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수의 붉은 달-43화 (43/113)

43화

“백호 님.”

연화의 목소리는 울음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서 백호의 앞에 엎드렸다.

“저는 인간이니, 마음이 변덕스럽습니다. 가능하다면 달이 가늘어지는 이번 달 말일까지 돌아오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새 반려를 찾아주셔요.”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입니다. 저는 인간의 여인. 한 달이 되어가니 벌써 인간계가 그리워서 몸이 아플 지경이어요. 양어머니께 내려가 그곳에서 살고자 한다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백호는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분명 연화가 자신만큼 깊이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지만 인간 여인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말을 잃고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묘우의 말이 맞았던 것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네게 다른 정인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말이 뾰족하게 나갔다. 연화는 엎드린 그대로 어깨를 움찔했다. 백호는 그녀의 반응을 보고 입술을 물었다. 차마 그 이상을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을의 소식은 대체 누가 전해준 게지?”

그는 말을 돌렸다. 아마도 위협받고 있는 그 마을 사람들 중 연화가 사랑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백호의 말은 분노를 참고 있었다. 감히 누가, 홍진의 때 묻은 소식을 연화에게 알렸단 말인가. 그것이 비록 마을의 소식이라도 말이다.

연화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그저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부디, 백호 님.”

“아직 한 달이 지나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겠다면 약속된 시간만큼은 있어야 한다.”

백호는 고집을 부렸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연화의 얼굴을 보면서 결국 허락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백호 님.”

신은 가슴 가득 들어찬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보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연화는 고개를 들어 백호를 바라보았다. 여인은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안 돼, 약속을 어기는 건 허락할 수 없다.”

백호는 강경하게 반대했다. 사실상 그의 발정기는 이미 끝났지만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령과 인간의 경계는 명확한 법, 이유가 없다면 가고자 하는 인간을 신령계에 잡아둘 수는 없었다.

안타까운 얼굴로 백호는 연화의 손을 끌어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그녀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그는 가느다란 여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가지 마라. 내 곁에 있어. 원한다면 네 양어머니를 데리고 오도록 하마.”

“아뇨……. 어머니만이 아닙니다. 마을 사람들도 있어요.”

연화는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녀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사방신이 인간과 맺어지는 것이 가당찮다는 묘우의 생각에 그녀도 어느 정도는 동감을 할 뿐이었다.

만약 백호가 다른 이와 사랑에 빠지더라도……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 전까지는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마을에 정 붙인 이가 있는 거겠지.”

백호는 이를 악문 채 중얼거렸다. 분노에 찬 중얼거림인데도 어딘가 안타까운 아이의 것처럼 들려서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뺨에 손을 얹었다.

남자는 여인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달빛이 그대로 들이치는 누각 위에서 맨 다리에 서늘한 공기가 닿았다. 연화는 몸을 떨었지만 백호의 손을 저지하지는 않았다.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연화야.”

백호는 여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소담하고 동그란 가슴 위에 입을 맞추면서 남자는 그녀의 샅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었다. 보드라운 음모 속을 문지르며 연화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고 백호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백호 님…….”

연화는 허리를 움찔했다. 남자의 손가락이 은밀한 틈을 가르고 들어와 예민한 돌기를 건드렸다. 천천히 밑이 젖기 시작했다. 매끈한 내벽을 더듬으면서 백호는 여인에게 입을 맞췄다. 그는 자신의 허리끈을 푸르고 그녀의 다리를 벌려 자신의 무릎 위로 올려 앉혔다.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버거운 사내의 물건이 연화의 몸 안으로 느릿하게 삽입되었다.

“흡…….”

연화는 숨을 삼키면서 참아내었다. 손톱을 백호의 너른 어깨에 박고, 그녀는 애써 사내의 몸짓에 함께 허리를 움직였다. 둘 모두 아무 말 없이 정사에 몰두했다.

연화는 절정이 다가오자 백호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남자는 그녀의 뺨을 잡고 깊이 입을 맞추었고, 그와 동시에 둘은 함께 절정을 맞이했다.

품 안에서 빳빳하게 굳어서 바들바들 떠는 여인의 몸을 잡고 백호 역시 높은 절정의 쾌락을 전신으로 느꼈다.

“……연화야…….”

백호는 다시 한 번 여인의 이름을 불렀다.

“…….”

연화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절정 때문에 힘에 겨워 얼굴이 발그레했고 숨이 찼다. 백호는 그녀의 고집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연화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깊이 쉬었다.

“그곳에 가서 좋은 일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백호는 예언처럼 말했다. 인간이란 그리 순순하지 않은 존재들이다. 비록 신령을 다스리는 자지만 백호는 그 사실을 알았다. 연화와 같이 때 묻지 않은 존재가 함께 살기에는 지나치게 힘에 겨울 세상이다.

하지만 그녀가 원한다. 인간인 그녀의 의지를 꺾는 것은 청룡과 주작이 허용하지 않을 일이었으며 백호 자신의 자존심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약속이다. 약속이란 신과 인간 둘 모두 손을 댈 수 없는 법칙.”

그는 느릿하게 말했다.

신은 인간의 여인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서로 떨어진 피부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뼈까지 스미는 듯한 냉기에 연화가 신음했지만 백호는 그녀를 내려다보지 않았다. 마음이 약해지고 싶지 않았다.

“좋다. 기간은 달이 가늘어지는 이번 달의 말까지다. 길은 호접에게 물어보거라.”

그 말만을 남긴 채 백호는 차갑게 뒤를 돌아 나갔다. 여전히 인간 세상에 미련이 있는 연화가 서운하고 야속했다. 심장 부근이 자꾸 아파서 그는 이를 꽉 깨물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연화는 침상 위에 누워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신령계의 온화한 공기 속에서도 바람이 찼다. 그녀의 관자놀이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슬픔이 가슴께를 점령하고 뼛속 마디마디가 저렸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기한을 주고 돌아오라는 백호의 자비로움에 감사할 뿐이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올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인간계로 내려갔을 때 좋은 일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

평생을 천민 부락에서 살아온 인간의 여인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옷을 주워 하나씩 걸쳤다. 백호의 손길에 벗겨졌던 옷가지들을 다시 입으면서 연화는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한 줄기 흘러내렸던 눈물을 닦아내고 연화는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 앞에 어느새 조용한 걸음걸이로 호접이 들어서고 있었다.

“호접 님, 이렇게 부탁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연화는 고개를 숙였다.

새빨갛게 충혈된 연화의 눈동자를 보면서 호접은 혀를 차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이 밤에, 흐트러진 차림의 백호가 나와 연화를 인간 마을로 돌려보내라 한마디 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연화는 눈이 새빨개진 채 호접을 맞이했다.

‘싸우시기라도 한 건가.’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었다. 남녀 사이의 일을 그 누가 알 수 있던가. 도무지 모를 일이라 작은 몸집의 나비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호접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팔랑이는 그녀의 날개를 따라, 연화는 자꾸만 힘이 빠지려는 다리에 힘을 넣으면서 걸어갔다. 인간계까지 가는 길은 나비의 신령이 가장 잘 안다. 언제나 그 길을 오가는 유일한 자이기 때문이었다.

마을로 돌아온 연화는 처참함에 말을 잃었다.

천민 부락이라 하나 본래 연화의 마을은 잘 정돈되고 말끔한 동네였다. 아침이면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이웃들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저녁이면 집집마다 밥을 하는 연기가 굴뚝에서 피어올랐다. 골목은 서로 당번을 정해 돌아가며 쓸어 깨끗했으며 아픈 자가 있다면 옆집의 사람이 보리죽이라도 쑤어다 먹였다.

비록 가난하고 버림받은 마을이었으나 서로를 도우며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었다.

“세상에.”

호접은 신령계에서 나오지 않고 즉시 돌아갔다. 아무리 계를 넘나드는 나비라고 하지만 자신의 세계가 아닌 곳에 오래 머물러서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홀로 남아 인간계로 나온 연화는 눈앞에 펼쳐진 참상을 믿을 수가 없었다.

두 집 건너 한 집이 불에 타 재만 남아 있었다. 깨끗했던 골목길은 사람의 것인지 동물의 것인지 모를 피로 젖었고 그 썩는 냄새가 고약했다. 멀리서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간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아니, 그보다…… 그녀를 잡아가겠다며 관리가 왔다는 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을 텐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멀고 먼 유배지, 숨이 붙어 있어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자들의 버림받은 마을이다. 이곳을 이렇게까지 망가뜨려야 할 이유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청수희가 약속했던 치유의 샘물이 마을 어딘가에서 솟아나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렇게 처참하게 망가진 곳에 과연 그것이 얼마나 소용이 있을 것인가. 연화는 망연자실했다.

호접이 바래다 준 숲속 어귀에서 마을 골목으로 돌아 들어간 연화의 앞으로 사람 한 명이 나타났다. 연화가 살던 집의 이웃집 남자였다. 중년의 나이에 제법 살이 쪘던 그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초췌해져 있었다.

“연, 연화냐?”

믿을 수 없다는 듯 그가 물었다. 남자는 비틀거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온통 더럽고 찢어진 옷을 입은 그를 보면서 연화가 양손을 꽉 맞잡았다.

마을이 이 꼴이 된 것이 혹시라도 자신 때문인가,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세상에 연화야. 대체 어딜 갔다가 이제야 오는 게냐…….”

남자가 연화의 앞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그는 더러운 얼굴을 소맷자락으로 벅벅 닦았다. 검댕이 번져 엉망이 되었다.

“아저씨,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연화는 그의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눈물이 흘러 턱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닦아내며 남자는 숨을 골랐다.

“너, 널 찾겠다며…… 수도에서 관리들이 왔다. 왕의 제사장이라고 했던가.”

“……왕의 제사장이요.”

“그래.”

묘우에게 들었던 대로다. 여우의 신령이 전한 바와 같은 내용에 연화는 이마를 짚었다. 그녀를 잡아가기 위해 중앙에서 내려왔다는.

“나흘 동안 하루씩 말미를 늘리면서…… 주변 집들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였다.”

“맙소사.”

“첫날 네가 나타나지 않자 네 어머니를 죽이는 걸 미루고 대신 다른 집을 불태웠다. 둘째 날도 그랬고, 셋째 날도.”

금수의 붉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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