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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44화 (44/113)

44화

양어머니는 마지막 수단이라 생각하여 죽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행이라고 안도하기에는 눈앞의 남자가 너무 처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연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 집은 그저께 당했단다.”

남자는 다시 엉엉 소리 내서 울기 시작했다.

“그놈들의 손에 딸아이가 죽었다. 이제 나는 어찌 살아야 하는 거냐…….”

“세상에.”

이웃집에는 중년의 부부와 과년한 딸이 살았다. 남편은 간혹 장작이 모자란 연화의 집에 마른 나무를 가져다주었다. 아내는 후덕하고 음식 솜씨가 좋아 양어머니에게 맛 좋은 장아찌를 나눠주곤 했고 딸은 연화와도 사이가 좋은 자매처럼 지냈다.

그런 그들의 딸이 죽었다고 한다.

“대체, 대체 왜…….”

연화는 입을 가렸다. 잠시 신령계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이렇게 처참한 현실을 마주해야 하는 것인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꾸만 깨문 연화의 입술에 피가 맺혔다. 그녀가 남자의 눈물을 닦아주려 손을 내밀었지만 그가 연화의 손을 내쳤다.

“너 때문, 너 때문 아니냐……. 내 아이가 죽은 건.”

“……죄송해요, 죄송해요. 아저씨.”

남자는 한동안 소리 내어 울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때로 가슴이 막힌 것처럼 심장 부위를 퍽퍽 치다가 다시 울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연화는 고개를 숙이고 그의 곁에 앉아 있었다.

“……연화 네가 무슨 잘못이겠느냐, 그래. 알고는 있다…….”

이윽고 남자는 울던 끝에 다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슬픔과 분노가 응어리진 소리였다.

“불을 지르고 그 연약한 살에 칼을 찌른 것은 중앙 관리와 병사들이지. 암, 알고는 있다. 하지만 정말…… 슬퍼서 견딜 수가 없구나.”

“아저씨…….”

“정말 하늘이 노해 벼락을 내릴 것들이 아니냐. 그 아이가 대체 무엇을 잘못했다고, 집을 태우는 것도 모자라 그리도 처참하게 죽인단 말이냐.”

남자는 분노가 서린 한숨을 토해 냈다. 그는 너무 오래 울어 이제 눈물이 더 나오지도 않는 뜨거운 눈을 두 손으로 눌렀다.

연화는 손을 벌벌 떨면서 다시 손을 내밀어 남자를 끌어안았다. 그는 눈을 벅벅 거칠게 비볐다. 한동안 말을 잃고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던 남자는 다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너라도, 너라도 도망가거라.”

이웃집 남자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연화의 등을 두드렸다. 남자는 평소에도 인심 좋고 다정한 사내였다.

“관리들이 조금 있으면 순찰을 나올 게야. 발각당하기 전에 빨리 떠나렴.”

“그럴 수는 없어요, 아저씨.”

“괜히 나설 이유는 없다. 너라도 살아야지. 피도 눈물도 없는 놈들이야.”

“제가 가지 않으면 더 잔인해질 거예요.”

“네가 간다고 해서 덜 잔인해지지도 않을 것이다.”

남자는 확고하게 말했다.

그는 며칠 동안 유린당하는 마을의 참상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중앙 관리의 군졸들은 망설이지 않고 마을 사람들을 베었다. 남자든 여자든 어린이든 늙은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마치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낄낄대며 사냥하듯 사람을 잡는 장면을 보고 남자는 자리에 주저앉아 오줌을 쌌다. 그를 보고 군졸들이 비웃으며 지나갔다. 못생긴 중년 남자, 더러운 겁쟁이의 피를 검에 묻히기 싫다는 것이 이유였다.

“제사장 성현이라는 자는 네가 간다고 해도 마을을 그냥 두지 않을 거야.”

“…….”

“이미 네가 없어서 약이 오를 대로 올랐다.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 마을에 해꼬지를 할 게야.”

불을 지르고 사람도 죽였다. 중앙의 관리는 잔인했고 하나밖에 없는 협소한 입구를 막아선 병사들이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달아날 구석 같은 건 없었다.

그 때 퍼뜩 생각이 나서 남자는 의아한 눈으로 연화를 보았다.

“주변은 전부 그놈들이 포위하고 있을 텐데 대체 어찌 마을에 들어온 게냐? 입구가 막혀 있는데.”

“숲으로…… 숲으로 왔어요.”

“숲? 그쪽은 절벽이 아니냐.”

“어찌…… 운이 좋게 그리 되었어요. 제가 머물던 곳과 통하는 길도 있어서.”

“그래. 어떻게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행이다. 그렇다면 빠져나갈 수도 있겠지? 얼른 가거라.”

“그건…….”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호접의 안내로 숲까지 도달했으나 그와 동시에 돌아가는 길은 사라졌다. 각 세계를 넘나드는 길은 나비만이 찾아 흘러들어 갈 수 있었다. 그녀의 안내 없이는 어지간한 신령들도 함부로 다른 계로 접근하지 못했다. 인간인 연화야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리고 갈 수 있더라도 가지 않을 것이다.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중앙의 관리들은 관아에 있지요?”

“알아서 무엇 하게? 빨리 도망가라니까.”

그러다 남자는 문득 생각난 듯 말을 덧붙였다.

“참, 너희 집 골목 맨 끝자락에 있는 우물에서 언젠가부터 신묘한 물이 솟더구나.”

“신묘한 물…….”

“가벼운 상처가 낫고 기력이 나는 물이다. 마을 사람들이 덕을 많이 보았어. 가는 길에 꼭 한 번 담그고 도망가거라.”

청수희가 보낸 샘물일 것이다. 그녀가 치유의 물을 보내겠다 약속했던 것을 기억한 연화는 감사한 마음을 품었다.

“이토록 힘든 시기에 신령이 내려준 듯한 신묘한 샘물이 나타나 너무도 다행이었단다. 거기서 도움을 받은 마을 사람들이 아주 많았어.”

남자는 희미한 웃음을 띠었다.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정말이에요. ……정말 신령께서 보살펴주셨나 봐요.”

샘의 정령은 약속을 지켰다. 그나마 한 가닥 근심이 연화의 마음속에서 걷혔다. 마을의 유일한 치유사인 그녀가 수도로 가더라도 마을 사람들은 무사할 것이다. 굳세게 버텨내면 마을의 재건도 머지않으리라.

“감사했어요, 아저씨.”

일어서며 연화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비록 연약한 여인의 몸이었지만 자신 때문에 희생당하는 자들을 뒤에 두고 제 한 몸의 안위만을 위할 만큼 비겁하지 않았다. 남자는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연화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간다면…… 수도로 떠난다면, 마을의 남은 사람들이라도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지 몰라요.”

“……연화야.”

“갈게요, 아저씨.”

연화는 남자의 손을 한 번 맞잡았다가 놓았다. 그녀의 눈가가 붉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잘한 생채기들이 이곳저곳에 나 있었다.

“저희 집 골목 끝자락에 있는 우물……. 꼭 잘 사용해 주세요. 정말로 치유의 효능이 있는 물이니.”

“그게 무슨 말이냐……?”

뭔가 아는 듯 말하는 연화의 말투에 남자가 의아한 듯 물었다. 연화는 대답 대신 그저 한숨을 쉬었다. 평생 정붙여 왔던 이 마을을 떠난다는 사실이 새삼 가슴을 치고 갔다.

“……제가 없어도 저 대신, 그 우물이 마을분들께 도움이 될 거예요. 어쩌면 저보다 더.”

“…….”

이웃집 남자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리에 주저앉은 채 멀거니 멀어지는 연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가늘고 연약한 모습은 흔들림 없이 꼿꼿하게 관아로 향했다.

‘어머니께서는 그래도 무사하시겠구나.’

걸음을 옮기면서 연화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다치거나 죽은 다른 이들에게는 어떻게 해도 갚지 못할 죄를 지었다.

양어머니의 안위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죽은 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에 돌이 얹힌 것 같았다. 모두가 아주 오래 전부터 함께 웃고 이야기하며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

슬픔과 죄책감에 연화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눈물이 차올랐지만 흘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미 죽고 다친 이들을 애도하고 그들에게 사죄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러니 가야지.”

죄책감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녀가 남은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찾아야 했다.

‘나만 가면…… 어머니와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연화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관아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군졸 몇 명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손에 위협적으로 든 창이 푸르게 빛났다. 이번엔 누구를 죽일지 놀 거리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

마을에서 못 보던 여자의 모습에 그들은 눈을 찌푸렸다. 연화는 그들을 피하지 않고 곧장 다가갔다. 겁도 없이 자신들에게 일직선으로 걸어오는 여자를 보고 군졸 한명이 다가와 그녀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누구냐.”

연화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마 이 사람은 윗사람의 명을 받들어 이 먼 타지까지 와서 험한 일을 하는 중일 게다. 자신의 의지는 아마도 아니겠지.

하지만 그의 손가락과 창날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마을 사람들을 죽인 손은 이자들의 것이다.

이런 참변의 죄가 대체 자신에게 있는지, 아니면 직접 사람들을 죽이고 집을 불태운 이자들에게 있는지 연화는 궁금해졌다.

군졸은 씹던 잎담배를 뱉어버리고 인상을 썼다. 냄새가 고약했다.

“누구냐고 물었다.”

낯모를 여자는 맑고 투명한 눈을 하고 있었다. 행색도 깨끗하고 부드러운 비단옷을 입고 있어 지체가 높은 여인처럼 보였다. 적어도 이 천민 부락에 있을 만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수상했다.

연화는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속일 생각도 달아날 생각도 없었다.

“나는 당신들이 찾던 사람입니다.”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손은 떨리고 있었다. 군졸들의 눈이 커졌다.

“그……렇다면 네가 바로 그 약사여래의…….”

“맞습니다.”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들의 손이 앞다투어 그녀의 팔을 결박했다. 굳이 이러지 않아도 도망갈 수도 없는데 쓸데없는 수고였다.

여인은 고개를 떨구고 군졸들이 미는 대로 관아의 마당으로 들어섰다.

먼저 달려가 알린 한 사내 덕분에 곧 제사장 성현이 뛰쳐나왔다.

성현은 마루에 서서 마당을 보았다. 굵은 모래가 깔린 거친 마당 위에 가느다란 여인 한 명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었다. 성현은 기쁨과 노여움이 반반씩 섞인 소리를 질렀다.

“네년! 죄인의 몸이면서 대체 어디에 몸을 숨겼던 것이냐!”

제사장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천민 주제에 그를 그토록 애먹인 여인을 보면서 그는 분노를 터뜨렸다. 감히, 왕께서 부르시어 수국 전체의 대(大)제사장이나 되는 자신이 찾으러 왔는데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니. 제사장에 오른 이후 왕을 제외하면 그를 난처하게 만든 자는 여태까지 없었다.

“더러운 천민 계집!”

성현은 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마음 같아서는 매질을 하고 당장 죽여 없애도 시원치 않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왕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사여래의 가호니 뭐니 어차피 거짓일 게 분명하니, 만희가 분노해 계집을 내친 이후 벌을 내리면 되는 일이다. 아니면 만희가 자신은 생각도 못 한 험한 벌을 내릴지도 모를 노릇이고.

“나리, 제 잘못을 뉘우치고 있사오니 제발 저의 어머니만은 풀어주시길 간곡히 청하나이다.”

연화는 바닥에 엎드려 제사장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금수의 붉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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