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우물 하나가 있는 것을 제외하면 사방은 온통 나무뿐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아주 어두워서 저승의 원혼이 어딘가를 맴돌고 있을지도 모르는 깊은 숲.
사영의 걸음에 따라 울리던 방울소리도, 이제는 나지 않았다. 분노한 사혈이 그녀의 꼬리를 잘라버렸기 때문이었다.
방울뱀 특유의 힘과 기가 전부 사라진 채 사영은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사혈은 분노할 만했다. 그는 얼굴 거죽이 곤죽이 된 채로 오랜 날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앓았다. 생으로 얼굴의 절반을 태워진, 그것도 신의 불길로 벌을 받은 그 고통과 통증은 상상할 수 없을 거라고 원로들이 말했다.
얼굴을 붕대로 감은 채 깨어난 아비는 눈을 뜨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사영을 저주했다.
“나쁜 년, 멍청한 년! 너 때문이 아니냐! 지금 이것은!”
그 목소리에 어린 분노와 증오에 사영은 말을 잃고 바닥에 엎드렸다.
“네년을 죽일 것이다, 죽일 것이야!”
아비는 소리를 지르며 발작을 일으켰다.
이무기로서의 자부심, 용이 되지 못한 자로서의 열등감이 사혈의 안에서 충돌을 일으켰다. 그는 잠을 자다가도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 딸과 신을 저주했다.
비록 원로들의 만류로 사영의 목숨까지는 빼앗지 않았으나 그는 기어코 딸을 가장 멀고 험한 땅으로 유배 보냈다. 영원토록 보고 싶지 않다는 의지이기도 했다.
“내 복이 이쯤인 것을.”
이제 사영은 거의 포기 상태였다. 원래 백호의 곁을 차지해 신의 반려가 되겠다는 욕심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지만 이제 그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물끄러미 우물물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에 빠지면 내 구차한 목숨을 끊을 수나 있을까.’
어느 정도 수련을 거듭한 뱀의 신령이었으니 자살도 쉽지 않다. 몸은 본능적으로 살아날 것이다. 참으로 귀찮은 생이로다. 그녀는 멀거니 생각했다.
“잠깐, 아가씨.”
어디선가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사영은 흠칫했다. 그녀는 드디어 환청이 들리나 해서 주변을 슬그머니 둘러보았다. 옆으로 길게 찢어진 두 눈 안에서 눈동자가 굴러가며 숲을 살폈다.
하지만 근방은 아무도 없이 고요했다.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았다. 사영은 미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생각하면서 다시 우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누, 누구……!”
경악해서 사영이 제대로 말을 끝맺지도 못했다.
우물물 안에서 한 여자가 기어 나와 턱을 괴고 있었다. 인기척도 없이 고요했다. 여자의 푸른 머리가 길게 늘어져 우물물 속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피부가 파릇하게 창백했다.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웃음소리마저 환청처럼 기묘하게 들렸다.
“어머, 뱀의 아가씨는 생각보다 담이 작네.”
“누, 누구요?”
“나 말이지, 나는…….”
까르르 웃으면서 여자가 우물 속에서 빙글 돌았다. 그녀의 몸이 솟구쳐 땅바닥 위로 내려섰다.
두 발로 바닥을 딛고 섰으나 그녀의 치맛자락은 우물로 연결되어 있었다. 온 몸이 물에 젖어 그녀가 딛는 땅마다 물자국이 번졌다. 메마른 땅 위로 금세 습기가 가득해졌다.
여자는 넘어진 사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샘의 정령, 청수희라고 해. 반가워, 사영.”
청수희가 높게 웃었다.
수상했으나 그녀에게서는 분명한 정령의 기운이 느껴졌다. 사영은 그녀가 내민 손을 망설이다가 잡고 일어섰다. 생전 처음 보는 정령이었다. 자연물의 정령들은 은둔하는 자가 워낙 많으니 고작해야 사영의 지위로 아는 쪽이 이상한 일이다.
“내……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거죠?”
“초면에 인사도 없이 질문만 많네.”
어처구니없다는 듯 청수희가 샐쭉 웃었다. 곧 그녀는 노래하듯 말을 이었다.
“난 이곳에도 있고 저곳에도 있는 물이거든. 신령계의 일이라면 내가 모르는 게 없지. 게다가.”
그녀는 얼떨떨하게 서 있는 사영의 주변을 빙글 돌았다.
“뱀의 일족이 신의 반려에게 손을 댔다는 소문은 신령계에 아주 소문이 파다하게 났거든.”
“…….”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세가 가장 큰 일족의 수장이 한순간 얼굴 반을 잃고 나타났는데 다른 일족들이 모를 리가. 사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욕심이 많기로 악명이 자자했던 뱀의 일족이라 누구도 놀라워하진 않았지만……. 뭐, 사혈의 얼굴은 좀 놀라웠어.”
청수희는 사영의 기분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투로 말했다. 사혈이 그녀의 아비라는 사실도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순식간에 불쾌감이 치솟아 사영은 몸을 돌렸다. 이 여자가 대체 무슨 신령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녀는 어차피 이곳에 유배된 몸이었고 아마 평생토록 나가지 못할 것이다. 샘의 정령 따위와 말을 나눠서 뭐 어쩌자는 것인가.
“어어, 어딜 가는 거야, 사영 아가씨?”
뒤에서 축축한 물기가 느껴졌다. 사영은 기겁해서 몸을 뺐지만 물기는 떨어지지 않고 그녀의 등 뒤에 달라붙었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결국 버럭 소리를 지르는 그녀에게 청수희가 허공에서 웃음소리를 들려주었다.
“아니, 간만에 재미있는 사건을 봤는데 당사자하고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서.”
“대체……. 재미있는 사건이라니.”
사영은 울컥했다. 자신은 생을 걸고 일을 저질렀고, 그 결과 생을 잃었다. 뱀의 일족의 아가씨로 살았지만 아비에게 버림받은 이상 이제 원래의 지위는 완전히 무너졌다. 그녀는 청수희를 노려보았다.
“재미 삼아 이곳에 왔다면 돌아가세요. 여기는 그리 재미있는 일이 없으니까.”
싸늘한 말투에 청수희가 입을 삐죽거렸다. 그녀의 길고 푸른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사영은 걸음을 재게 놀려 오두막 문을 열었다.
그 때 샘의 정령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야기 들려주면 내가 줄 수 있는 게 있는데, 아가씨.”
“……난 가지고 싶은 게 없어요.”
“난 주고 싶은 게 있어.”
자꾸만 말을 거는 정령이 짜증스러워서 사영은 들어가려고 문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목을 잡는 물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대체, 자꾸……!”
“이거, 뭔지 알아?”
사영은 눈앞에 흔들리는 물건을 보고 잠시 말을 잃었다.
고아한 모양새의 노리개다. 사방신의 반려에 대해 조사하면서 알게 되었던, 원래 신의 반려들이 착용하는 패물. 선명하게 백호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비단노리개. 푸른 보석이 달린 붉은 비단실.
“음, 역시 아는 얼굴이네.”
재미있다는 듯 청수희가 방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사영은 문고리를 잡은 채로 물끄러미 그녀의 손에 들린 노리개를 바라보았다.
“……대체, 그걸 어떻게 손에 넣은 거죠?”
“받았어.”
“……뭐라고요?”
“받았다고.”
멍청한 사영의 얼굴이 흥미롭다는 듯 청수희가 제 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공물, 이라고 중얼거린 그녀는 노리개를 품 안에 다시 쑤셔 넣었다.
“어때, 이제 이야기를 좀 해볼 마음이 나?”
“……나 같은 실패자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으려고 그래요.”
“그냥.”
샘의 정령은 뒷짐을 지고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물의 정령들은 재미있는 일에 아주 목이 말라 있거든.”
자연물에 깃든 정령들은 괴팍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 자연물의 정령들은 금수의 신령들과 비교할 수 없이 오랜 세월을 살았고, 그래서 영원에 가까운 삶의 지루함을 깰 수 있는 재미라면 걸신들린 듯 갈구했다.
‘그래도 보통은 그저 지켜볼 뿐인데…….’
자연물의 정령들은 인간과 신령들을 지켜보며 재미를 얻는다. 이렇듯 청수희처럼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하자며 달려드는 자는 본 적이 없었다. 사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청수희를 노려보았다.
“그 노리개는 나한테 쓸모없어요.”
“하지만 가지고 싶겠지.”
“아니, 쓸모도 없는데 뭘 가져요?”
“이유가 결과인가, 결과가 이유인가. 그건 모르는 거잖아? 반려가 되었기 때문에 노리개를 가지게 되는 건지, 아니면 노리개를 가져서 반려가 되는 건지.”
무슨 해괴한 소리냐며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청수희의 얼굴은 꽤 진지했다.
“해보지도 않고 그냥 손 놓으려고? 일단 물건이 눈앞에 있는데도?”
사영은 잠시 말을 잃고 샘의 정령이 들어 올린 노리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맞잡은 양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듣고 싶은 이야기가 뭐죠?”
결국 버티기를 포기하고 사영이 물었다.
***
산속 깊은 곳 천민 부락은 때 아닌 지체 높은 손님의 행차로 떠들썩했다. 좋은 의미의 소란은 아니었다. 지체 높은 나으리는 좋은 일로 방문한 것이 아니었으니.
“무슨 일이래요?”
“몰라……. 연화를 찾는다는데, 거의 한 달 전에 없어졌잖우.”
관아 마당을 담 너머로 훔쳐보던 마을 사람들이 수군수군 말을 나눴다.
“호랑이에 물려갔을 아이를 왜 찾아……. 없는 살림에 제사를 지내라고 닦달한 게 그때쯤이었잖아.”
“촌장이 제사에 올릴 공물이 없다며 가가호호 좋은 물건을 내라 거의 빌면서 다닌 그때?”
“그러니까. 그 제사 때문에 연화가 산속에 들어갔는데.”
연화네 사정을 잘 아는 아낙이 분개해서 주먹을 허공에 휘둘렀다. 물론 소리는 죽인 채였다.
마을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관아의 눈치를 보았다. 대문을 활짝 열고 지체 높은 중앙 관리의 행차를 맞이한 관아의 마당에는 수령이 관리의 앞에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그 계집애가 없다고?”
제사장 성현은 귀를 의심했다.
“언제부터 없어졌느냐?”
“제사가 있던 날부터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저희도 죽을 맛입니다요, 마을에 치유사라고는 그 애 하나뿐인데…….”
촌장은 우는 소리를 했다. 수령도 눈치를 보면서 손을 비볐다. 그들은 관리의 자비를 바랐다. 이왕 이곳에 왔으니 자신들의 사정도 좀 돌아봐 주기를, 제사도 잘 치러냈으니 말이다.
제사를 치른 이튿날 제삿상에서 백호가 음식과 공물을 꽤 여러 개 가져갔다. 신이 마음에 들어 한 것이다.
하지만 성현에게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수국의 왕 만희는 직접 사촌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손속에 자비가 없는 자라는 뜻이다. 일단 명한 바대로 따르지 못하면 그대로 검을 뽑아 벨 것이다. 그게 대신이든 제사장이든 상관없었다. 하필 그에게 명을 내렸기 때문에 어찌 되었든 모든 벌은 제사장에게 떨어지게 생긴 모양새였다.
금수의 붉은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