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수의 붉은 달-53화 (53/113)

53화

“무슨 말씀이신지…….”

“그 더러운 천민 부락 말이다. 작고 쓰러져 가는 마을이니 지도상에서 없애버리는 게 깨끗하지 않겠느냐 이 말이지.”

그제야 알아듣고 내관이 마주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성현은 짐짓 엄격한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것은 청소이자 본보기다. 수국의 영토에서 더러운 벌레들을 치우고 왕의 대리인에게 반발했던 집단을 토벌하는 일이지. 알겠느냐?”

“말씀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일을 크게 벌일 것은 없다. 다만 그곳에 여전히 남아 있는 군졸들에게 말을 전해라. 이미 나 역시 떠나오기 전 명을 남겼으니 알아들을 것이다.”

“예!”

“계집의 양어머니를 가장 먼저 처형하고 마을 사람들을 전부 죽여라. 목을 내걸고 마을을 불태우라 일러라.”

내관이 곧 성현의 명을 받고 천민 부락으로 가기 위해 나섰다. 제사장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내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천민 주제에 왕 다음 가는 대귀족인 자신을 멋대로 농락한 자들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성현의 머릿속에서 그것은 정의 실현에 가까웠다.

제사장은 완전히 불타 사라질 천민 부락을 떠올리며 편안히 앉아 차가운 청주를 마셨다. 입맛이 달고 좋았다.

술에 정신을 빼앗겨 그는 그의 방 앞에 있는 연못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시선이 계속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푸르고 긴 머리의 그 여자는, 사실 그녀가 존재를 숨기고자 한다면 인간들은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존재였다. 하지만 샘의 정령은 그리 자신을 숨기지도 않고 연못가에 서서 피식 웃었다.

“하여간 인간들이란.”

신령들이라 하여 인간과 다르지는 않다. 뱀의 일족과 사혈처럼 욕망으로 똘똘 뭉친 신령들도 있었다. 하지만 인간은 대다수가 그랬고, 그 욕망의 범위가 지독히 광범위했다.

“그래서 재미있는 거지만.”

푸른 머리카락에서 습기가 마른 땅에 젖어들었다. 술을 한 잔 두 잔 마시며 취하기 시작한 성현은 그제야 연못가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 누구냐?”

취기가 달아오르긴 했으나 아직 정신은 멀쩡하다. 성현은 벽력처럼 호통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못가에 웬 여인 한 명이 서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제사장이 소리를 지르자 여인은 느리게 걸어왔다. 곡선이 선명한 몸과 얼굴에 띄운 묘한 미소가 어딘지 선정적이라 성현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방 앞까지 다가와 자연스레 창문을 넘어 방에 들어와 섰다. 그제야 여자의 머리가 푸른색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성현은 흠칫 놀랐다. 인간의 머리가 저런 색일 수가 있는가?

“존경하는 제사장님.”

그녀는 아주 얌전하고 요염한 자세로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인간이 아닌 듯한 아름다움에 성현은 잠깐 넋을 잃었다. 그는 위엄을 되찾으려고 애쓰면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너……는 누구인가? 아름다운 여인의 탈을 쓰고 나타나 나를 홀리려 하는 선녀인가?”

나름 점잖게 말하려 하지만 욕망이 묻어나는 말에 청수희는 속으로 웃었다. 그녀는 달콤하게 입가를 올리고 벌꿀 같은 목소리를 냈다.

“선녀라…….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사장님.”

“충분히…… 충분히 선녀만큼 아름답군.”

청수희의 자태에 완전히 홀린 성현은 이제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샘의 정령의 미혹을 이름만 제사장인 탐욕스러운 사내가 이겨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의 눈길을 느끼면서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명하신 것은, 그 치유사의 마을을 말씀하시는 것이었나요?”

“그래! 그렇지. 그 더러운 것들을 내 전부 태워버릴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 화를 내시지 않을까요…….”

“감히 내게 누가! 누가 화를 낸단 말이냐!”

제사장은 아름다운 여인에게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고자 가슴을 내밀고 턱을 치켜 올렸다. 그의 자세에 청수희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 묘한 미소를 띠고 있다가 손가락을 맞부딪쳤다.

서 있던 그 자리에 성현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죽은 것은 아니다. 다만 기절하듯 곯아떨어진 것뿐이었다. 술 역시 물이니 그녀의 의지대로 제사장의 신체를 돌다가 뇌로 올라간 것이다. 청수희는 투덜거렸다.

“아, 재미없어. 역시 뚱땡이 늙은 남자는 어떻게 놀려도 재미가 없단 말이야.”

하지만 그녀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이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그녀가 중간에 나서서 재미있게 즐길 만한 일이 생겼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

백호는 물끄러미 찻잔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맑은 찻물만 들여다보며 이미 기십여 분이 지난 때에 호접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연화가 떠난 이후로 백호는 멍하니 넋을 놓는 일이 많아졌다. 특히 연화의 침실에 앉아 그녀가 즐겨 마시던 차를 앞에 놓고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 많았다. 이제 아예 찻잔 안만 노려보고 있으니 걱정이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었다.

호접은 가만히 백호의 뒤로 다가갔다. 놀라지 않게 조심스럽게 백호를 불러 다른 곳에 신경을 나뉘게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 때 그녀보다 먼저 백호가 입을 열었다.

“호접.”

“……예.”

잠깐 놀라서 나비의 신령은 가슴을 눌렀다. 뒤를 보지 않고 있었지만 이미 알고 계셨구나, 하며 호접은 재빨리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그녀의 팔랑이는 한 쌍의 날개를 바라보다가 백호가 입을 열었다.

“산 아래 마을의 상황은 어떠하냐.”

“……산 아래 마을이라 하심은.”

“연화의 마을 말이다.”

호접은 잠시 말을 잊었다. 연화가 떠날 때 배웅해 줬을 뿐 언제나 그곳으로 다니는 것은 아니라 현재 어떤 상황인지 알 리가 없었다. 그녀가 미처 입을 열기 전에 백호가 말을 이었다.

“마을이 많이 해를 입은 모양이더군.”

“누……구에게 말씀이십니까?”

“중앙의 관리에게.”

호접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자세한 정황을 전혀 듣지 못했고 앞 뒤 이야기를 몰랐다. 그녀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고 백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호접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냥 지나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세한 이야기를 할 시간은 없을 듯하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흰 장포가 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창문에서 바람이 불어들고 있었다.

“현재 수국 중앙 관리가 남기고 간 군졸들에게 관리의 명이 간 모양이다. 마을을 불태우고 모두를 죽이라는 명이.”

“그렇다면 연화 님은요?”

호접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 마을에는 연화는 물론 그녀의 양어머니와 오래 함께 살아온 마을 사람들이 있었다. 백호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어. 다만 연화는 마을을 떠나 수도로 갔고, 현재 마을에는 없다고 한다.”

“누군지 몰라도 인간계의 일을 전해주다니 고마운 일이군요.”

“청수희의 전언이다. 깜찍하게도 찻물을 통해 내게 이야기를 걸어왔어.”

“아, 그래서 백호 님께서 찻잔을…….”

호접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샘의 정령은 모든 세계를 넘나들며 물이 이어진 곳이면 어디든 자유로이 헤치고 다녔다. 그녀라면 어느 곳의 이야기이든 알 수 있을 것이다.

백호는 하지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청수희 이것이 뭔가 가리고 말하지 않는 게 있는 듯하단 말이지.”

백호는 인간계의 일을 상세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인간계의 일이라면 저희가 끼어들 수 없는 노릇이고……. 별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호접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각 세계는 철저히 나누어져 있고 사방신은 서로의 영토를 절대 침범하지 않는다. 만약 침범 시에는 그에 상응하는 충돌이 있게 마련이었다.

과거 사방신들이 서로 싸움을 벌이는 일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때마다 대단히 큰 소란이 일었고 세상이 뒤집혔다. 그 모든 소란과 상처를 지켜보던 상제(上帝)가 결국 대단히 화를 내며 모두에게 경고했다.

그래서 아주 오랜 기간 충돌은 일어나지 않고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다.

“……할 수 없지. 데리고 와야겠다.”

“데, 데리고 오신다고요? 누구를요?”

“누구긴 누구냐. 그 마을의 인간들이지.”

백호는 흘긋 호접을 보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 걸음이 대단히 빨라서 호접은 황급히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인간들을 데려오신다니, 게다가 설마 직접 현신하실 것은 아니시지요?”

“다른 방법이 있느냐?”

“백호 님.”

다른 방법이야 많다. 아니, 찾아보면 많을 것이다. 호접은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죽을 운명인 존재들을 살리는 일이라면, 방법이 있다 해도 쓰면 안 되었다.

“백호 님, 아시지 않습니까. 저승과 연관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죽을 운명인 자들에게 함부로 손을 댔다간…….”

“…….”

호접의 만류에도 백호의 푸른 눈은 단호했다.

어쩌려 저러시는가. 인간계의 일이 진행되는 것은 단순히 인간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마을의 인간들이 죽을 운명이라면 그것은 저승의 명부와 관련된다. 즉 현무와 그 뒤에 있는 염라대왕까지도 상대해야 하는 일이다. 죽음의 운명을 피해가도록 다른 세계의 존재가 손을 쓴다면 분명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되기 마련이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안 됩니다. 이번에 충돌이 일어난다면 정말 큰일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옷자락을 잡은 호접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상제께서 지난번 경고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사방신의 사감(私感)으로 세상에 혼란이 일어난다면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시겠다고요. 죽음의 운명이 예정되어 있는 자들을 전부 신령계에서 손을 대 구해낸다면 문제가 생길 것은 명약관화, 결코 그냥 넘어가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아. 내가 모를 성싶어 길게 늘어놓는 것이냐.”

백호의 눈에 서슬이 시퍼랬다. 평소 호접의 말이라면 그나마 한 수 접고 들어주던 그가 아니었다. 가장 가까운 원로인 그녀의 말마저 이렇다면 그 누가 말해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비켜라, 그렇지 않다면 내 떨쳐내고 가겠다.”

“백호님…….”

호접은 입술을 깨물었다. 백호는 그녀의 주군이자 신령계의 신이다. 만약 상제에게 큰 벌을 받게 된다면 이 세계 자체가 시련을 겪게 된다. 그렇다면 일이 잘못되더라도 차라리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게 나았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백호 님, 그렇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요.”

호접은 그의 옷자락을 놓아주지 않았다. 백호의 시선이 돌아오자 나비의 신령은 고개를 저었다.

“백호 님이 인간계에 현신하시는 일은 드무니 저승의 이목을 끌게 될 겁니다. 물론 청룡 님의 눈도요. 저는 언제나 인간계를 다니고 있으니 제가 가서 그 사태를 막아보겠습니다.”

“…….”

백호는 먼 산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바로 나서기에는 호접의 말이 맞는 면이 많았다. 연화의 이름이 엮여 있어 당연히 그들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문제의 소지가 많은 것도 사실이니.

만약 문제가 생겨 상제의 벌을 받게 된다면 차후의 일도 문제였다. 마을 사람들을 구한다고 해서 다가 아니다.

혹시라도, 혹시라도…….

연화가 마을 사람들을 보기 위해 신령계로 돌아온다면…….

자신이 없는 이곳에서 누가 그녀의 사정을 돌보아 줄 것인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꽉 쥐고 있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손등에 핏줄이 설 정도로 힘주어 쥔 주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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