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인간들이란 알 수가 없다. 어째서 한 마을을 전부 몰살시키려 하는지.”
호접은 느릿하게 맑은 차를 마셨다. 그녀의 앞에는 묘우가 앉아 있었다. 그는 애매한 얼굴로 웃지도 않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게다가 중앙의 관리라면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 아닌가. 알 수가 없군.”
“인간들의 생각을 우리가 어찌 알겠어?”
“그래……. 정말이지. 연화 님도 그렇고 말이야.”
연화는 또 왜 떠나간 것일까. 호접은 한숨을 쉬었다. 모든 것이 명쾌하지 않았고 그녀가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어쩌고 있어?”
“일단 중간지대에 몰아넣은 뒤 어떤 존재도 접근하지 못하게 통제하고 있어. 신령계든 저승이든, 다른 계의 존재와 접하면 순리가 흐트러지니까.”
“그래……. 백호 님은 뭐라 하시던가?”
“명하셨던 부분이니 고개만 끄덕이셨어. 이번에 또 인간계나 저승과 문제가 생기면 상제께서 정말 그대로 지나치지 않으실 테니까 백호 님도 사실상 손발이 묶인 상태잖나.”
나비의 신령은 발을 까닥였다. 그들은 궁 2층의 너른 마루에서 다과를 나누고 있었다.
“나라도 인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아야 하나 고민이야. 내가 듣는다고 해서 그들의 사정을 풀어줄 수야 없는 노릇이라 그만두기는 했지만.”
“그래, 그만둬. 네가 알면 오히려 곤란해질 뿐일 거야. 사정을 안다고 우리가 손을 댈 수도 없잖아.”
“그건 그래.”
만약 안타까운 사정이라도 있다면 더 곤란하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신령계의 원로였고, 결코 그 이상 인간계까지 힘을 미칠 수 없었다. 호접은 동의를 표했다.
“연화 님과 뭔가 연관이라도 있다면 큰일이지만…….”
“그렇다면 더 몰라야지. 백호 님이 어떻게 나서실 줄 알고.”
그것도 그렇다. 그의 말이 옳았다. 호접은 연화를 아꼈지만 그보다 더 신령계와 백호가 소중했다. 하지만 호접은 최근 백호의 상태를 생각하면 한숨이 멈춰지지 않았다.
“백호 님이 언제쯤 괜찮아지실까.”
“……기다리면 되겠지. 사방신이신데.”
“정말 그럴까?”
묘우의 말은 일리가 있지만 동시에 의심이 갔다. 호접은 백호의 그늘진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의 긴 삶 동안 사방신이 저토록 가라앉은 얼굴을 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백호는 여태껏 호접이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신의 기분이 흐려서인지 신령계의 하늘은 계속해서 흐렸다. 두 신령계의 원로는 우울한 얼굴로 밖을 내다보았다. 빗방울이 하나둘씩 투둑이며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백호의 기분을 대변하는 날씨였다.
밖을 내다보면서, 호접과 묘우의 위층에 앉아 있는 백호는 가늘게 눈을 떴다. 보고 싶지 않았지만 보고 싶었다. 자꾸만 허공에 연화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지난번 천리안에 떠올랐던, 지나치게 흐릿했던 그녀.
다시 본다 하여 더 정확히 보리라는 보장은 없다. 고초를 겪지 않고 평안히 있는 듯했으니 이제 보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그게 나았다. 하지만 마음은 계속 정반대로 달려갔다.
‘한 번만 더.’
세계의 규칙을 어기고 경계를 넘었던 탓에 천리안의 힘이 지나치게 소진되었다. 천리안을 아예 연단위로 봉인할 생각이 아니라면 지금 써서는 안 된다. 하지만 백호는 이끌리는 마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림자만이라도.’
욕심내지 않고 아주 약하게만 발동하면 괜찮을지 모른다.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백호는 속으로 변명을 중얼거리며 힘을 끌어올렸다. 연화의 그림자만 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괜찮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또렷한 얼굴을 보고 싶었고 거기에 더해 말도 전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너의 마을 사람들과 어머니는 내가 구해내어 안전히 데리고 있다. 혹시라도 그들이 보고 싶다면 돌아오려무나.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백호가 더 잘 알았다.
“연화야…….”
가능한 힘을 빼고 시야를 좁혀 가늘고 길게 한다. 한 번 찾아냈던 대상을, 천리안은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조금 더 쉽게 찾아갔다.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호화롭고 아름답던 건물.
흐리게 드러난 영상 속, 이번에는 침상 위에 다른 이가 앉아 있었다. 덩치가 크고 단단한 것을 보니 사내였다. 그리고 그의 곁에 가느다란 여인이 앉아 사내의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다. 연화였다.
그 광경을 보고 백호는 심장이 바늘로 찔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공간, 사내의 얼굴을 다정히 감싼 여인의 두 손.
집중력이 흐트러지자 천리안이 급속도로 멀어지며 끊겼다. 백호는 다소의 현기증을 느끼며 미간을 짚었다. 아마 천리안은 이제 한동안 이 정도의 세기로도 발동하지 못하리라. 그는 깊이 한숨을 쉬며 양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 정인이 정말로 있었던 게로구나.”
그렇구나. 중얼거리며 백호는 일어나서 방 안을 돌아다녔다. 짐작하고 있었다. 이러저러한 상황도 그러했다. 그러나 연화의 정인이 있다는 사실을 직접 목격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일이다.
심장은 아프기도 하고 들끓기도 하였다. 그는 한동안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 앉지 못했다. 한편으로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질투를 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는 화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연화의 정인은 대체, 저 정도의 부와 권세가 있는 자가 어찌 마을 사람들의 위기를 모른 척 넘겼단 말인가.’
백호는 애끓는 속을 달래려 애쓰면서 홀로 중얼거렸다. 저 정인이 대체 제대로 된 자란 말인가. 여인을 데려가 자신의 거처에 두고 사랑하면서 그녀의 마을은 전혀 돌보지 않다니. 심지어 그곳에는 그녀의 어머니가 있었다.
그러나 곧 그는 자신이 처음 연화를 데려오며 마을에 벌을 내리겠다 위협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등골에 찬물을 끼얹은 듯 화가 식었다.
백호는 가만히 바닥을 보았다. 스스로 행했던 일에, 처음으로 후회라는 감정이 밀려들었다. 그는 깊이 탄식했다.
***
사영은 이게 잘하는 짓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청수희의 꾐에 넘어가 다른 세계로 발을 디뎠으나, 그 때문에 그녀의 능력은 아주 쪼그라들고 말았다.
그녀가 알려준 길을 통해 인간계로 첫 발을 낸 순간 사영은 일신의 능력이 형편없이 추락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의 그녀는 아마 인간계의 여인과 별다를 바 없는 평범한 육체일 것이다.
‘경고를 듣기는 했지만.’
청수희는 누누이 말해 주었다. 네가 다른 계로 나간다면 많은 수련을 한 신령으로서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고.
하지만 사영은 그저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숨이 붙어 있다고 생을 사는 것은 아니다. 이제 목표가 없어져 뱀의 일족에서도 배제되어 버린 사영은, 자신이 나갈 길을 찾아야 했다.
왜 그리도 처참하게 자신의 계획이 망가진 걸까. 사영은 궁금했다.
‘대체 그 인간의 여인이 어떤 방법으로 백호 님을 홀렸는지 알고 싶어.’
뭔가 특별한 점이 있는 걸까? 오랜 시간 수련의 시간을 쌓아온 사영조차 따라가지 못할 어떤 점이 백호를 끌리게 만들었을까. 자신의 한탄과도 같던 이야기를 들은 후 청수희는 사영에게 연화를 보고 싶은지 물었다. 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연화를 본 적이 없었고, 그저 인간의 여인이라는 사실만 알았다. 미모가 뛰어나다는 말은 전해 들었으나 그만 한 미인이 신령계에 없는 것도 아니다. 그저 외모뿐이라면 신인 백호가 그리도 깊이 빠져들지 않았을 터.
뱀의 일족 수장인 사혈에게 그만한 형을 직접 내렸을 때는 그만큼 분노했던 게 아닌가. 실제로 사혈의 얼굴을 불로 태우던 백호는 무서운 기세를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
‘함정은 아니겠지.’
연화를 보여주겠다는 청수희의 제안을 받아들이긴 했으나 가슴에 일말의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인간계는 완벽하게 미지의 세계였고 샘의 정령은 지독히 장난을 좋아했다. 그녀 혼자의 장난으로 끝나면 좋지만 남아 있는 뱀의 일족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연화는 지금 인간계에 있다고 말을 듣기는 했다. 왜 백호의 곁에 있지 않은 것인지, 어쩌다 인간계로 다시 돌아가게 된 것인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자꾸 더 물어보라며 장난기를 번뜩이는 청수희의 눈이 못마땅해서 더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사실 궁금한 것투성이였다.
사영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인간으로 가득 찬 장터를 지나갔다. 경계를 건너오기 전 마지막 남은 힘으로 둔갑술을 써 그녀의 외모는 평범한 인간 여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검은 머리에 창백한 안색, 메마른 낯의 여인.
둔갑할 때 가장 잘 들키는 것이 꼬리였으나 어차피 꼬리는 아비가 자른 터라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거 하나는 잘되었다 싶어서 사영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인간계로 나올 마음이 든다면 이곳으로 찾아오렴. 청수희가 알려준 곳은 수국의 수도에 있는 한 저택이었다. 사영은 남의 이목을 끌지 않도록 조용히 걸어 그 저택으로 갔다.
번잡한 거리를 지나고, 한참을 걸어서 사람이 줄어든 대로를 지나쳤다. 저택은 번화가에서 그리 머지않아 걸어서도 갈 수 있었다.
사영은 거대하게 솟은 저택의 대문을 발견하고 잠시 멈춰 섰다. 신령계의 건물들과는 달리 하늘로 높게 솟아 아주 불쾌한 모양새였다. 언제나 깊은 땅속에 거처를 마련해 두는 뱀의 일족답게 사영은 인간계의 밝고 맑은 날씨도 못마땅했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건물은 더욱 싫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대문을 두드렸다. 거대한 손잡이를 잡고 몇 번 두드리자 위쪽 작은 문이 열리고 하인이 내다보았다. 그는 대문 앞에 서 있는 창백한 얼굴의 여인을 보고 눈을 찌푸렸다.
“뭐야, 거지? 무엇 때문에 온 게냐?”
“……거지가 아니오. 나는 이곳 주인……을 뵈러 왔소.”
청수희는 이 저택을 알려주며 가타부타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사영은 주인을 말하면서도 멈칫했다. 과연 그녀가 이 저택의 주인을 보러 온 것이 맞는가? 단지 청수희가 장난을 친 것뿐이면 어쩐다. 복잡한 사영의 얼굴을 보고 하인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주인? 주인? 제사장 성현 님을 말하는 게냐? 평민 계집이?”
“아무튼, 그러하오. 그……. 제사장. 성현 님. 그분을 뵙게 해주시오.”
“헛소리도 가지가지군. 날씨가 더워지니 계집이 더위를 먹었나.”
하인이 비웃었다. 큰 저택에는 온갖 거지가 다 찾아들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싸늘한 눈초리를 마지막으로 작은 창이 단호하게 닫혔다.
사영은 좌절하지 않고 다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어차피 물러난다고 해도 갈 곳도 없었다. 신령계로 갈 수 있는 통로는 이미 입구가 닫혀 그녀의 줄어든 능력으로는 다시 열 수도 없었다.
금수의 붉은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