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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52화 (52/113)

52화

가느다란 꽃잎 같은 여자가 검끝 앞에서도 입을 열어 지껄인다. 그는 흥미로운 기분으로 검날을 연화에게로 돌렸다.

“죄가 있다면 네게 있다라. 어쩌면 맞는 소리인지도 모르지.”

그는 검끝으로 연화의 등을 슬쩍 그었다. 옷자락이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희디흰 등과 목덜미가 그 사이로 드러났다. 보드랍고 깨끗한 피부의 몸을 보다가 만희는 검을 집어넣었다.

그를 향해 엎드려 애원하는 연화의 모습이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그래……. 헛소리이나 널 먹이기 위해 한 소리니 내 용서해 주지.”

은연은 눈을 크게 떴다. 한 번 검을 꺼내면 단 한 번도 피를 보지 않고 넣은 적이 없는 사내다. 연화의 애원을 듣고 만족하여 한 발 물러서는 만희의 모습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만희는 방만한 걸음걸이로 침상 곁의 의자로 가서 앉았다. 그의 손이 은연을 향해 까딱거렸다. 가까이 오라는 뜻이었다.

풀려서 제대로 걷기도 힘든 다리를 옮기며 은연은 그의 곁에 가서 섰다. 만희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엉덩이를 만졌다. 제법 괜찮다는 듯 만지다가 곧 흥미가 식었는지 그녀를 내쳤다.

“흐, 거짓말까지 해가며 먹인 것치고는 정말 새 모이만큼이군.”

쟁반을 들여다보며 한 소리였다. 연화는 급히 손을 내저었다.

“더, 더 먹으려 하였으나 전하께서 행차하시어……. 차후에 반드시 다 먹겠습니다.”

“차후? 무슨 차후. 먹을 거면 지금 먹어라.”

“예?”

연화는 당황했다. 게살죽만으로도 배가 불러 한 입도 더 먹기 힘든 상태였다. 하지만 만희는 진심인 듯 그리 웃음기도 없는 얼굴이었다.

“먹으라고. 네가 식사하는 꼴을 보고 가야겠다. 내 두통 치유를 책임질 치유사이니.”

“…….”

“아니면 여기서 저 계집의 다리를 베어줄까? 거짓을 말했으니 그 말한 바가 사실이 되게 만들어주면 좋아할 테지.”

“아, 아니옵니다.”

은연의 얼굴이 새하얘졌고 연화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그녀는 얼른 젓가락을 집어 들고 야채요리 접시에 손을 댔다.

급한 마음에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하며 연화는 간신히 야채요리 몇 입을 먹었다. 오물거리며 씹는 그녀의 입을 보며 만희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는 거칠 것 없는 손놀림으로 연화의 야채요리를 손으로 집어 몇 입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괜찮군.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애써 씹어 삼키는 연화를 보면서 그는 턱짓으로 더 먹으라고 지시했다. 여전히 만희의 칼끝이 은연에게 닿아 있는 기분이라 연화는 열심히 요리를 먹었다. 거의 다 먹어서 연화가 고통을 느낄 때쯤 만희가 자비롭게 말했다.

“잘 먹는구나. 이 정도로 봐주지. 다음부터 음식을 거부하면 크게 경을 칠 줄 알아라. 너뿐 아니라 이 시녀들이 함께 말이다.”

만희의 말에 시녀들이 고개를 움츠렸다.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절대로.”

왕은 씩 웃었다. 곱게 생긴 계집이 억지로 음식을 먹고 그의 자비를 구하는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내키지 않지만 맛있는 척 입에 넣고 씹어 삼키는 것도 보기 좋았다.

“천한 계집이지만 귀여운 구석이 있단 말이다.”

만희는 뒷짐을 지고 연화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연화의 턱을 손끝으로 잡고 들어올렸다. 자신을 피해 시선을 내리는 검은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는 명했다.

“날 봐라. 눈을 들어.”

잠시 망설이다가 연화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올렸다. 그녀의 검고 순한 눈과 만희의 날카롭게 찢어진 적안이 마주쳤다. 겁이 나서 숨이 멎을 것 같았지만 연화는 참았다. 그의 명을 거스르면 또 누가 다칠지 모른다.

만희의 긴 눈꺼풀 안 새빨간 눈동자가 한동안 뚫어져라 연화를 주시했다. 시선의 마주침이 길어지며 연화는 두려움에 손이 떨려왔다.

“마음에 들어.”

만희는 미소를 짓고 그녀의 턱을 놓아주었다. 곧 그가 밖을 향해 소리쳤다.

“가지고 들어와라!”

그의 명에 따라 시녀 두 명이 들어와 찻상을 마련했다.

풀어 내린 긴 흑발을 귀찮은 듯 넘기면서 만희가 연화를 불러 작은 식탁 건너편 걸상에 앉았다. 그녀에게 앉으라고 손짓했지만 연화가 머뭇거리자 그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뭐지?”

“어찌 저 같은 것이 전하 앞에 함께…….”

“네 예의가 내 명보다 중요하다는 거냐? 건방지고 멍청한 것.”

만희가 싸늘하게 비웃었다. 연화는 그 말에 조심스럽게 걸상을 빼 앉았다. 물론 언제든 일어날 수 있게 거의 엉덩이 끝만 걸친 채였다.

그는 주전자를 기울여 맑은 찻물을 따라내었다. 자신의 앞에는 술병과 술잔을 놓은 채였다.

그곳에 올라온 노란 꽃잎의 꽃차를 보고 연화는 눈을 크게 떴다. 신령계에서 호접이 자주 내주던 차였다.

“이게 뭔가에 좋다고 했는데……. 뭔지는 잊어버렸지만.”

만희는 턱을 긁었다. 그는 머리가 좋았지만 필요 없는 것은 잘 잊어버리기도 했다.

“……잠이 들지 못하는 자가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편안한 잠자리로 유도하는 꽃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향기가 좋고 찻물이 맑아 심신을 평안히 해주지요.”

말끝마다 그리움이 저절로 젖어들었다. 연화는 멀거니 그 푸른 찻잔 안의 찻물을 바라보았다. 백호의 궁 안에서 호접이 다과나 식사를 가져다주던 그 평화롭고 안온한 시간들과 함께…… 언제나 그녀를 너르고 뜨겁게 품어주던 백호가 생각났다. 계속해서 피하려고 애쓰던 그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그래, 내관이 말하길 이게 계집들이 좋아하는 차라더군. 네가 치유사니 내가 호감을 사야 하지 않겠느냐.”

만희가 껄껄 웃었다. 그는 술잔을 들었다.

“네가 사흘 전 두통을 치료해 준 이후 통증이 없어 그나마 살 것 같으니. 그런데 어젯밤부터는 조금씩 머릿속이 당기더군. 조만간 네 힘을 좀 더 빌려야 할 것 같다.”

“제 능력이 닿는 한은 전하께 모든 힘을 다하겠습니다.”

연화는 고개를 숙였다.

“그래, 그래야 예쁜 아이지.”

“…….”

“나는 빼어난 능력을 지닌 미인들을 아주 좋아하거든. 하긴 싫어할 자가 어디 있으랴만.”

말투는 부드럽고 상냥했다. 아주 다정한 사내처럼 말을 잇는 만희는 낯설었고, 연화는 시선을 피해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아무리 순진하다지만 만희의 다정한 태도가 평상시 모습과 다르다는 것쯤은 쉽게 알았다. 지금은 그저 그가 ‘다정하고 싶은 순간’일 뿐이었다.

그녀는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저 잔인하고 폭력적인 사내가 부드러운 태도를 취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희한했다. 언제든 본성으로 돌아갈지 모르는 일이니 방심할 수는 없었다.

시녀가 술을 따랐다. 아주 맑고 투명한 백주(白酒)였다. 만희는 그것을 한 모금 머금고 미간을 찡그렸다. 지독하게 독하디독한 술이라 목구멍이 그대로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두통이 없어서인지 독주가 더 쓰게 느껴지는군. 머리통이 쪼개질 것 같은 때는 이조차 아주 달콤하던데 말이야.”

그는 술잔을 불쑥 연화의 코앞으로 내밀었다. 독하고 쓴 냄새에 그녀가 움찔 놀라 몸을 뒤로 물리자 재미있다는 듯 만희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믿어지느냐, 이게 달콤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저는…… 사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아무렴, 당연히 그렇지.”

입 안과 목구멍을 홧홧하게 태우는 고통을 참고 만희는 백주를 기어이 한 잔 전부 삼켰다. 자신도 모르게 큭 하는 소리가 나왔다. 그는 잔을 뒤집어 마지막 남은 방울을 떨구면서 중얼거렸다.

“머리통을 누군가 날카로운 바늘과 칼로 전부 쪼개고 쑤시는 순간에는, 목구멍과 입 안으로 고통이 가해져 신경을 분산시킬 수 있는 이 술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삼키는 순간 기도가 타는 그 때가 가장 달콤한 휴식이지.”

“…….”

“두개골 안쪽이 전부 한 점 한 점 떠내지는 것 같다. 두통이 심할 때는 말이다.”

만희는 식탁 위에 턱을 괴었다. 그는 맑은 머릿속 때문에 드물게도 기분이 좋았다.

“어때, 치유사로서 이만하면 나는 정말 동정심과 연민이 드는 환자지?”

“제가 어찌 감히 전하께.”

왕은 킬킬대고 웃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연화의 눈 한편에 연민이 스치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는 눈치가 빠르고 날카로운 인물이었다. 그리고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치유사여.”

“제 능력이 허락하는 한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이름이…… 연화라 하였던가?”

“예.”

그가 왕족이 아닌 여인의 이름을 외운 것은 실로 드문 일이었다. 만희는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외워져 있던 연화의 이름에 조금 놀랐다. 그는 잠시 연화, 연화라 하며 입 안에서 그녀의 이름을 굴렸다.

“연꽃의 이름을 가지고 태어난 여자라. 어울리는구나.”

연화가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만희는 그 순간 희례연의 옛 이야기를 떠올렸다. 연꽃이 희례연에 떠오르는 순간, 수국의 왕조가 바뀐다는 전설.

백주가 독했는가. 평소에는 생각하지도 않는 하잘것없는 옛날이야기를 떠올리다니. 왕은 어처구니가 없어 쓴 웃음을 지었다.

***

“치유사를 데려온 건 매우 성공적이야.”

제사장 성현은 자신의 집 방 안을 걸어다니며 손바닥을 비볐다. 그의 육중한 몸이 화려한 비단옷 아래서 출렁거렸다.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치유사를 데려왔다 하여 왕은 제사장에게 금은보화 한 상자와 비단을 내렸다. 곁에 선 내관이 굽신거렸다.

“그 여자가 그리도 신통하게 전하의 두통을 치료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겉모습만 봐서는 그저 예쁘장한 천것일 뿐이었는데요.”

“그래, 정말 사람 일은 모르는 것 아니겠느냐. 나도 놀랐지.”

제사장은 뒷짐을 지고 히죽 웃었다.

“죄인의 마차에서는 마치 개처럼 죽을 핥아먹던 계집이 말이야.”

“개처럼 핥아먹었다면…….”

“팔다리를 모두 묶고 죽그릇을 덜렁 던져 줬으니 제가 별수가 있을까! 천한 것이 배고픔을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지. 그것들은 인내나 참을성과는 관계가 없는 짐승들이니 말이야.”

성현은 연화가 죄인의 마차 안에서 죽그릇을 핥아먹던 일을 자신이 아는 모든 단어를 동원해 더럽고 상세하게 묘사했다. 그를 곤란하게 만들며 도망 다니던 천민의 여자에게 모욕을 주었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기분이 좋았다. 할 수 있다면 팔다리를 자르거나 죽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제 그럴 수는 없었다. 그 천것이 왕에게 필요한 치유사가 되었으니 말이다.

“거참, 더러운 계집이군요.”

“그렇다마다. 전하께서도 그 계집의 다리를 자르고 가둬두는 방안을 고려하시는 게 나을 게야. 어차피 손과 머리만 있으면 치유사 노릇하는 데 문제없을 게 아닌가!”

끔찍한 소리를 하며 성현은 투덜거렸다. 그리고 모든 일이 잘 끝났다지만 그에게는 아직 남은 일이 한 가지 있었다.

“하지만 말이야, 내 원한도 잊고 넘어갈 수는 없지. 사소한 것도 그냥 지나치면 나중에 얕보이게 되는 원인이 된단 말이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내관이 슬쩍 제사장의 눈치를 보았다. 성현은 킬킬댔다.

“내 비록 그 계집을 해할 수야 없지만 그 외의 것이야 상관없지. 안 그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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