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백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거칠 것 없이 맑게 갠 하늘이었다. 바람이 좋구나, 하며 그는 시녀들이 가져다 놓은 꽃차를 들어 한 모금을 넘겼다.
향기로우나 그 향기가 폐부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마치 가슴 밑바닥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허전했다.
“이것도 연화가 잘 마시던 차였지.”
그는 물끄러미 잔을 내려다보았다. 맑고 투명한 꽃차는 연화와 닮아 있었다. 백호는 한숨을 쉬며 등을 나무기둥에 기댔다.
“어처구니가 없군. 그 아이 하나가 없어졌다고 이리도 허전할 줄이야.”
바람이 불어 그의 백발을 날렸다. 백호는 푸른 눈을 가늘게 떠서 천리안의 힘을 끌어냈다. 원로들이 본다면 또 사감을 섞어 천리안을 쓴다며 난리가 나겠지만, 혼자 있으니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시야가 아주 흐릿하게 그의 앞에 펼쳐졌다.
연화는 지금 다른 계로 건너갔다. 사방신의 힘은 자신의 영토 안에서 가장 강하며, 천리안과 같이 공간을 건너 투시하는 힘은 더군다나 신령계를 넘어가기 힘들다. 각 세계를 넘나들며 자유로이 모든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은 샘의 정령인 청수희뿐이다.
희미한 시야에 그는 기둥에 머리를 기댔다. 백호의 날카로운 눈썹과 반듯한 미간이 서서히 찌푸려졌다. 사방신의 힘이 느릿하게 뱃속에서부터 솟아올라 왔다.
본래 천리안은 이렇게까지 많은 집중을 요하지 않았지만 세계의 경계를 넘어 투시하기 위해서는 백호로서도 상당히 힘을 들여야 했다. 그나마도 아주 흐리고 불투명한 흔적만을 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래도…….’
신령계를 다스리는 사방신으로 하면 안 되는 짓이다. 경계가 명확한 영토를 넘어 훔쳐보는 짓은 염탐이나 다를 바 없다. 다른 영토에 존재하는 사방신의 권한을 침범하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래도 보고 싶었다.
그의 주변에서 아지랑이가 희미하게 올라올 정도로 힘이 모여들었다.
‘단지, 연화의 그림자뿐이라도.’
백호의 눈앞에 열린 천리안은 느릿하고 흐리게 움직였다. 인간계로 넘어간 그의 시야는 지독히 흔들렸다.
“연화야.”
백호는 염원을 담아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신의 염원은 강렬했고 그 힘이 시야를 이끌었다. 아주 천천히, 천리안의 앞에 흐린 그림자가 떠올랐다.
연화였다. 얼굴은 거의 보이지 않는데도 연화인 것을 백호는 알 수 있었다. 지독히 어둡고 선명하지 않은 시야라서 거의 형체만 보일 정도였다.
그것만으로도 기뻐서 백호는 더 자세히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혹시라도 고초를 겪는 것은 아닌지, 제대로 잠을 자고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한 게 많았다.
흐릿한 형체는 붉은색의 침상 위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푸르게 빛나는 것을 보니 아마도 넓게 열린 창밖을 보고 있는 것이리라.
그녀는 백호의 궁에서 입던 희거나 엷은 푸른색의 옷과는 달리 아주 짙은 보라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먼 거리 너머로도 그녀를 둘러싼 공간과 걸친 옷이 매우 호사스럽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잘 지내는구나.’
연화는 가난한 천민 부락 출신이다. 저렇듯 화려한 방에, 좋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분명 그녀의 정인에게 몸을 의탁했다는 뜻일 것이다.
배를 곯지 않고 고생을 하지 않고 잘 지낸다는 사실에 일단 백호는 안도했다. 하지만 뒤이어서 곧 씁쓸함과 알 수 없는 슬픔이 울컥 가슴 아래에서 치고 올라왔다.
‘정인에게 갔으니 이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겠구나.’
경계를 넘어선 천리안은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벌써 시야가 뭉개지며 색이 사라져 갔다. 그는 만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손을 내밀어 연화의 형체를 덧그렸다. 아주 먼 곳에 있는, 몸뿐 아니라 마음도 멀어져 버린 여인.
완전히 천리안의 시야가 암전된 뒤 백호는 눈을 깜박였다. 느리게 현재 존재하는 공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주 잠깐 스치듯 지나가 버린 연화의 흐린 모습 따위는 마치 꿈이었던 것 같았다.
이렇듯 세상의 규칙마저 어기며 무리를 해서 천리안을 발동시켰으니 아마 한동안은 다시 그 힘을 쓰기 힘들 것이다.
그는 슬픈 기분으로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맑은 찻물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요했다.
‘가슴이 아프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나.’
백호는 수없이 많은 책을 읽었고 수없이 많은 지식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많은 이야기책들 속의 연인들의 이야기를 가슴으로 느껴본 적은 없었다.
가슴이 아프다, 그립다, 마음이 텅 비었다는 감각 따위는 사방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감정을 느끼기 전에 그리움의 대상은 이미 그의 앞에 대령해 있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 백호는 이야기책과 역사책 속의 감정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곳이 저리는 것 같다.’
그는 천천히 심장 부근을 어루만졌다. 알싸하게 퍼지는 고통은 분명 육체가 느끼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감정의 파도는 마치 육체적인 통증처럼 실체를 가지고 심장을 두드렸다. 갈비뼈 안쪽이 욱신거리며 평소와 다른 통증을 호소했다.
“고통이라.”
얼마 만에 느끼는 것인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금수의 왕은 기억하던 그 순간부터 이 모습이었고, 상제의 손에서 빚어져 태어나 이 땅에 내려서서 모든 신령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때로 같은 사방신들과 충돌을 일으킬 때는 부정적인 감정과 고통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덮쳐 올 때가 있었으나 지금의 감정과는 분명 달랐다.
“연화야.”
쓸모없다는 걸 알면서도 백호는 인간 여인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렀다. 빈 공간 안에 그의 목소리만 덧없이 울렸다. 그럼에도 이름을 통해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 같아서 백호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부드럽게 늘어지던 긴 흑발과 희고 작은 얼굴, 그를 바라보던 검고 둥근 눈동자. 가늘고 부드러운 손이 때로 그에게 다가올 때면 백호는 연화의 손등에 입을 맞추곤 했다.
그가 앉은 방은 연화가 자던 침실이었다. 연화가 간 뒤 그녀가 쓰던 물건을 조금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어 마치 어디선가 그녀가 나올 것 같았다.
이미 연화가 떠난 지 나흘 넘게 지났지만 백호는 매일 이곳에 들어와 차나 술을 들고는 했다. 그의 명대로 주안상을 봐 올 때마다 호접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지만 백호는 그 눈길을 무시했다.
백호는 곁에 가져다 두었던 베갯잇을 바라보았다. 연한 하늘색의 능견으로 만들어 윤기가 흐르는 베갯잇은, 호접이 빨겠다며 가지고 나가는 것을 잡아둔 것이었다. 연화가 며칠간 베고 자던 옷감이다.
그는 그 천을 집어 들어 코 밑에 댔다. 이미 시간이 지나 그녀의 향기가 날아가고 없을 텐데도 마치 그녀의 체취를 맡을 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낱 인간의 여인 아닌가. 대체 왜 이리도.”
보내지 말 것을 그랬나. 백호는 목 안으로 으르렁대는 소리를 냈다. 그 마을 사람들이 죽든 말든, 양어머니가 죽든 말든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녀를 인간계로 보내버렸단 말인가. 그녀가 정인을 그리워해 마음이 아프든 말든, 손 안에 든 작은 새처럼 그저 품속에 가두고 나만 보게 하면 될 것을. 멍청하기는.
코끝에 맴도는 연화의 향기 때문에 그녀가 더 뼈아프게 그리웠다.
“…….”
백호는 코를 베갯잇에 묻고 깊이 숨을 들이켰다. 마치 연화의 피부 같은 보드라운 능견의 감촉이 뺨과 코 주위로 느껴졌다.
그는 허리춤을 풀고 자신의 양물을 꺼냈다. 이미 연화의 흐릿한 체향만으로도 절반쯤 일어선 채 힘을 얻고 있는 남근을 손에 잡고서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그의 큰 손에도 넘치게 큰 물건은 귀두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넓은 손바닥으로 밑둥부터 끝까지 느릿하게 쓸어 올렸다. 자신의 손은 절대 연화와 같지 않았지만 머릿속에서 그녀의 부드럽고 가냘픈 몸이 떠올랐다. 버거워하면서도 기꺼이 백호의 물건을 품어주던 여인의 몸.
연화는 항상 잠자리를 힘겨워했지만 백호를 완전히 몸 안에 받아들였을 때의 눈동자는 희열과 쾌락에 들떠 있었다. 동시에 그녀의 눈에는 백호에 대한 애정 역시 있었다. 그는 분명히 그렇게 믿었다.
만약 그녀에게 마을에 두고 온 정인이 있다 하더라도, 그 순간에만은 연화는 그의 것이었다. 백호의 지나치게 거친 손길과 성정에 두려워하면서도 애써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던 모습.
“연화야.”
탄식과 같은 부름이 새어 나왔다.
그의 손 안에서 양물이 단단해져 갔다. 점점 더 손짓을 빨리 하며 백호는 열기에 들뜬 푸른 눈을 가늘게 떴다. 뜨거워지는 손 안이 마치 연화의 몸 안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손을 움직일수록 더 부족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감각이 모자랐다. 거칠고 커다란 손과 다르게 머릿속에 남은 탄력 있고 매끄러운 육체의 안쪽이 그리웠다. 연화의 몸이 마치 눈앞에 있는 듯 떠올랐다. 좁고 빠듯하고 부드러웠던 그녀. 눈물을 흘리면서 발그레한 피부로 애써 신음을 억누르던. 세상 무엇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여인. 서글프게도 이제 떠나버렸지만 한때는 그의 곁에 있던 소중한 사람.
절정감이 몰려왔다. 그는 굳이 인내하지 않고 뇌리를 침범하는 쾌락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한계까지 굳어졌던 양물이 이윽고 그 끝에서 흰 점액질의 액체를 뿜어냈다.
절정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가느다란 새 같은 인간의 여인이 맴돌았다. 절정을 맞이할 때면 언제나 흐느끼며 백호의 이름을 부르던 그녀.
배까지 튄 액체를 손가락 끝에 묻히고서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정인이 있을 인간 여자에게 이리도 미련이 남다니.”
연화는 달이 가늘어질 때를 기약하고 떠났으나 반드시 돌아온다는 약조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돌아오지 않는다면 다른 여인을 찾아달라는, 아주 매정한 말을 남겼다.
“정말 내게는 마음이 없었던 게냐……. 네 마음을 가진 자가 따로 있었던 게냐.”
절정 뒤의 허탈감 속에서 백호는 한숨처럼 말했다. 공물을 훔쳐냈다고 강탈하듯 그녀를 억압하여 데리고 왔으니 할 말은 없다. 하지만 그녀의 그 보드랍고 따스했던 얼굴과 손이 자꾸만 심장에 남았다.
“보고 싶구나, 연화야.”
그리움과 애정이 밴 목소리였다. 신으로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고통에 시달리며 백호는 눈을 감았다. 앞이 아득할 만큼 연화가 보고 싶었다.
“…….”
다과상을 내가려 왔던 호접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복도에서 그녀는 가만히 서서 생각에 잠겼다. 함께 왔던 묘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호접의 날개가 간헐적으로 파닥였다.
“왜 그러지, 호접?”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묘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묘한 빛을 발했다. 눈치 빠른 여우의 신령을 속이기란 힘든 일이라 호접은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었다.
“백호 님이 생각보다 많이 힘드신 것 같아.”
“백호 님이? 왜…….”
“왜긴, 뻔하지 않으냐. 연화 님 때문이지.”
다 알면서 모른 척하는 묘우를 향해 호접이 눈을 흘겼다. 그녀는 우울해 보이는 백호의 뒷모습이 자꾸만 눈에 남아서 한숨을 쉬었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대체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연화 님이 갑자기 내려가신 걸까.”
“……글쎄다.”
묘우는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으로 연화를 배웅한 것은 호접이었으나 별다른 말을 듣지는 못했던 듯싶었다.
‘내가 굳이 사정을 알릴 필요야 없지.’
연화의 일은 딱하다고 볼 수 있었으나 묘우는 신령계의 일이 먼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