을 굴렸다. 그녀는 청수희가 이끄는 대로 거대한 전각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 안은 기묘하게 조용했다.

“최근에는 이 집의 주인께서 빨리 퇴청하고 계시지. 왜일 것 같아?”

실내가 어둡고 불기 하나 없었다. 사영은 그것이 샘의 정령인 청수희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녀는 불기운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이곳에 계속 머무시는 건가요?”

“최근 얼마간은. 집 안 사람들이야 나를 손님으로 생각하지만 객이 곧 주인이지. 그보다, 주인이 왜 일찍 오는 것 같냐니까?”

“뻔하죠. 인간 따위가 샘의 정령의 술수를 어찌 이긴답니까.”

“날 뭘로 보는 거야? 술수 따윈 안 썼다구. 그 인간이 순수하게 나한테 반해서란 말이야.”

퉁명스러운 사영의 대답에 청수희가 눈을 반짝이며 반박했다. 과연, 인간들의 눈으로 보면 청수희는 아마 대단한 미인일 것이다. 희디흰 피부는 매끄럽고 허리는 버들가지처럼 가늘다. 반달 같은 눈썹 위의 이마는 반듯하며 매끄러웠고 인간과 다른 푸른 머리와 푸른 눈동자는 기묘한 이질감을 자아내 더욱이나 아름다워 보였다.

애초에 살아 있다는 단어가 맞지 않는, 호흡조차 필요로 하지 않는 정령이라는 점이 인간들의 기대와 다르겠지만. 그녀에게 육욕이란 가장 먼 단어일 것이다.

그리고 실내의 가장 안쪽 방문을 열었을 때 사영은 한숨을 쉬었다. 술수를 안 쓰긴 뭘 안 썼단 말인가. 인간의 눈이 저렇게 까맣게 죽어 있는데.

물끄러미 성현을 바라보는 사영의 시선을 깨닫고 청수희가 입을 삐죽였다.

“잠깐만 저렇게 해놓은 거야.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너무 시끄러우니까.”

“그러시군요.”

“진짜라구.”

샘의 정령은 의자에 앉은 성현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만졌다. 그녀의 푸른 눈이 즐거움으로 반짝였다.

“자, 사영. 넌 연화를 보고 싶다고 했지?”

“네.”

“연화는 지금 이곳 수국의 구중궁궐에 있어. 왕이 그 애를 잡아갔지.”

“궁궐이요?”

놀라서 사영은 눈을 크게 떴다. 청수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는 지독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연화의 치유능력이 필요해서 잡아갔어. 지금은 얌전히 궁에서 잘 먹고 잘 자며 왕을 치료해 주고 있는 중.”

“그렇……군요. 그렇다면 백호 님은…….”

“속이 자글자글 끓고 있겠지. 그토록 귀애하던 인간 여인이 다른 남자의 손에 넘어간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니.”

청수희가 경쾌하게 웃었다. 사영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토록 사랑하던 연화가 인간계로 얌전히 돌아가도록 놓아둔 데다 다른 사내가 그녀를 데려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다고? 그렇다면 백호는 그녀를 그리 사랑하지 않은 것인가.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청수희가 고개를 저었다.

“연화가 원한 일이야.”

“원했다구요?”

“그래. 자세한 사정은……. 뭐 복잡하지만. 직접 원해서 인간계로 돌아왔고, 직접 왕의 관리에게 찾아가 궁으로 왔어.”

모든 상세한 설명은 생략한 채 청수희가 간단히 일을 축약해서, 약간 왜곡된 방향으로 들려주었다. 그녀는 성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까 이제, 너는 여기 계신 제사장의 곁에 붙어서 궁으로 들어가야 해. 연화를 보려면 말야.”

“그런…… 거군요.”

“그래, 내가 이렇게까지 힘을 써주는 일은 잘 없다구. 감사해야 해.”

청수희가 깔깔대고 웃었다. 사영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입을 꽉 다물었다. 다소 멍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괜찮은 걸까요.”

“괜찮다마다! 애초에 네가 원한 건 연화를 가까이서 살피고 어떤 애인지 아는 거였잖아. 안 그래?”

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꼬리마저 잘리고 일족에서 쫓겨난 상황에서 그녀에게 남은 건 많지 않았다. 이제 그저 연화가 대체 어떤 사람이고, 어째서 백호가 그리도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알고 싶을 뿐이었다. 자신의 소원을 위해 청수희가 기꺼이 힘을 써주는 것이 고마운 일이었다.

“자, 그럼 이제 제사장님께 우리가 원하는 내용을 주입해 드릴까?”

까맣게 가라앉은 눈의 뚱뚱한 중년 남자 뒤로 돌아가서 샘의 정령이 미소를 지었다.

청수희가 건 술수는 일종의 암시였다. 그녀가 앞에서 사영을 시녀의 한 명으로 설명했고, 성현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당연히 연화의 거처 근처에서 일하는 시녀라는 사실도 받아들였다. 성현은 청수희가 말할 때마다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성현의 눈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제사장이라는 자가 정신력이 형편없나 보네요.”

“인간이란 그런 법이지.”

청수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현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전에 없이 싸늘했다. 언제나 유쾌한 미소를 짓고 있는 샘의 정령이 저런 표정을 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아마도 곧 생이 마감될 테니 그 전에 우리가 사용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아.”

“생이 마감된다구요?”

“응. 저승에 내려갔을 때 이 녀석의 이름이 염라대왕의 명부에 오르는 것을 봤거든.”

“……저승까지 가시는군요.”

“그곳에도 강이 있으니까. 건너면 모든 것을 잊게 되는 망각의 강이.”

청수희가 웃었다. 그녀의 이름은 많고도 많았고, 그녀의 세계 역시 그랬다. 그녀는 조금 질린 사영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덧붙이지 않은 말을 삼켰다. 그 명부에 익숙한 이름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

그저 재미있다는 듯 빙글거리며 그녀가 손뼉을 쳤다.

“자, 그럼 한 번 가볼까? 연화가 있는 구중궁궐, 그 깊은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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