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어머니는 연화보다도 강력한 치유능력을 지닌 치유사였다. 그 능력 때문에 왕의 미움을 받아 쫓겨났으나 왕은 그 능력이 다시 필요해졌을지도 모른다.
연화에게 물려준 능력 또한 굳이 숨길 이유 같은 건 없어서, 일전에도 두어 번 근처 마을의 부잣집에서 그녀의 치유력을 빌리려 초대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험악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이윽고 눈을 들었다. 눈물이 고여 있었지만 눈은 확고했다.
‘어머니…….’
친어머니도 양어머니도 모두 소중한 사람들이다. 연화를 기르다 목숨을 다한 친어머니는 가슴에 묻었고 그녀를 기르며 온갖 정성을 다한 양어머니는 그녀가 지켜야 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비록 심술 맞은 사람도 더러 있었으나 거의 그녀와 가족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곳에 있으며 민폐만 끼치느니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면 최소한 양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에게 돌아갈 해악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제가 돌아가야겠네요. 다른 분들께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
“오……. 이런.”
묘우가 감탄사 비슷한 것을 냈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연화가 결심했다. 애초에 그녀를 꼬드기기 위해 좀 더 많은 험악한 말을 준비했던 묘우는 예상보다 훨씬 쉽게 진행되는 일에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여우의 신령은 부드러운 미소를 띄었다.
“그래요. 양어머니 곁에 가야지요. 뭐, 왕이 찾는다고 하니 그리 안 좋은 일로 찾는 건 아닐 겁니다.”
묘우는 시치미를 뗐다. 그의 여우답게 가늘고 길게 찢어진 눈이 휘어졌다. 하지만 둘 모두 그 말은 그저 입에 발린 소리라는 걸 알았다. 양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을 벌하겠다며 연화를 찾는 상황이다. 결코 좋은 일이 기다린다고는 할 수 없었다.
“백호 님께…… 죄송하지만, 역시 돌아가야지요.”
연화는 중얼거렸다. 백호와의 시간은 한 달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녀에게 기회를 주고 애정을 주었던 그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 그가 보내줄까? 사실 보내주지 않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애초에 그녀는 공물을 훔쳐낸 벌로 이곳에 와 있는 인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양어머니를 뵙고 다시 돌아오고 싶었다. 하지만 연화는 직감하고 있었다. 결코 이곳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올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돌아온다 하더라도 어쩔 것인가. 백호는 사방신이며 연화는 한정된 시간의 반려였다. 아니, 그가 자비로워 모든 일에 애정을 담고 있기 때문에 연화를 반려로 대접해 주었을 뿐이지 엄연히 따지자면 인간 계집 따위, 신의 발정기를 잠재우기 위한 잠자리 상대였을 뿐 아니던가.
연화는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감추며 스스로를 깎아내렸다.
그녀의 어두운 얼굴을 보면서 묘우는 눈을 굴렸다. 한낱 인간의 여자다. 사방신의 세계는 확고하게 나뉘어져 있고 신령들의 세계에서는 가치가 없는 생명이었다. 그저 백호의 눈속임만 할 수 있다면 된다.
그러면서도 꺼림칙함이 느껴졌지만 묘우는 애써 그것을 외면했다. 죄책감 같은 건 느끼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 백호 님께 말씀드리러 가보겠습니다. 여유 기간이 하루라면 지금 당장 내려가야지요. 이왕 갈 거라면 한시라도 빨리.”
“좋은 판단이십니다. 아, 백호 님께 이 사실을 전부 말씀드리면 인간계를 쑥대밭으로 만드실지도 모르니 말을 가려주십시오.”
“예…….”
연화의 얼굴이 흐려졌고 묘우는 미소를 지었다.
“저도 사실은 많이 고민스럽습니다. 백호 님은 상냥한 분, 연화 님이 곤란한 상황이라 생각하시면 돌봐주시려 하겠죠. 그러나 인간계는 엄연히 청룡과 주작의 영토이니 분명 분란이 생길 것입니다. 만약 사방신 간의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건 백호 님의 영토 역시 폐허가 될 만한 일이죠.”
“…….”
“상제께서 노하실 오점이 생길 수도 있어요. 사방신이라 해도 엄연히 상제의 휘하, 만약 그분이 노하신다면 백호 님의 신상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묘우는 자못 걱정스럽다는 얼굴을 했다.
연화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묘우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신령계에 있으며 귀에 먼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 사방신의 영토를 구별하라는 말이었다. 자신 때문에 백호의 치세에 문제가 생겨서는 안 됐다.
여우의 신령은 인간 여인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연화가 돌아가면 그때는 정말로 백호에게 어울리는 신령의 반려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연화는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알려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묘우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것을 보지 못하고 연화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묘우의 토실을 빠져나왔다.
‘지금 당장 가야 해.’
연화는 마음을 굳혔다. 더 이상 혼란을 지고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 인간계로 돌아가 왕에게 가서, 마을과 양어머니를 구하면 된다. 그럼 더 이상 신령계와 백호에 폐를 끼치지 않아도 된다.
연화의 걸음은 곧장 백호의 사실로 향했다. 너른 사실 안에서 백호는 홀로 앉아 서책을 읽고 있었다.
“백호 님.”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연화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백호는 눈매를 치켜 올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다.
“왜 그러느냐.”
백호의 말투는 다정해서 새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연화는 눈물을 꾹 참았다.
남자는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흰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여인은 눈을 감고 그의 따스한 입술을 느꼈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백호의 목덜미에 손을 감고 그의 입술을 찾았다.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다가 백호가 곧 입맞춤을 더 깊게 했다. 입술이 깊게 맞물리고, 둘의 혀가 섞였다. 호흡이 뜨겁다. 연화는 백호에게 매달려 그의 뜨거운 입맞춤을 기억하려 애썼다. 달콤하면서도 버거운 감각.
그는 연화에게서 입술을 떼어내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와 뺨에 연신 입을 맞췄다. 자그마한 머리통과 새처럼 가는 골격, 희고 부드러운 피부. 백호의 손 안에서 연화는 한 마리 작은 새 같았다.
그는 연화를 끌어안고 무릎에 앉혔다.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쇄골에 이빨을 세워 물고 빨았다.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옷에 감싸인 가슴의 유두가 바짝 일어서서 단단해졌다. 그 위를 크게 베어 물고 백호가 계속 이빨과 입술로 유두를 간질이고 물었다.
“배…… 백호 님.”
대답 없이 그는 여인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손으로 쥐고 벌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백호의 양물은 뜨겁고 단단해졌다.
연화 역시 빨리 그를 품고 싶어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돼.’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백호에게 지금 말을 해야 했다. 여기서 안겼다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또 밤이 지나가 버릴 것이다.
이제는 정말 그럴 수 없었다. 양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의 목숨이 달린 문제였다.
“백호 님, 잠시만.”
“……연화야?”
단호하게 밀어내는 손길에 백호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아무리 수줍고 부끄러워도 연화는 여태 부드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단호함이 남자에게 확실하게 보였다.
연화는 옷을 추스르고 백호의 무릎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제대로 매만지고 그의 앞에 앉았다. 백호는 다소 의아한 얼굴로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지? 오늘은 조금 이상하구나.”
“정말로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 무슨 이야기냐?”
신령계로 와서 연화가 처음으로 꺼낸 말에 남자는 다소 놀란 얼굴을 했다. 연화는 고개를 숙였다.
“마을로…… 내려가 봐야 할 듯합니다.”
말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입을 막고 싶은 마음을 견디며 말을 이었다.
“양어머니께서 많이 위독하시다며……. 그분께서 제가 보고 싶다 애타게 부르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너의 양어머니가?”
백호는 차분하게 그녀의 말을 들었다. 양어머니가 무척 위독하고, 아픈 곳이 많은 마을 사람들이 애타게 그녀를 찾고 있다는 말을.
남자는 연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슬픈 얼굴이었다.
“다녀 오거라. 내 기다리고 있으마. 신령들을 시켜 길을 바래다 주마.”
백호는 최대한 양보한 절충안을 꺼내놓았다.
신령계와 인간계의 구별이 지엄한지라, 원래 인간의 여자를 데리고 와 정식 반려로 삼으려면 상제와 청룡에게 허락을 얻어야 했다. 붉은 달이 뜨는 발정기 동안 정욕을 가라앉힐 상대로 삼는 것까지 제한이 되지는 않았으나, 만약 그 이상 길어진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함부로 그녀의 양어머니까지 데리고 와서 이곳에 요양시킬 수는 없었으나 차후 백호는 연화를 정식 신부로 데려올 생각이었다. 상제와 청룡에게 원하는 것을 얼만큼이라도 내주면서 말이다.
연화는 다소 놀란 얼굴로 백호를 바라보았다.
“……다시, 되돌아오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당연하지 않으냐.”
백호는 여인의 흰 뺨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작고 보드라운 얼굴이었다.
“네 양어머니를 이곳으로 데려오고 싶지만 죽을 때가 된 자를 신령계로 불러들일 수는 없다. 그것은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법칙을 깨뜨리는 일, 저승의 주민을 관장하는 현무와 염라대왕이 허용하지 않는다. 약사여래와 같은 보살은 이 세상의 법칙 바깥으로 빠져나간 자들이라 그에 얽매이지 않지만 나는 아니야. 나는 이 세계 법칙의 수호자다.”
생과 사의 경계는 지엄하다. 사방신의 힘은 거대했으나 거기에도 명백하게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죽은 자를 다시 되돌릴 수 없었고, 죽음에 가까워진 자도 살릴 수 없었다.
이미 염라대왕의 명부에 올라간 자들은 강을 건너야 했다. 그것이 세계의 1법칙이었다.
“기다리고 있겠다. 나의 신부야.”
백호의 말을 들은 연화는 눈물을 참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세계를 다스리는 사방신인 그가, 하잘것없는 인간인 그녀에게 기다리고 있겠다 말해 준다. 하지만 그녀가 떠나는 길은 돌아올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길이었다.
다 말하고 싶었지만 묘우의 말이 가슴을 가로질렀다. 인간계에는 청룡과 주작이 버티고 있고, 백호가 날뛰면 그에게도 심대한 위해가 생길 거라는, 그리고 매번 새로운 반려를 찾으니 심려치 말라는 말.
백호에게는 인간인 그녀가 어울리지 않았다.
금수의 붉은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