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만희는 헛소리라 치부하겠으나 그녀는 왕의 머리 뒤쪽 희미하게 보이는 검은 그림자들을 보고 두통의 원인을 다시 확인했다. 저승의 주민이 되는 것을 거부한, 망자의 혼령들. 이 세상에 지나치게 많은 원과 한을 두고 죽어버린 자들.
“…….”
아무리 연화가 약사여래의 가피를 입었다 하나 저토록 많은 혼령들을 보고 태연할 수는 없었다. 만희와는 다른 의미로 두려웠다.
본래 저승으로 넘어갔어야 하지만 이승에 남아 떠도는 혼령들은 그들의 세상으로 인간을 끌어들이려 한다. 빈틈이 보이면 차가운 갈퀴 같은 손아귀로 끌고 가려 하는 것이다. 마치 일전 연화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마 끝없는 두통 역시 만희를 끌고 가려 하는 시도에서 나오는 것일 테다. 그러나 그는 일국의 왕이니 수국을 가호하는 청룡의 힘이 거기까지는 허용하지 않을 터.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말로 할 수는 없었다.
왕은 폭력적인 성격이라고 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제사장 성현이 발작하듯 그녀에게 왕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냈던 것을 기억했다.
그녀는 왕이 지체 낮은 자들을 베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저 비츤 무어신가…….】
혼령 중 하나가 뭉개진 발음으로 말하며 연화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흐릿한 형체였으나 머리통이 절반쯤 날아간 형태였다.
연화는 차마 똑바로 그를 바라보지 못했다. 이승에 미련이 많은 혼령들은 죽을 때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지금 연화의 눈에 비치는 혼령들의 모습은 희미한데도 대부분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따뜻해…….】
【빛이야, 보살의 빛이야…….】
왕의 뒤에 빽빽하게 자리해 있던 혼령들은 연화에게서 나는 약사여래의 따스한 빛을 보고 주춤거리며 앞으로 다가왔다.
이승과 저승에 걸친 자들에게 한없이 자비로운 것이 약사여래이고, 또한 저승의 주민들에게 한없이 매력적인 것이 그 빛이었다. 저 온기를 잡으면 자신 역시 이승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심어주었기 때문이었다.
혼령들의 희미한 윤곽이 연화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차마 눈을 들지 못했다.
“다 괜찮으니 빨리 해봐라.”
왕은 두통 때문에 이를 악물고 머리를 움켜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곁에 있는 자들을 전부 죽여버리고 싶었다. 눈앞에 있는 이 계집애부터 피를 보면 시원할 것 같았다. 두개골 안쪽에 누군가 칼을 넣고 마구 쑤시며 곤죽을 만드는 듯했다.
연화는 주춤주춤 가까이 다가가 앉아 무례를 무릅쓰고 왕의 머리 양쪽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손에서 아주 은은하게 노란 빛이 흘러나왔다.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실패하면 벌을 받을 것이다. 왕을 능멸한 죄, 죽음을 면치 못할 터.”
그녀의 작은 손이 자신의 관자놀이에 얹히는 것을 느끼며 만희가 으르렁거렸다. 붉은 눈동자는 얼핏 그의 눈에서 핏물이 흐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감히 천민 계집이, 사촌형의 아군이었던 여자의 딸년이 자신의 머리에 그 더러운 손을 댄다는 것이 짜증났다. 하지만 연화는 정신을 집중한 듯 거기에 반응하지 않았다.
‘아니, 성공하든 말든 죽여버릴까.’
자신의 말에 대답하지 않는 연화를 노려보는 만희의 붉은 눈에 살기가 돌았다. 그의 눈앞에 있는 여자는 이상할 정도로 심기를 거슬렀다. 두통은 극심했고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치받쳐 올랐다.
“잠시만, 잠시만…….”
누구에게 말하는 것인지 연화가 작게 속삭였다. 그녀는 조금 더 몸을 기울여 왕에게 가까이 숙였다.
만희의 눈 안에 연화의 작고 부드러운 얼굴이 들어왔다. ‘곱다’라고 만희는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보던 왕은 연화의 양손으로부터 흘러들어 오는 기운에 잠깐 눈을 감았다. 그녀의 손이 닿은 부위로부터 마치 차가운 바람처럼 상쾌한 기운이 흘러들었다.
그 기운이 흐르는 곳마다 통증이 사라지고 정신이 맑아졌다.
“가만히 계십시오……. 가만히.”
치유의 기운을 불어넣으며 연화가 조용히 속삭였다.
치유사로서 그녀는 어느 정도 대상의 고통 정도를 알 수 있었다. 손바닥이 찌릿거리며 따끔거릴 정도였다. 왕의 두통은 생각보다 아주 심했다. 아마 한 번의 치료로는 안 될 테고 몇 번을 더 해야 나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고통을 줄여주는 정도가 다였다.
“아.”
그러나 만희는 자신도 모르게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무슨 짓을 해도 뇌를 휘젓던 고통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그것이 연화의 기운 덕분이라는 걸 그 역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지옥처럼 자신을 괴롭히던 두통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한결 안정된 호흡을 했다. 그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는 기분이었다.
맑고 따스한 그녀의 기운이 뇌를 떠도는 동안 왕의 얼굴은 한결 풀어져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연화는 작게 위로의 말을 속삭였다. 고통이 사라지며 왕의 미간에서 주름이 사라졌다.
“……치유의 이능이 진짜였던 건가.”
믿을 수가 없어서 제사장은 긴장한 채 지팡이를 쥐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왕의 분노하면 그 화를 전부 받아야 하는 내관 이하 시녀와 시종들 역시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능력을 믿지는 않았으되 한 가닥 기대감이 그들의 눈에 어렸다.
손으로는 약사여래의 기운을 흘리며 연화는 마음으로 속삭였다. 왕의 뒤에서 맴돌고 있는 혼령들을 향한 속삭임이었다.
‘이제 모두들 마음을 풀고 원래의 자리로…….’
연화는 혼령들을 위로했다. 완전히 돌려보내는 것은 지금 당장 불가능했지만 일단 그들의 혼란과 분노를 잠재워야 했다.
‘이승의 원한을 잠시나마 잊어주세요.’
그녀의 말에 혼령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연화의 눈에는 확실하게 보이는 형태들. 그들이 다가오자 끔찍한 모습이 더 선명해졌다.
연화는 눈을 감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들의 한을 누군가는 들어줘야 했다. 그래야 잠시라도 그들이 물러날 것이다.
영혼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보살의 품에 있는 자여,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줘.】
【그자는 악마야.】
【내 머리통을 반쪽으로 갈랐어.】
【어린 아들이 불에 타 죽어가는 것을 지켜봤어…….】
원한과 혼란이 뇌리를 맴돌았다. 슬픔, 분노. 그들이 지나온 전쟁과 잔인한 광경들 속을 함께 걷는 것 같아 연화는 어깨를 떨었다.
【못나고 악한 자.】
【지옥에 끌려가게 해야 해, 우리를 도와줘…….】
그녀는 차가운 돌덩이 같은 영혼들의 분노를 견디면서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노란색의 따스한 온기가 혼령들의 가슴을 데웠다.
‘잠시만, 잠시만…….’
뒤로 물러서 주길 바라면서 연화는 그들의 혼 위로 약사여래의 자비를 뿌렸다. 손 안에 온기를 쥔 영혼들이 잠시 만족하며 뒤로 물러갔다.
거의 흐릿해질 만큼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손 안에 있던 왕의 머리통이 천천히 아래위로 흔들렸다.
“……참으로 신묘하군.”
왕의 목소리는 맑아져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서 똑바로 연화를 바라보았다. 만희의 붉은 눈에는 이채가 돌았다. 그녀는 흠칫하며 얼른 손을 떼고 고개를 숙였다.
“정말 두통이 사라졌어.”
그들을 바라보던 제사장과 백관이 탄성을 냈다. 왕의 얼굴은 과연 여태껏 그들이 보던 중 가장 맑았다.
만희는 연화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치유의 이능, 그것이 실존할 줄이야. 머릿속은 마치 비온 뒤 갠 하늘처럼 맑았다. 태어나서 거의 최초로 느끼는 명료한 머릿속이었다.
그는 흥미로운 얼굴로 연화를 훑어보았다. 작고 여린 여자다. 두통이 사라지자 거슬림이 조금 줄어들었다.
“신묘하지 않은가, 그 능력이 말이야.”
“망극하옵니다.”
“아니, 정말로 말이지.”
그는 손가락 끝으로 연화의 턱을 들어올렸다. 여인은 예의 바르게 눈을 내리고 있었다. 이 작고 천한 계집이 왕의 고통을 없앨 수 있다니 참으로 신기하지 않은가.
“제사장이나 의사 따위보다 훨씬 효과가 좋아. 정말 약사여래의 가피를 입은 건가.”
하하하. 그가 유쾌하게 웃었다. 곁에서 제사장 성현이 몸을 움찔 했지만 왕의 안중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직 연화에게만 있었다.
“대체 어떻게 두통을 가라앉힌 게지? 아주 머리가 맑아.”
왕은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저어보았다. 그냥도 머리가 깨질 것 같았던 통증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말해 봐라. 어떻게 한 게냐?”
연화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저 약사여래의 가호를 나누어드렸을 뿐입니다.”
“거 참 신묘하군! 약사여래의 가호라.”
만희는 웃음을 거두지 못했다.
연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차마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당신의 뒤에, 머리에, 혼백들이 달라붙어 있다. 당신이 죽인 수많은 영혼들과 원한이. 그들이 내게 말을 걸어, 나는 잠시의 온기를 나누어줬을 뿐이다. 당신의 목숨을 대신해서.
언제고 두통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식은땀이 나서 연화는 입을 다물었다. 이건 정말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밤이 되면 다시 원혼들이 만희를 찾아와 그의 피와 뇌수를 빨아먹으려 달려들 것이다. 그건 절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쓸 만하군. 눈을 들어라."
처녀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었다. 드러난 그녀의 눈에 왕은 잠시 말없이 시선을 보냈다.
검고 둥글고 순한 눈이다. 아까는 두통 때문에 정신이 흐려 미처 알아채지 못했으나 제법 미색이었다.
희고 맑은 얼굴. 마치 작은 들꽃 같은 여인이었다. 소박하지만 곱게 입은 연한 녹색의 옷과 잘 어울리는 작고 여린 미인.
사흘간 먹지도 씻지도 못해 더럽고 초췌했으나 본연의 미모가 가려지지는 않았다.
“예쁜 아이로군.”
만희의 눈은 아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관심으로 변해 번득였다.
“치유의 이능이 있고 심지어 미인이기까지 해. 참으로 괜찮은 여인이로다.”
연화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왕의 눈에는 뱀처럼 감정이 없었으나 본능은 있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탐욕에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려 했다.
“이리 가까이 와봐라.”
“뭘 하는 게냐, 왕께서 부르시지 않느냐.”
곁에서 내관이 그녀의 등을 밀어 왕의 앞으로 대령했다. 연화는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연화의 작은 얼굴을 만희는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었다. 오는 동안 뒤집어쓴 길 먼지로 더러웠지만 그 밑의 피부는 희고 부드럽다.
왕은 자신의 한 손에 감싸이는 여인의 뺨을 잡고 잠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남자 경험이 있나?”
“예?”
“다리를 많이 벌려봤냐는 말이다.”
갑작스러운 말에 연화가 눈을 크게 떴다.
금수의 붉은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