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금수의 왕인 백호가 인간의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었고, 연화가 떠날 수 있다면 상황이 어떻든 그는 괘념치 않았다.
‘미안하지만, 연화 님.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는 속으로 사과했다. 지나고 보니 그녀는 꽤 얌전하고 괜찮은 사람이었다. 내려갈 때도 별다른 소동 없이 아주 조용히 사라졌고, 입이 무거워 호접에게도 별말 하지 않았고.
호접은 갑자기 조용해진 묘우를 수상하게 바라보았다. 여우의 신령은 본래 그리 과묵한 타입이 아니다. 특히 친우인 호접과 함께일 때면 더욱 그랬다. 그는 항상 발랄하게 수다 떠는 것을 즐기고는 했는데, 조용해질 때는 대부분 뭔가 꿍꿍이속이 있을 때였다.
“너 뭔가 아는 것이 있는 게냐?”
“뭘?”
묘우가 시침을 뗐다. 하지만 호접의 눈은 꽤 날카로웠다. 워낙 오랜 세월 함께 동고동락한 친우이기에 더 그랬다.
‘이 녀석,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그녀는 수상쩍은 눈으로 묘우를 훑어보았다. 여우의 신령은 잊고 온 물건이 생각났다며 황급히 호접의 시선 안에서 빠져나갔다. 그 역시 자신의 친우가 대단히 날카롭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
“괜찮아. 견딜 수 있어.”
연화는 중얼거렸다. 몇 번째 중얼거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침상 위에 쪼그리고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사이 더 마른 연화의 몸은 마치 가냘픈 새처럼 작게 접혀져 거대한 침상 위에서 더 작아 보였다.
알현실에서 왕을 치료한 후 끌려온 이 방에는 자그마한 창문뿐, 거의 사방이 막힌 형태였다. 다만 지독할 정도로 화려하게 치장된 방이기는 했다.
붉은 깔개가 바닥을 덮었고 천장은 온통 섬세한 무늬의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보라색의 천개가 침상의 천장과 옆을 가리며 아래로 늘어졌고, 그 곁으로 꽃병이 놓여 있었다.
그 꽃은 매일 바뀌어 연화는 그것으로 날이 지나가는 것을 알았다. 오늘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방 한편으로 장미석과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욕탕이 있었다. 탕에는 맑은 물이 항시 가득 차서 그 위에 장미꽃잎이 띄워져 있었다. 백호의 궁에 있던 것만큼 크지는 않았으나 호사스럽기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 방에 있는 모든 것들이 대체적으로 그랬다. 백호의 궁은 너르고 소박하고 자연스러웠으나 이곳 수국의 왕궁은 지독하게 화려하고 장식적이고 인위적이었다. 깔개와 천개와 벽을 수놓은 장식과 자수는 자세히 보고 있으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주 귀하신 치유사이니 고이 모셔라. 상처 하나라도 나면 경을 칠 줄 알아라.’
왕의 한마디에 그녀의 거처가 여기로 정해진 것이다. 대체 이곳이 넓은 구중궁궐의 어디쯤인지 연화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식사를 가지고 왔습니다.”
시녀 두 명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고소한 냄새가 나는 음식 쟁반을 받쳐 들고 있었다.
연화는 차마 눈을 들어 그들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둘 중 한 명이 침방시녀 은연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눈앞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만희에게 모든 것을 내놓고 능욕당하던 그 시녀.
은연은 천천히 다가와 연화의 앞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은으로 만든 빛나는 쟁반 위에 도자기 그릇들이 희게 반짝였다. 게살로 만든 연한 죽과 당면과 갖은 야채를 볶아 만든 따끈한 채(菜)요리, 흰 쌀밥과 간장과 설탕으로 달고 짜게 요리한 고기볶음 등 다양한 음식이 올라와 있었다. 연화 혼자 먹기에는 양이 지나치게 많았다.
“치유사님, 드시지요.”
은연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연화는 느리게 고개를 들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흑발을 구름처럼 틀어 올려 금으로 장식한, 눈이 기름하고 뺨이 흰 은연은 과연 대단히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곳에 오신 지 벌써 사흘째, 거의 음식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대로면 기운이 빠져 눕게 되실 겁니다.”
은연의 목소리가 차갑다. 하지만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입맛이 없군요. 그리 먹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는 음식을 물리고자 했다. 입안이 까끌거려서 도무지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두고 온 양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고초를 당하고 있지는 않을지, 백호가 혹시라도 그녀를 괘씸하다 여기지 않을지. 마음을 어지럽히는 생각이 너무 많았다.
특별히 죽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버텨야 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다만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쳐 마지막 기력까지도 전부 소진한 기분이었다.
음식을 거부하는 연화를 보다가 은연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드셔야 합니다.”
“…….”
시녀의 눈빛은 냉랭했다. 그녀는 그릇의 뚜껑들을 모두 열었다. 함께 온 다른 시녀가 뚜껑과 아침식사 쟁반을 치웠다. 물론 음식은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이대로라면 전하의 치유도 못 하실 겁니다. 제대로 드셔야 숨이 붙어 있을 거예요.”
“아주 먹지 않겠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지금은…….”
연화의 대답에 은연의 눈빛이 돌연 사납게 바뀌었다.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연화를 쏘아보았다. 침상에 앉은 채 연화는 은연을 외면했다.
은연을 보면 자꾸만 광기에 차 있던 만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손과 육체로 은연을 능욕했지만 눈과 말로는 자신을 범하던 남자.
생각만으로도 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 일을 당한 당사자인 은연 앞에서 할 생각은 아니었으나 도무지 신경이 진정되지 않았다.
은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르시겠지만, 치유사님께서 드시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들릴 때마다 저희 시녀 중 한 명의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있답니다.”
“……뭐라구요?”
연화는 충격을 받아서 눈을 크게 떴다. 고개를 들어 은연을 보자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제도 한 아이의 오른팔이 잘렸지요. 오늘은 저 아이의 차례랍니다. 오늘도 빈 그릇을 가지고 나온다면 다리를 자르겠다고, 전하께서 호언하셨습니다.”
은연의 손가락은 다른 시녀를 가리켰다. 몸집이 작고 어려 보이는 그녀는 두려움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낯색이 창백했다. 연화는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런……. 어째서.”
“어째서일까요,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은연은 짤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만희의 마음을 대체 그 누가 알겠는가. 왕은 지극히 변덕이 심하고 괴팍하며 잔인한 사내였다. 은연 역시 왕의 곁에 서면 호랑이 앞의 토끼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지 않던가.
그저께와 어제 시녀의 팔다리를 벤 것도 사실 무엇 때문인지 은연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연화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말을 만들어낸 것뿐이었다.
‘사실, 음식이 그대로인 쟁반을 보자마자 벤 것이니 사실이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하지.’
은연은 차가운 눈으로 침상 위의 연화를 내려다보았다. 이 연약한 꽃은 왕의 손아귀에서 금세 바스라져 버릴 것이다. 금세 져 버릴 꽃을 위해 시녀들이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특히 자신이 당했던 능욕을 생각하면 속에서 열불이 들끓었다. 연화가 아니었더라도 언제든 당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은연의 머릿속에서 그런 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연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왕이 왜 자신이 밥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에 대해 그리도 관심을 둔단 말인가. 두통의 치료 때문에?
‘그래……. 치유사는 구하기 힘들겠지.’
치유의 이능은 거의 사라진 재능이다. 게다가 왕의 두통에는 어떤 약도 효과가 없을 것이다. 원혼들이 달라붙어 그의 생기를 뜯어먹으며 저승으로 끌고 가고자 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고통이니까. 자신도 치유의 힘으로 만희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약사여래의 빛에 원혼들이 잠시간 지정되는 것일 뿐.
연화는 입술을 물어뜯었다. 만약 지금 먹지 않는다면 저 시녀가 다리를 잘린다. 단순한 협박일 수도 있지만 만희의 성정을 본다면 협박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알현실에서 은연을 능욕하던 그는 마치 미친 사람 같았다.
연화는 숟가락을 들고 죽을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빈속에 들어가는 음식이라 토기가 올라왔지만 꾹 참아냈다.
그래, 죽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끌려오는 죄인의 마차 안에서 개처럼 엎어져서도 죽을 먹었던 그녀다. 이제 와서 약한 소리를 하는 것도 이상했다.
게살죽은 고소하고 간은 밍밍했다. 넘어가지 않는 혀를 움직여서 죽 한 그릇을 다 비워내고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조용히 서서 그녀를 기다리던 은연이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군요, 저 아이의 다리가 오늘은 무사할 듯하니.”
억지로 삼킨 죽 때문에 체할 것 같았지만 연화는 웃으려고 노력했다. 대체 힘없는 아랫사람들에게 왕은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속이 불편했지만 그녀는 야채요리에 손을 대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앞으로는 다 먹을 테니 염려하지 마세요.”
“……그래요.”
음식의 양이 많다. 하지만 연화는 그걸 조금씩이라도 먹기 위해 젓가락을 놀렸다.
“뭐냐, 오늘은 입에 음식을 댄 거냐?”
그 때 예상치 않은 목소리가 문 쪽에서 들려왔다. 연화는 흠칫 놀라서 목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가장 두려운 얼굴의 남자가 문간에 기대 서 있었다.
“흠, 어제와 그제, 음식을 전혀 먹지 않았다기에 와서 보았더니.”
문간이 거의 가려질 정도로 덩치가 큰 왕은 싸늘한 눈으로 방 안을 훑어보았다. 당황한 시녀 두 명이 뒤로 물러섰다. 연화도 극히 당황해 침상에서 내려와 바닥에 섰다.
시녀들과 마찬가지로 무릎을 굽히며 인사한 연화를 보며 만희는 피식 웃었다.
“그나마 이제 먹을 생각이 든 건가? 내가 시녀를 벤다고 하니?”
은연의 눈이 흔들렸다. 그것은 그녀가 정확히 알고 한 말은 아니었다. 왕은 아마도 꽤나 전부터 밖에서 엿들은 모양이었다. 자신의 거짓말을 직접 말하는 만희를 보며 은연이 손을 떨었다. 만희가 피식 웃었다.
“비록 승은을 입었다 하나, 내가 확실히 말하지도 않은 바를 함부로 전하는 시녀라.”
“용서를, 전하…….”
은연은 그 자리에 꿇어앉았다. 영문을 모르는 연화는 눈을 크게 떴다.
만희의 얼굴은 감정을 읽기 어려웠다. 웃고 있으나 반드시 웃음은 아니다. 그는 허리춤에서 검을 빼 들었다.
“내 비록 그제와 어제 시녀를 베었다 하나 이 여자가 식사를 하지 않아서라고 말하지는 않았지.”
“용서를, 용서를. 전하, 저는 그저 치유사님께서 식사를 하지 않으시면 전하의 두통 치료를 하지 못하시게 될까 두려워…….”
“주제넘구나, 만인 앞에 다리를 벌리는 침방시녀 주제에.”
만희가 검을 들어 은연의 어깨 쪽을 슬그머니 그었다. 옷 위로 그어지는 날카로운 검날에 어깨장식이 툭 떨어졌다. 옷이 찢어져 드러난 맨 어깨로 검끝을 따라 가느다란 상처가 생겨나 피를 흘렸다. 은연은 두려움에 떨며 엎드렸다.
“제발, 제발 용서를. 제발…….”
“너 같은 것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내가? 천한 것의 말소리가 귀를 더럽혀 심간이 어지럽구나.”
그 말에 은연은 더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전하, 용서하소서.”
연화가 만희의 발치에 엎드렸다. 그녀는 이마를 땅에 대고 애원했다.
“제 건강을 걱정하여 음식물을 먹게 하기 위해 한 거짓말입니다. 죄가 있다면 제게 있으니 부디 용서를 해주십시오.”
“…….”
왕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