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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38화 (38/113)

38화

다음날 현무에게서 전언이 도착했다. 그가 직접 오겠다는 것이었다.

“제 주민을 제대로 간수치 못했으면서 무슨 말이 많은 게냐!”

백호는 그 소식만으로도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뛰었다. 말을 전한 묘우가 움찔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설 정도였다.

“하오나 백호 님, 어느 정도는 예견된 일이었지 않습니까.”

환한 햇빛이 온통 들이치는 널찍한 대전에 서서 묘우는 한숨을 쉬었다. 옥좌에 앉은 백호는 불쾌함과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애초에 이곳으로 넘어오지 않게 했으면 될 일 아니더냐!”

분명 백호의 영토에서 벌어진 일, 그에게 문제를 삼을 수는 없는 게 불문율이었다. 하지만 현무가 아닌 염라대왕이 간섭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리고 만약 백호가 소멸시킨 영혼이 저승의 중요한 ‘조각’이라면 더욱이나.

“명부에 오른 혼령이었다고 합니다. 그저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아니었으니 더욱 문제지요.”

“제대로 된 명부에 오른 혼이 왜 여기까지 와서 연화를 끌어가려 한 것인데!”

“글쎄요.”

묘우는 못마땅함에 머리를 짚었다. 인간의 여인이란 역시나 분란을 불러온다. 이전 청룡과의 분쟁을 만들었던 여인에 연화를 덧씌워 생각하며 그는 한숨을 다시 삼켰다. 뱀의 일족이 멍청하게 행동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터였다.

“연화 님은 곧 돌려보내셔야 할 분입니다. 그분 때문에 저승과 마찰이 일어나는 건 좋지 않습니다, 백호 님.”

“……돌려보낸다고?”

“그렇지요, 붉은 달도 이제 거의 져가지 않습니까.”

달은 원래 한 달 동안 붉게 물들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뜻이고, 먼저 지거나 더 오래 가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이번의 붉은 달은 예상보다 빠르게 사라져 갔다.

백호는 묘우의 지적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높게 묶어 올린 그의 긴 백발이 불편한 주인의 기분에 따라 허공으로 넘실거렸다. 묘우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연화 님의 마음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분은 인간계에 소중한 것들이 있으시겠지요. 정인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이고. 백호 님의 욕심만으로 잡아두셔서는 안 됩니다.”

“……시끄러워.”

혹시나 싶어서 일부러 찌르는 소리를 한 것이다. 과연 백호는 입을 한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주군의 성격을 잘 아는 묘우는 한 소리를 더했다.

“부디 고려해 주십시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시는 편이 연화 님께도…….”

“듣기 싫다. 그만해라.”

백호는 손을 들어 묘우의 입을 다물게 했다. 눈치 빠른 여우의 신령은 곧 입을 다물고 물러났다.

침실에서 시녀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연화는 불안한 심정이 되었다. 어쨌든 자신이 섣불리 길을 나서 벌어진 일이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 백호가 저승의 주민을 소멸시켰다. 그 때문에 다른 사방신과의 분쟁이 벌어지면 그 빚은 고스란히 백호가 떠안게 된다.

“넌 신경 쓰지 마라, 연화.”

백호는 거친 성질을 애써 잠재우면서 미소를 지었다.

백호는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말했지만, 연화는 백호의 뒤에 선 묘우의 못마땅한 얼굴을 보았다. 그는 점잖은 성격 탓에 입 밖에 내서 연화를 탓하지 않았지만 여우 같은 긴 눈 안에 그의 마땅찮음이 모두 담겨 있었다. 연화는 자신을 탓하는 묘우의 기색을 눈치채고 고개를 푹 숙였다.

백호는 연화를 침실에서 기다리도록 하고 자신의 수행실로 자리를 옮겼다. 현무가 공간을 옮기기 위해서는 어둠이 필요한 법, 이곳에 마땅한 지하의 공간은 없었으므로 백호는 사방이 꽉 가로막힌 수행실을 택한 것이다.

문을 완전히 닫고 촛불 하나만을 켜둔 수행실은 새카맣게 어두웠다.

“올 테면 빨리 와라, 현무.”

가부좌를 틀고 앉은 백호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소리를 높였다. 어둠 속에서 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호 너는 여전히 성질이 급하다.”

“언제든 올 수 있는 놈이 쓸데없이 전언 같은 소리를 떠드니까 말이지.”

금수의 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둠을 가르고 검은 장막 같은 장포 자락이 펼쳐졌다. 촛불 위로 나타난 창백한 얼굴이 한쪽 입술을 올리면서 백호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은 살아 있기도 했고 죽어 있기도 했다. 절반쯤 가면 같은 흰 얼굴은 천천히 깊은 암흑을 가르며 나타났고 그 뒤로 길고 긴 저승 같은 흑발이 뒤따라 흘러내렸다.

“재수 없으니 앉아라. 난 누가 날 내려다보는 걸 싫어하니.”

백호가 못마땅하게 말했다. 어둠을 가르고 나타난 현무가 천천히 가느다란 촛불 아래로 모습을 완전히 드러냈다. 백호만큼이나 장신인 사내는 앉아 있는 백호를 내려다보다가 흐흣거리며 웃었다.

백발의 남자는 인상을 썼다. 청룡이 일부러 백호의 신경을 건드린다면 현무는 언제나 백호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에 무신경했다.

검은 사내가 느릿하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다.”

“어차피 자주 만날 사이는 아니잖나.”

“그건 그렇지.”

죽음과 영혼을 다스리는 현무와 초목과 짐승을 다스리는 백호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아로새겨져 있다. 둘이 자주 만나는 것이 세계를 다스리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 몇 년을 가도 한 번 만날 일이 없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어둠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갈 수 있는 현무는 이렇게 부지불식간에 동료 사방신들을 찾아오곤 했다. 물론 각자의 생명들을 다스리는 세 동료들은 현무의 방문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어쩌자고 저승의 주민을 그리 찢어발겼나, 백호? 조각을 전부 줍지도 못하게 찢었더군.”

“감히 내 반려를 건드렸으니 당연하지.”

백호가 사나운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 현무는 히죽 웃었다.

“진짜 반려처럼 이야기하는군……. 어차피 붉은 달이 뜬 동안의 발정기를 지낼 부인일 뿐이잖아.”

“말 함부로 하지 마라.”

백호의 기가 사납게 확 타올랐다. 불의 신인 주작보다도 어쩌면 더 잘 타오르는 신일지도 모른다.

현무는 혀를 차면서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어둠과 안정의 신인 그는 생기로 가득 찬 백호가 가까이 있을 때면 무척 불안정한 감각을 느꼈다. 발밑이 자꾸만 흔들리는 기분.

“염라대왕께서는 몹시 진노하셨다. 네가 예전에도 수없이 소멸시켰던 혼령들에 대해 죄를 묻지 않고 지나갔지만 이번에는 달라.”

“죄라.”

백호가 코웃음을 쳤다.

“제 주민 간수를 못해 내 영토로 넘어와 피해를 입힐 뻔했던 네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다.”

“혼령이 넘어간 건 신령계지만 피해를 입힌 건 인간이니 청룡의 주민이지.”

“말은 잘하는데 그 인간이 내 반려다.”

“흠.”

현무는 흥미로운 얼굴로 백호를 살폈다. 흰 머리카락의 남자는 사나운 눈으로 어둠의 신을 노려보았다.

“관련자이니 그 얼굴을 한번 보고 싶은데.”

“안 돼.”

백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단칼에 자르는 그를 보면서 현무의 긴 눈이 휘어졌다.

“염라대왕은 명부를 쥔 분이다. 가능하면 협조를 하는 게 좋아.”

“지금 협박하는 것인가?”

“기억해라, 백호. 저승의 그분께선 네 반려의 명줄을 움켜쥐고 계시다.”

하늘에 옥황상제가 있다면 지하에는 염라대왕이 있다. 대왕이 쥐고 있는 것은 이 세계 모든 생명들의 생사여탈권이다. 사방신이 지엄하다고 하나 감히 대왕과 상제에게 댈 것은 아니다.

“내가 네 반려를 보아야 나도 그분께 할 말이 있지 않겠느냐, 저승의 주민이 그리 거칠게 찢어발겨졌는데.”

백호는 불쾌한 얼굴이었지만 사실 현무의 말도 맞았다.

저승은 삼세계 중 특이한 위치를 차지한다. 생명이 아닌 혼령들의 세계. 그곳에서는 옥황상제가 아닌 염라대왕이 법칙을 만들고 유지한다.

그곳의 주민을 찢어발겼으니 현무가 어떻게든 상황을 염라대왕에게 잘 설명해야 했다.

그는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얼굴을 보기만 한다 약속해라. 그 이상 수작을 부리면 가만두지 않겠어.”

“내 동료의 반려인 자에게 내가 무슨 짓을 하겠나. 백호 너는 너무 의심이 많아.”

현무가 웃었다. 스산한 미소에 백호가 못마땅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지하에서 올라온 자들에게는 흙 밑 특유의 축축함과 기분 나쁨이 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수행실의 문을 활짝 열었다. 신령계의 생명력 가득한 햇빛이 온통 어두운 수행실로 쏟아져 들어왔으나 현무의 검은 장포 자락에는 미치지 못했다. 저승을 다스리는 사방신의 존재는 생명력과 빛을 모두 빨아들여 무저갱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백호는 그 꼴을 보다가 인상을 찌푸리고 몸을 돌렸다.

“가자. 얼굴만 보고 돌아가는 거다.”

***

“왜 그렇게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죠? 연화 님.”

날개를 팔랑거리며 여자가 연화에게 말을 걸었다. 침실에 멍하니 앉아 있던 연화는 깜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호접 님.”

호접은 연화의 곁으로 다가와 옆에 앉았다. 창밖을 바라보도록 놓인 긴 의자에서는 신령계의 푸른 하늘과 산천초목이 훤히 내다보였다.

“다름이 아니라 저승에서 사자가 왔다고 전해 들어서요.”

연화는 창백한 얼굴로 애써 웃어 보였다. 경솔한 발걸음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연화 자신으로서도 할 말이 없었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그녀는 머릿속을 맴도는 근심을 지우려 애쓰며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요. 현무 님이 직접 오셨지요.”

사실 현무는 느닷없이 동료 사방신들을 방문하고는 했다. 짓궂은 장난이랍시고 하는 짓이었으나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다. 저승에서 온 사자를 기꺼워할 생명들이 도무지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짓궂은 장난의 일환이려니 했던 호접은 생각을 약간 수정했다.

연화의 일은 백호에게 연화가 자는 동안 지나가는 말처럼 들은 것이라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인간 여인의 안색을 보니 뭔가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수의 붉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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