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호접은 슬쩍 연화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어깨를 조금 늘어뜨렸다.
“아시겠지만 호접 님, 저를 구하느라 백호 님께서 혼령 하나를 소멸시키셨답니다. 별일 아니라 하셨지만 아닌 것 같아요…….”
“흠.”
신령의 여인은 한숨을 쉬었다. 혼백이라면 저승의 주민이고 그 때문에 현무가 오늘 아침 방문했다면 정상적으로 저승으로 인도되었던 혼백일 것이다.
“음……. 좀 상황이 안 좋긴 하군요.”
호접은 난감한 얼굴로 눈을 찌푸렸다. 사실 이번 일로만 문제가 된 건 아니다. 백호는 시시때때로 자신의 심기가 불편할 때면 저승의 혼령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왔다. 언젠가는 문제가 되리라 생각은 했지만 하필 연화의 일이 얽혀 있을 때 이리 되다니.
‘그러게 자제하시라고 그리도 말했건만.’
백호는 사방신 중 가장 격렬한 성품의 소유자다. 비교적 선하고 온화하고, 스스로 자비롭다 말하는 성향이긴 했으나 그것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향하는 것일 뿐.
특히나 가장 넘쳐나는 생명들을 다스리는 백호는 저승의 존재들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사방신은 다들 서로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백호의 저승에 대한 혐오는 상상을 초월했다.
“사방신은 상제의 휘하이나 염라대왕의 휘하는 아닙니다. 염라대왕은 독립된 존재죠. 하지만 현무 님은 염라대왕의 저승을 영토로 가지고 있으니까 거의 같은 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
수호령은 날개를 바짝 접었다. 그녀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뜻이었다.
“괜찮을까요. 저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지…….”
“다른 사방신과 분쟁이 있다고 해서 큰 문제가…… 아주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닙니다. 물론 문제야 되겠지만. 그런데 염라대왕과 일이 얽혀버리면…….”
호접은 중얼거리면서 혼자 궁리했다. 곁에 선 연화는 점차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상상으로 걱정하는 것과 실제 호접의 입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듣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연화는 입을 꼭 다물고 손을 쥐었다. 워낙 거대한 존재들끼리의 문제라 그녀는 끼어들 여지조차 없었다.
“저 때문에 하필…….”
“아니, 아니에요. 연화 님 때문이 아니에요. 어차피 한 번은 일어날 일이었어요.”
정신을 차린 호접이 손사래를 쳤다. 연화가 도화선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간 쌓인 일이 많았으니. 그녀는 위로하듯 연화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괜찮아요. 별일 없을 겁니다……. 사방신들께선 생각보다 마음이 넓거든요. 너무 걱정 안 해도 되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연화 님.”
호접은 날개를 팔락였다. 그녀는 안심시키는 미소를 지어주다가, 연화의 어깨 너머로 침실 입구를 보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 이런.”
호접이 중얼거리며 날개를 접고 허리를 굽혔다. 연화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다가 호접이 인사하는 방향을 보고 움찔했다.
백호만큼이나 장신인 사내가 그의 곁에서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긴 흑발과 검은 장포가 바닥에 끌릴 만큼 길고 얼굴은 얼음처럼 창백했다. 빛을 담은 듯 밝은 백호와 완벽하게 대비되는 사내였다.
가까이 다가온 사내가 호접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군, 모든 곳을 날아다니는 나비.”
“현무 님을 뵙습니다.”
사방신 중 하나인 현무.
머리카락은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었다. 장포와 머리 모두 암흑처럼 새카만 색이었다. 신령계의 빛나는 아침 햇살을 전부 무저갱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조금도 광택 따위 없이 그저 검기만 했다. 머리를 두른 은색의 가느다란 관만이 그에게서 빛나는 유일한 물체였다.
“네가 백호의 반려인가.”
“이, 인사드립니다…….”
연화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혔다. 백호는 못마땅한 얼굴로 현무를 쳐다보다가 손을 저었다.
“자, 됐지. 이 사람이 내 반려 연화다. 봤으니 이제 네놈의 굴로 썩 돌아가.”
“여전히 성격이 급하군.”
현무가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살아 있는 자에게 오한을 주는 소리였다. 그는 고개를 숙여서 희디흰 연화의 작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인간 여인은 두려움에 떨며 시선을 피했고 현무는 미소를 지었다.
“과연 아름답도다. 홀린 이유가 있었군.”
“무슨 헛소리인가? 내가 뭘 홀려? 이상한 소리나 할 거면 썩 꺼져라.”
“아, 혼백 말이다. 너 말고.”
“…….”
백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민망해하는 걸 눈치챈 현무가 놀리듯 말했다.
“단단히 홀리긴 한 모양이군? 내 말을 곡해하는 걸 보니 말이야.”
“뭐…….”
“이런 모습을 다 보는군.”
저승의 사방신은 배를 잡고 웃고 싶지만 백호 때문에 차마 웃지 못하는 이상한 얼굴로 입 꼬리를 비틀었다.
“뭐, 좋아……. 하지만 일단 말은 확실히 해야지.”
“무엇을?”
“염라대왕의 전언이다. 지난번 말했던 그 영토, 넘긴다면 가만히 계시겠다고 했다.”
“……아까는 그런 소리 전혀 없었잖은가.”
“언제 내가 패를 전부 보여주는 것 보았나. 단순한 너나 하는 짓이지.”
백호는 이를 으득 갈았다. 현무는 항상 원하는 것을 한 번에 말하는 법이 없었다. 속이 검고 우중충한 사내다웠다.
“지난번 말한 영토라면 신령계와 저승 중간에 위치하는 남쪽의 영계 말인가.”
“그래. 어차피 손바닥만 한 곳이잖아. 네놈에겐 필요도 없는.”
“하지만 그곳을 넘기면 주작이 난리를 치겠지. 그곳을 통해 남방으로 저승사자들이 출입할 테니 주작이 기겁할 텐데.”
“그거야 둘이 해결할 일이고.”
현무가 으쓱했다. 백호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이번 현무의 방문은 연화의 일 한 번 때문에 발생한 것은 아니다. 그간 저승의 혼령들을 성질에 못 이겨 많이도 소멸시켰다.
백호는 잠깐, 아주 잠깐 반성했다. 신령계의 존재를 현무가 해했다면 대번에 난리를 피웠을 자신을 생각하면 더 그랬다.
어차피 지난번에 경고를 들었던 부분이다. 백호가 혼백을 소멸시켰을 때 염라대왕이 그 음침한 목소리로 직접 백호의 고막을 울렸더랬다. 다음번에 또 한 번 저승의 주민을 없앤다면 그때는 영토를 내놔야 할 것이라고.
“좋아. 하지만 주작이 나한테 항의하면 저승에 가서 말하라고 하겠다.”
백호가 시큰둥하게 말하자 현무가 나직하게 웃었다.
연화는 귀를 의심했다. 지금 사방신인 백호가 자신의 영토를 저승에 내놓는다는 것인가. 연화는 당황해서 눈을 들어 백호와 현무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호접이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지만 연화의 당황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 기색을 눈치채고 현무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느다란 입술 끝이 위를 향하고 그의 창백한 얼굴이 연화를 향해 기울어졌다.
“이봐, 인간의 여인이여. 네 반려가 이리도 마음이 곱다. 너 때문에 영토마저 수월히 내놓는구나.”
“현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백호가 벌컥 화를 냈다. 그의 동공이 선명한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무슨 속셈인지 몰라도 연화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베어버릴 테다. 네가 누군지는 상관없지.”
“진정하라고. 그냥 알려준 것뿐이잖아.”
현무가 두 손을 들고 얌전히 한 걸음 물러났다. 검은 머리의 남자가 군소리 없이 물러나자 정말로 검을 잡았던 손을 떼어내면서 백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골치 아프고 불쾌한 상대였다.
“다시는 이 건에 대해 말하지 마라. 내가 나의 영토를 떼어준 건 유례없는 일이야.”
“아무렴 그렇지.”
현무가 웃었다. 그의 몸이 흐릿하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다시 저승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연화 쪽을 흘긋 보았다.
“네 인간 반려, 생각보다 더 예쁘군.”
“닥쳐라.”
“아니, 난 인간에겐 관심 없어. 저승에 오기 직전인 인간이 아니고서는.”
낮은 웃음소리가 기분 나쁘게 방 안을 울렸다. 그 웃음소리를 마지막으로 현무의 자취가 완전히 방 안에서 사라졌다. 마치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백, 백호 님…….”
“신경 쓰지 마라, 연화야. 별일 아니다.”
백호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승의 존재들이 보통의 생명들에게 얼마나 기분 나쁜 느낌을 주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백호는 창백하게 질린 연화의 얼굴에 손을 얹고 아주 약간의 양기를 불어 넣어주며 반듯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연화는 입을 다물었다. 다정한 백호의 손길만큼 죄책감이 가슴을 뒤덮었다.
‘……나 때문에 백호 님이 피해를 입었어.’
연화는 눈을 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자신이 잘못한 일이었다.
***
신령계의 한 구석에는 아주 먼 유배지가 있었다.
사영은 그날 이후 뱀의 일족의 거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유배되었다. 신령계에서도 길이 험해 누구도 가지 않으려 하는 곳이었다. 그곳은 심지어 지렁이도 새도 없으며 빛조차 들지 않는 깊은 산속이었다.
‘목숨이나마 부지한 것이 다행인가.’
약간 웃음이 날 정도였다. 아비인 사혈은 그 이후 사영을 없는 자식 취급했다. 아니, 없는 자식 정도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언젠가 쓸모가 있을지 몰라 죽이지 않고 목줄을 매두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낡은 오두막 한 채에 덩그라니 놓여서 사영은 멍청하게 하늘만 바라보는 것이 일과였다. 많은 나무들 틈으로 보이는 작은 조각하늘에는 빛도 제대로 들지 않았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누구도 찾아오지 않고, 찾아올 수도 없는 곳. 어쩌면 사영은 여기서 평생을 살게 될지도 몰랐다.
“생각을 해보아야 무엇 하나, 어디 하나 쓸 데가 없는 것을.”
한탄하며 그녀는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갔다.
금수의 붉은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