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좋다.”
호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혈질인 백호가 이 정도나마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안심이었다. 그녀는 백호의 옷자락을 놓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염려 마십시오. 제가 틀림없이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모두를 데리고 신령계로 와라. 목숨을 잃지 않도록.”
“백호 님, 신령계가 아닌 중간 지대에 숨겨놓으면 어떨까 합니다. 그거라면 모두가 안전할 수 있을 듯합니다.”
각 세계에 나누어져 사는 존재들은 기본적으로 어떠한 상호작용도 하면 안 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모습을 보는 것은 물론 말을 나누는 것도 불가했다. 인간계의 인간들을 구해내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저승의 염라대왕과 현무, 청룡의 항의를 모두 받게 되겠지만, 나중에 올 상제의 징계를 줄이려면 인간들을 신령계와 최대한 격리해야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백호의 시선이 가느스름했다. 하지만 호접은 물러서지 않고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신령계의 원로로 이 정도의 설득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백호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제야 호접은 엷게 웃음을 띄었다.
“그 오랜 세월 백호님을 모셔온 충신입니다. 제가 언제나 옳은 말만 한다는 사실을 아시지 않습니까.”
“말은 잘하는구나.”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호접의 말이 백번 맞았다. 그녀는 언제나 합리적이었고 판단력이 뛰어났다. 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 일은 내 너에게 일임하겠다. 다만…….”
그는 말꼬리를 흐리다가 이었다.
“묘우에게는 말하지 말아라.”
“묘우에게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연화와 관련된 일이다. 백호는 묘우가 껄끄러웠다. 분명 지독히 오랜 기간 신령계에 충성해 온 충직한 신령인데도 그랬다. 아니, 그래서 더욱이나 연화의 일에 관련해서는 껄끄러웠다.
곧 호접은 차비를 차리고 백호에게 인사를 남기고 팔랑이며 사라졌다. 인간계에 자유로이 드나드는 나비의 신령은 곧장 연화의 마을로 향하는 숲길로 향했다.
날개는 가볍지만 마음은 무겁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하나, 이 일로 인해 분명 작지 않은 소란이 일 것이다.
호접은 일부러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다. 만약 나중에 일이 커져 상제가 직접 책임을 묻는다 하더라도 자신이 나서 일을 했다고 하면 어느 정도 백호에게 갈 벌이 가벼워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장 빠른 속도로 날아 세계와 세계를 잇는 통로를 통과했다. 세계가 중첩되는 사이에 아주 작게 난 틈이나 다름없는 길들이었다.
인간계로 들어서면서 그녀는 노란색의 작은 날개에 빛을 불어넣었다. 마치 도깨비불처럼, 인간을 홀릴 수 있는 빛이었다.
‘말로 소통하는 건 안 돼.’
아무리 호접이라 해도 인간과의 상호작용은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그녀는 괜찮을지 몰라도 후일 인간에게 어떤 영향이 미칠지 몰랐다. 빛으로만 홀리며 날아가면 인간들을 전부 끌어모을 수 있을 것이다.
맨 처음 그녀를 발견한 인간은 숲속에서 주변을 경계하며 나무를 하던 남자였다. 그는 노랗고 파란 빛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가 곧 눈이 풀리며 홀렸다. 불빛을 무작정 따라오며 남자가 발걸음을 옮겼고 나비는 팔랑거리며 인간이 따라올 수 있는 속도로 날아갔다.
어둠 속에서 나비의 날개가 파닥이며 빛을 흩뿌렸다. 때는 밤이라 호접의 빛이 등불처럼 더 밝게 보였다. 마을로 들어서며 남자와 나비를 본 다른 자가 다가와 말을 걸려고 했지만 곧 그의 눈도 풀렸다. 그 뒤를 또 다른 여인이 이었고, 그 걸음을 또 다른 자가 따랐다.
나비는 마을 구석구석을 돌며 인간들을 끌어모았다. 거의 모든 인간들을 다 모았다고 생각했을 때, 마지막으로 나타난 작은 집 한 채에 인기척이 났다.
그녀는 몸을 빙글빙글 돌리며 꽉 닫힌 문 앞에서 난처하게 서성였다. 집의 문과 창문이 전부 완전히 닫혀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절망한 사람처럼, 세상과 소통을 단절한 듯이.
그녀는 부엌의 작은 숨구멍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몸을 던져 날아들어 갔다. 그을음이 많았지만 들어갈 수 있었다. 집 밖에서 나비에 홀린 자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려고 아우성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방 안에 누워 있던 노파가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거 누구요?”
힘겹고 슬픈 목소리였다. 호접은 날개를 팔랑대며 노파를 내려다보았다. 늙었지만 단정한 얼굴이었고, 힘 있는 눈매였지만 슬픔으로 인해 무너진 감정이 보였다. 인간계를 오가며 잠깐씩 얼굴을 보았던 노파는, 연화의 양어머니였다.
‘……됐어.’
호접은 그녀의 눈앞에 날아가 빛을 반짝였다. 어둠 속에서 휘황하게 빛나는 도깨비불과 닮은 빛을 보며 노파의 눈이 흐려졌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호접을 잡으려 했고, 그 때 사람들의 손에 허술한 창호지 문이 부서졌다.
나비의 신령은 최대한도의 빛을 발하며 인간들을 인도했다. 그녀의 뒤를 쫓아 마을 사람들이 걸음을 옮겨 어두운 숲으로 들어섰다.
평소라면 걸음도 하지 않을 험하고 깊은 숲이다. 이곳 천민 부락은 삼면이 낭떠러지로 둘러싸여 있어 정면의 길을 빼면 어디로도 갈 수 없었지만, 나비의 뒤를 쫓는 인간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대로 따라갔다. 길도 없는 수풀 사이로 걸음을 옮기며 생채기가 나도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윽고 나비의 신령만이 찾아낼 수 있는 세계 사이의 통로가 열렸다.
‘연화 님도 지나왔으니 큰 문제야 없겠지.’
불안했지만 호접은 그들을 인도했다. 길은 흐릿하고 신기루와 아지랑이로 가득 차 있는 곳이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이곳에 들어오는 즉시 길을 잃어 한 자리에서 맴돌다가 죽는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호접의 빛에 홀려 있어 괜찮았다.
그 길 사이로, 세계의 교집합 사이로 공간이 보였다. 길 잃은 혼령들이 주로 맴도는 중간 지대였다.
***
성현의 명을 받은 내관이 달려와서 천민 부락 밑 산자락 쪽에 주둔하고 있던 군졸들을 만난 것은 사흘 뒤였다. 전력을 다해 달려온 탓에 지친 얼굴인 내관을 보며 군졸과 관리는 흡족한 얼굴을 했다.
“그렇잖아도 제사장님께서 남기고 가신 말씀이 있었소. 마을을 불태우고 깨끗이 치우라는.”
“그렇습니다. 장수께서는 얼마든지 명받으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거 잘되었군. 혹여 몰라 제사장님의 다음 명을 기다리고 있었지!”
무관은 미소를 지었다. 제사장은 마을을 파괴하고 나오는 재물은 마음대로 나눠가지라 허락했다. 비록 천민의 마을이라고 하나 마을 하나에서 나오는 것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하다못해 호미 하나, 솥뚜껑 하나도 녹여서 팔면 전부 재물이 될 수 있었다.
곧 군졸들이 전부 모여들어 창칼을 들었다. 음식과 술, 계집이 고파서 산자락의 이웃마을까지 내려와 머물고 있던 군사들이다. 마음대로 살육하고 재물을 빼앗을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왔다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을 타고 달리는 몸짓에 그 누구도 거침이 없었다. 그 마을에 계집년이 남아 있으면 전부 범하겠다는 자부터, 남아 있는 숟가락 하나까지 전부 털어먹겠다는 자까지 다양했다. 윗분의 명을 받아 하는 일인지라 잔인하다는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않았다.
“……비었는데?”
하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 발견한 건 텅 빈 마을이었다.
마을 어귀부터 조짐이 이상했다. 아무리 인적이 드물어도 한둘은 어귀에서 도망을 치거나 근처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어야 했다.
일단 눈에 보이는 자부터 잡아 죽일 생각으로 마을에 뛰어든 군사들은 어리둥절해서 완전히 고요한 마을을 둘러보았다. 사람은커녕 하다못해 개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창칼을 들고 달려왔지만 죽일 대상이 없자 군졸들은 힘이 빠져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누가 먼저 알린 거 아닙니까?”
군졸 중 한 명이 미심쩍게 성현의 내관을 쳐다보았다. 내관은 화들짝 놀라 호통 쳤다.
“아니, 대체 무슨 소리인가! 날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수도에서 전력을 다해 말을 타고 달려와 이곳까지 사흘 만에 닿았는데!”
“과연 수도에서 여기까지 사흘 만에 오려면 다른 곳을 들리고는 불가능하지.”
무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었다. 제사장은 분명 이곳이 완전히 불타고 천민들이 고통받으며 죽는 것을 원했을 텐데 미리 전부 도망가 버려서 찝찝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들은 시선을 교환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뭐, 일단 마을에 불을 지르고 재물을 전부 빼내자고. 그런 다음 전부 죽였다고 하면 되는 거 아냐?”
군졸 한 명이 말하자 무관이 그럴듯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우리끼리 말만 잘 맞추면…….”
그는 은근한 눈으로 내관을 바라보았다. 내관은 입을 한일자로 다물며 팔짱을 끼었다. 그는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무관과 군졸들을 훑어보았다.
“내가 여기 이렇게 있는데 어찌 그런 소리를 한단 말이오?”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소? 내관.”
무관이 히죽 웃었다. 내관이 원하는 거야 뻔했다. 그는 은밀하게 내관에게 눈짓했다.
“여기서 건진 걸 좀 나눠드릴 테니까.”
내관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무관이 말을 덧붙였다.
“1할을 드리지. 내 크게 인심 썼소.”
“1할? 흠.”
못마땅하게 내관이 돌아섰다. 군졸들이 인상을 구겼고, 무관은 손을 들었다.
“1할 5푼. 그 이상은 안 되오.”
“2할 5푼. 3할 부르려다 깎아준 거요.”
“2할 5푼이라니, 이거야 원, 강도구만.”
군졸들 사이에서 빈정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거친 말투에 내관이 속으로 움찔했다. 무관은 사람 좋은 척 허허 웃었다.
“2할로 하지요. 그 이상이면 고생한 군졸들이 나눠먹을 게 없으니.”
“……뭐, 그러지. 내가 많이 양보해서, 그렇게 합시다.”
좋습니다 하며 무관이 군졸들에게 손짓했다. 그들이 말을 타고 달려 나가며 못마땅하게 내관을 바라보았다. 그가 요구한 만큼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재물이 적어지기 때문이었다. 짜증이 난 군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내관의 귀에까지 다 들려왔다.
“시벌, 내시 주제에.”
“왕후장상이 따로 있냐고 하는데 불알도 자른 내시가 유세여.”
“여기다 파묻어 버리고 그냥 모른 척하는 게 싸게 먹히는 거 아냐? 어차피 요즘 여기저기 반란군 빙자한 녹적(綠賊)이 득세해서 난리도 아닌데.”
“그러게. 죽여서 묻어도 누구 짓인지 알 게 뭐야.”
거친 군졸들이 킬킬대며 지껄이는 소리가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내관은 숨도 쉬지 않고 조심히 뒷걸음질을 쳐 무관의 뒤에 붙었다. 최소한 관리이니 그를 지켜줄 거라 생각했던 탓이다.
무관은 그를 돌아보고 씩 웃었다. 그러나 그의 눈 역시 웃고 있지 않아서 내관은 오금이 저려 왔다. 무관의 눈에도 살기가 돌고 있었다. 잠시 이것저것 재보는 듯하던 무관은 잠시 후 고개를 돌려 마을 쪽으로 달려갔다.
곧 천민 부락 전체가 불로 뒤덮였다. 역시 아무리 뒤져도 사람은 머리털 하나 찾을 수 없었다. 기이하게도 정말 몸만 빠져나간 듯 집집마다 생활하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짐 하나 챙긴 흔적이 없었다.
“신기하구만.”
“그 덕에 우리가 건질 건 제법 많아서 좋지만 말이야!”
군졸들이 신나게 마을의 모든 물건들을 모아 가져오기 시작했다. 내관은 마을 주변을 둘러보았다. 뭔가 기묘한 분위기가 마을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이렇듯 깔끔하게 인간들만 사라진 건지 알 수 없었다. 제사장 역시 잔인하고 폭력적인 성정이라 사유를 알 수 없다는 말을 하면 경을 치는 건 자신뿐이다. 내관은 군졸들의 말대로 사람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전부 삼키고 비밀을 지키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