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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55화 (55/113)

55화

눈을 떴을 때, 만희는 두통이 다시 찾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빌어먹을.”

그는 이를 갈며 침상에서 일어나 앉았다. 뇌 속을 벌레가 파먹고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아주 얇은 칼로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만 골라 찌르고 저며내는 것 같았다.

어느 쪽도 직접 겪어보지 않았으나 지금의 고통이 그보다 덜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차라리 죽는 쪽이 나을 것이다. 아니, 백배 낫다. 만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주춤거리며 침방시녀가 다가왔다. 어젯밤을 지내고 빠져나갔던 여자다. 그녀는 왕의 아침 시중을 들기 위해 은대야에 세숫물을 담아가지고 왔으나 만희는 시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개 같은 년.”

이유 없이 만희는 욕설을 뱉었다. 무엇이라도 욕하거나 해치거나 죽이지 않으면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다. 대체 무엇이 나를 이리도 괴롭히는가? 그는 두통의 근원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 고통이 멈춰야 했다.

한 번 알게 된 맑은 머릿속은 마약과도 같다. 그는 두통을 더욱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인내심과 참을성은 단 한 순간에 바닥이 났고 시녀는 두려움에 질려 뒷걸음질을 쳤다.

왕은 머리를 움켜쥐고 시뻘겋게 핏발이 선 눈으로 시녀에게 소리를 질렀다.

“빨리 가서 그 빌어먹을 치유사를 데려와! 그년을 데리고 오란 말이다!”

덜덜 떨며 그녀가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얼마 있지 않아 연화가 시녀와 함께 달려왔다. 그녀를 지키는 경비병도 함께였다.

“전하, 전하.”

연화는 침착하게 만희에게 다가갔다. 침대 조금 멀리서부터 무릎을 꿇고 무릎걸음으로 다가간 그녀는 침대에 이르러 만희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머리를 움켜쥔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핏발이 선 붉은 눈이 허공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

다시 한 번 연화가 부드럽게 그를 불렀다. 그녀는 치유사였고, 환자에 대해서는 인내심이 매우 뛰어났다. 만희는 연화의 부름에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프지 않게 해줘.”

돌처럼 딱딱하고 고저 없는 말투였다. 마치 만들어진 인형처럼, 만희는 그 커다란 덩치를 웅크리고 침상 위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연화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만희의 머리 위로 가져다 대었다.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상냥한 말투에 만희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연화의 목소리가 마치 두통에 시달리는 머릿속을 쓰다듬고 위로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생소한 느낌에 그는 눈을 감았다. 낯설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연화의 손에서 은은한 노란 빛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왕의 머리를 손으로 잡고 그의 등 뒤에 선 원혼들에게 말을 걸었다. 온기를 원하는 혼령들이 약사여래의 온기를 얻으려 다가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더 수가 많았고, 혼령들이 내미는 손이 움켜쥐는 온기도 늘어났다.

연화는 그들이 원하는 만큼 보살의 온기를 나눠주었다. 만희의 등 뒤를 기웃거리던 혼령들은 잠시의 따스함에 만족하여 한 발씩 뒤로 물러섰다.

머리와 목덜미와 등을 쥐어 잡고 있던 갈퀴 같은 찬 손아귀에서 벗어난 만희가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너무 두통이 심했기 때문에 통증이 가라앉고 난 이후에도 머릿속이 멍했다.

그는 이마를 짚고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연화의 노랗게 빛나는 손이 만희에게 남은 통증을 마저 몰아내주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느릿하게 한숨이 샜다. 만희는 아직 흐린 시야를 들어서 앞을 보았다. 연화의 희고 작은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피식 웃었다.

“나도 다 됐군. 천것의 얼굴을 보고 안심이 되다니.”

두 번뿐이지만 불가능할 것 같던 두통을 물러나게 해준 연화는 만희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그녀의 작은 손과 얼굴이 그 무엇보다 안락한 쉼터처럼 보였다.

“다행입니다.”

연화는 미소를 지었다. 고통에 시달리던 자가 그녀의 손길로 편안해지는 것은 언제 보아도 좋았다. 그녀는 능력뿐 아니라 성격적으로도 타고난 치유사였다.

그 때 시끄러운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만희가 인상을 구겼다. 조용하고 편안해졌던 머릿속이 다시 시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문간에 나타난 제사장 성현을 노려보았다. 제사장은 불쾌해 보이는 왕을 보고 연화에게 호통을 쳤다.

“아직, 아직 고통에 시달리시는 게 아니냐! 빨리 네 할 일을 하지 않고 무엇 하고 있는 게냐, 천한 계집!”

성현의 고함에 만희는 미간을 문질렀다. 너무 시끄럽고, 너무 때가 안 좋았다. 간신히 두통에서 벗어나 귀여운 계집의 얼굴을 보며 편안해졌는데, 저 돼지 같은 제사장 따위가 들어와 계집에게 호통을 치다니.

연화는 고개를 숙였다.

“두통은 이제 괜찮으십니다. 다만 남은 통증이 있어 아직 조금 더 휴식을 취하셔야…….”

“그것까지도 네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아니냐! 남은 통증이라니, 치유사 주제에 그게 할 말이냐!”

연화가 오기 전까지는 애초에 치유사의 존재 자체도 확신하지 못했으면서 성현은 성화를 부렸다. 그는 점점 더 일그러지고 있는 왕의 얼굴을 보며 조바심이 나서 얼른 그에게 허리를 굽혔다.

“저것이 무능하여 전하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나이다. 제가 직접 매질이라도 하여 정신을 차리게 하겠나이다.”

“……시끄럽다.”

만약 지금 침상이 아니고 평상시의 옷차림이었다면 바로 검을 뽑아 성현의 목을 내리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제사장은 대귀족이었고 쉽게 죽이면 곤란한 인물이긴 해도 만희의 성격은 이것저것 따지지 않았다.

그러나 성현에게는 다행히도 만희는 잠옷 차림으로 침상 위에 앉아 있었고, 검을 뽑으러 가기에는 두통 후의 통증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금 더 편안한 분위기를 즐기고 싶었다.

“전하, 제가 목소리를 줄이겠습니다. 아뢸 것이 있어서 왔으나……. 나중으로 미루겠습니다.”

“아뢸 것?”

“예, 그렇습니다.”

잠깐 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통증이 가라앉고 난 후 머릿속의 고요함은 지극히 귀중했다. 그는 빨리 물러가라고 손짓했다. 한마디만 더 하면 죽여야겠다, 라고 머릿속으로 간단히 생각하면서.

다행히 성현은 입을 다물고 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왕의 눈매에 살기가 매달리기 시작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만희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 이마를 짚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왔던 지독한 통증 때문에 전신에 힘이 없었다.

방 한구석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연화를 흘긋 보고 만희가 손짓했다.

“뭘 멍청하게 서 있는 거지? 이리 와라.”

왕의 손짓에 연화는 멈칫거리며 다가갔다. 여전히 잔인하고 무서운 자였으나 그는 지금 환자였다. 당장이라도 뒷걸음질 치고 싶은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서 연화는 그의 침대 곁에 섰다.

“내 이마에 손을 올려라.”

만희의 명령에 연화는 순순히 손을 그의 이마 위로 올렸다. 창백하고 식은땀에 젖은 이마였다.

왕은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작고 부드러운 꽃 같은 여인은 손도 아주 가냘팠다. 적당한 온기가 그녀로부터 전달되었다. 아직 남은 통증마저 연화의 손이 닿은 곳을 중심으로 서서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

길고 날카로운 눈은 내리감자 의외로 마치 아이 같은 인상을 드러냈다. 연화는 만희의 이마에 손을 올린 채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두통에서 벗어나 평온한 표정이 아주 안정되어 보였다.

‘원혼들에게 쥐어뜯겨 말로 형언하지 못할 고통이겠지.’

순간 가엾은 자, 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연화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수국의 이 흉포하고 잔인한 왕에게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다. 가엾다는 말은 오히려 그에게 매여 성불하지 못하고 있는 혼령들에게 주어야 한다.

‘고통에 시달리는 건 안타깝지만.’

연화는 한숨을 쉬었다. 눈을 감고 얌전히 쉬고 있는 만희는 조금 어린아이처럼 보여서 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지독히 악독한 자라는 걸 아는데도 그랬다. 왕은 거칠지만 나름대로 단정한 얼굴이었고, 이렇듯 쉬고 있으면 걸핏하면 검을 휘두르는 잔인한 자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연화가 그의 얼굴을 요모조모 보고 있을 때 눈을 감은 채 만희가 입을 열었다.

“그리 쳐다보다 내 얼굴이 뚫어지겠군.”

“아, 저어…….”

연화는 당황해서 손을 떼려고 했다.

“손!”

“예, 예!”

만희의 호통에 그녀는 얼른 다시 손을 붙였다. 뭔가 어정쩡하고 어색한 자세였지만 만희는 만족한 듯 깊이 숨을 내쉬었다. 그는 눈을 떠서 연화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내 얼굴을 쳐다본 감상은?”

“예?”

“한참 동안 건방지게 용안을 뚫어져라 보지 않았느냐. 감상이 어떠냐는 말이다.”

만희의 말투는 놀리는 것 같았다. 연화는 당황해서 어물거리며 눈을 내렸다. 감히 왕의 얼굴을 겁도 없이 계속해서 쳐다봤으니 경을 칠 일이다. 하지만 왕은 그리 불쾌하지 않은 말투로 말을 이었다.

“꽤 미남이지?”

“…….”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못 떼는 연화를 보며 만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얼씨구, 대답을 안 해? 미남이 아니라 이거냐?”

“그, 그게 아니오라…….”

“됐다, 거짓으로 지어낼 거면 진짜처럼 하든가.”

그는 혀를 찼다. 만희는 난처해하는 연화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순진한 여자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어떻게 이 곤경을 헤쳐 나가야 할지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뭐, 생긴 것에 대한 감상은 자유롭게 해도 괜찮지.”

“아닙니다! 정말로…… 그런 것이 아니오라.”

“아니면, 괴물같이 생겼느냐?”

생각 없이 툭 튀어나온 말은 만희의 의도보다 진심에 가까웠다. 뱉은 만희도, 들은 연화도 당혹해서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잠시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만희는 잠시 후 연화의 손을 내려 치웠다. 그는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의 적안은 두통이 없어 맑았지만 동시에 읽을 수 없는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

“이제 물러가라. 네 쓸모는 했으니.”

연화는 내려진 손을 맞잡고 있다가 만희를 바라보았다. 잠시 말을 망설였지만 이윽고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린아이 같으시다고…… 생각했습니다.”

“…….”

뜻밖의 말에 만희가 의아한 얼굴로 연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괜히 말을 꺼냈나 싶었지만 이왕 입을 열었으니 말은 끝까지 해야 했다.

“눈을 감고 계시니 아이 같은 인상이시라고…….”

“아이?”

“편안해 보이셔서, 아마도.”

“…….”

잔인한 자였지만 적어도 만희의 얼굴은 괴물 같지 않았다. 그것은 말해 주고 싶었다.

별다른 반응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만희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그것만도 다행이었다. 왕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은 듯해서 연화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절을 했다.

“물러가겠나이다.”

“……그래.”

연화가 경비병과 함께 자신의 거처로 돌아간 후, 텅 빈 방 안에서 만희는 창문 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부신 초록 나뭇잎들이 햇빛을 반사했다. 그는 무표정한 채로 중얼거렸다.

“건방진 계집.”

금수의 붉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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