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백호는 아침에 인사를 하러 왔지만 여전히 조금 데면데면했다. 호숫가에서 그녀의 치유력에 보였던 반응 때문에 연화 역시 조금 어색해졌다.
백호는 식사를 마친 후 바로 일과가 있다며 나갔고, 하루 동안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서도 그는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붉은 달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고, 그녀가 인간계로 돌아가야 할 시기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시가 소중하고 아까운 이때, 이런 식으로 거리를 두게 될 줄이야.
노을이 지는 저녁에 연화는 상심하여 궁의 정원으로 걸어 나갔다. 앞으로는 깎아지른 절벽에 면하고 있어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궁궐이었으나 뒤로는 짧고 보드라운 풀밭이 쭉 이어져 외길로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저 멀리 노을이 천천히 지며 온통 붉은색으로 허공을 물들이고 있었다. 곧 달이 뜰 것이다. 연화는 잔디 사이 작은 야생화들을 찾으며 꽃을 세다가 무릎을 톡톡 치는 작은 흰 발에 깜짝 놀랐다. 코끝이 동그랗고 아주 자그마한 토끼였다.
“세상에, 너 여긴 어떻게 알았니?”
연화는 놀라워하면서 토끼를 안아 올렸다. 그녀의 무릎 높이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토끼는 코를 씰룩이며 그녀에게 안겼다. 따스하고 포근한, 자그마한 생명체가 너무 귀여워서 그녀는 토끼를 안고 그 목덜미와 등을 쓰다듬었다.
“너무 귀엽다, 너.”
여인은 토끼의 콧등에 입을 맞췄다.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너처럼 뛰어다닐 수 있다면, 내가 어머니 손수건이라도 좀 찾으러 다닐 텐데.”
인간계로 돌아가야 한다 하니 그 숲 어딘가에 떨어뜨렸을 손수건이 생각났다. 비단손수건은 어머니의 유일한 유품이었다.
만약 제사를 무사히 지냈다면 아마 중앙으로 올라가 왕의 창고 어딘가에 쑤셔 박혔을 것이다. 그리고 연화 자신은, 백호와 만날 일이 없었겠지.
‘차라리 그게 나았을지도.’
연화는 우울하게 생각했다. 숲속 어디에 떨어뜨렸는지 몰라도 아마 짐승이 물어가 찢어버렸거나 했다면 아예 손수건 자체가 세상에 없는 거니까.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연화에게는 그 손수건이 유일하게 모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백호와 헤어질 걸 생각할 때마다 느껴지는 이 고통이 없었을까.
“지금 그냥 걸어서라도 한번 가볼까……. 멀리는 말고, 그냥.”
마음이 허해져서 연화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 역시 알고 있다. 인간계와 신령계는 나뉘어 있으니 그 숲 근처에 간다 한들 손수건을 찾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다. 연화는 단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에 답답하고 슬퍼졌을 뿐이었다.
토끼가 그녀의 발치를 뛰면서 발등을 콩콩 찍었다. 그녀가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긴 치맛자락을 물고 뒤로 끌어당겼다. 연화는 애를 쓰는 그 작은 생물의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그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가지 말라고? 에이, 길 아니까 괜찮아.”
연화는 웃으면서 토끼를 밀어내었지만 작은 동물은 기어코 그녀의 뒤를 따라 나왔다.
“길게 갈 건 아니야, 산책이야 산책.”
자꾸만 앞길을 방해하는 토끼에게 말을 걸면서 그녀는 걸음을 옮겼다. 꽃길이 절벽 아래로 쭉 이어져 있어 향기롭다. 그녀는 야생화를 구경하면서 외길을 따라 내려갔다.
정말로 멀리 갈 생각은 아니었다. 이미 노을이 져서 사방이 어스름했고 연화는 그리 간이 크지 않았다. 실제로도 길은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싼 기암괴석과 비단 같은 녹색 풀밭에 정신을 뺏기고 한참을 걸었다. 깎아지른 절벽을 아주 가파른 각도로 내려오는 외길을 한참 걷자 상당히 많이 내려온 기분이 되었다.
길은 절벽을 둥글게 둘러서 그 밑으로 이어져 있었다. 꺾어져 절벽에 면한 길로 들어서자 그늘이 져서 상당히 추웠다. 양지가 아닌 음지로 들어서자마자 연화는 소름이 끼치는 기분에 어깨를 감싸 쥐었다.
원래의 신령계는 볕이 따뜻한 곳이다. 지금처럼 해가 지고 공기가 차가워지더라도 백호의 영토답게 양기가 충만하고 생명력이 가득한 땅. 추워도 춥지 않은 신기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연화는 자신의 몸을 감싼 공기가 무척 안 좋은 기운을 품고 있다고 느꼈다. 일반인이라면 그저 기분이 좋지 않다고 느꼈을 것이 약사여래의 가피를 받은 연화에게는 훨씬 구체적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궁으로 올라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 때였다. 연화의 어깨를 갈퀴 같은 손아귀가 잡아챈 것이.
“꺄악!”
너무 놀라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녀는 뒤로 넘어졌다. 얼음장 같은 손아귀는 그대로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연화를 끌고 정체 모를 존재는 밑으로 걷기 시작했다.
손목의 피부가 찢어지는 것 같아서 연화는 비명을 질렀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를 질질 끌고 밑으로, 더 밑으로 내려가는 희끄무레한 형체는…….
‘……귀신?!’
연화는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죽은 자들의 혼령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아픈 병자나 죽어가는 자들의 곁으로 스치는 저승사자들도 간혹 알아보았다. 지금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 끌고 가는 것은 분명 혼령이었다.
아귀처럼 찢어진 입에 눈에 구멍이 뻥 뚫린 귀신.
“이거 놔!!”
그녀는 혼령을 걷어차려 했지만 발은 헛되이 허공을 지나갔다. 그 와중에 혼령의 악력은 지독하게 세서 연화의 손목에는 벌써 새빨갛게 울혈이 올라왔다.
그녀가 발버둥 치면서 자신도 모르게 약사여래의 치유력이 노란 빛을 띄우고 피부에서 빛났다. 노란 빛을 띈 주먹으로 혼령의 손을 치자 퍽 소리가 나며 혼령이 물러났다.
“헉, 허억…….”
다행이다. 치유력을 띤 손으로는 혼령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녀는 경고성으로 한껏 끌어올린 치유력을 손에 두르고 혼령과의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혼령은 물러나기는커녕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따뜻한…… 빛……. 이승으로…… 갈 수 있는…….】
혼령의 비명 같은 신음이 머릿속으로 울려왔다. 연화는 잔뜩 긴장한 채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곧 검은 형체가 그녀의 위로 뛰어들었다. 연화의 비명이 그림자에 먹혀들었다.
그림자에서 검은 줄기가 솟아 나왔다. 그것은 여인의 가슴을 그러쥐고 피부로 파고들었다. 차가우면서 미끌거리는 줄기에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벌어진 입 사이로 그림자 줄기가 파고들어 막았다.
형체는 흐물거리면서 연화의 사지를 결박하고 그녀의 육신을 끌어당겼다. 날카로운 통증이 냉기와 함께 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
“……무어냐.”
마음이 심란해서 백호는 사방을 떠돌다가 침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연화가 없었고, 그는 시종들의 말에 따라 정원으로 나갔다. 그곳에도 연화는 보이지 않았다.
연화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려던 그의 발치에서 자그마한 동물 하나가 바지를 물었다. 백호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조금 의아해했다. 아주 작은 토끼.
보통 본체가 호랑이인 그에게 초식동물들은 범접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신령을 품고 있다면 이야기가 좀 다르겠지만 그의 발아래에 있는 것은 아직 신령을 품을 수조차 없는 어린 토끼였다.
백호는 눈썹을 치켜 올렸다. 하지만 토끼는 필사적으로 백호의 다리에 매달리면서 뭔가를 말하려 애썼다.
“가만. 넌 어제 연화가 치유해 준 고 녀석이 아니냐.”
백호는 다소 못마땅한 표정으로 토끼를 차내려 하다가 하도 절박한 몸짓에 멈칫했다. 언령의 힘이 깃들지 않은 토끼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아서 그는 손을 내려 토끼의 몸에 손을 댔다.
작은 토끼가 말하려는 바가 뇌리로 스며들었다.
“……연화가, 저승의 주민을 만났다고?”
백호의 낯색이 변했다. 몸이 식는 것 같았다. 신령계까지 들어온 저승의 주민이라니. 어지간한 원한을 지닌 혼령이 아니면 인간계도 아닌 신령계까지 들어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일반적인 인간이 원한을 가진 혼령을 만난다면 좋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젠장……!”
토끼가 알려준 방향을 향해, 백호는 몸을 날렸다. 그의 육체가 허공중에 떠올랐다가 빠르게 낙하하기 시작했다. 수직으로 강하하며 그의 새하얀 머리카락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그의 시야 안으로 절벽 중턱쯤에서 차원이 둥글게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공기가 그쪽으로만 모여 흘러들어 가고 있었다.
차원이 닫히면, 아무리 백호라도 저승까지 쫓아가려면 시간이 걸린다. 그는 필사적으로 몸을 튕겨 절벽 쪽으로 날아가 손을 내밀었다.
“연화야!”
둥근 원 가운데로 마지막으로 끌려 들어가는 연화의 소맷자락이 보였다.
희게 질린 그 가느다란 팔목을 간신히 잡아채어 백호는 자신의 뜨거운 기운을 연화의 찬 몸으로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녀의 차가워진 피부에 온기가 돌아오면서 저쪽 차원에서 이쪽 차원으로 연화가 단숨에 끌려 들어왔다.
정신을 간신히 놓지 않고 있던 연화가 아악,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다른 팔 끝에 검은 영혼이 아귀처럼 입을 벌린 채 연화의 몸을 찢어놓을 것처럼 무자비하게 잡아끌고 있었다.
“백호 님!”
백호가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혼령의 얼굴에 그대로 주먹을 날렸다. 검도 무엇도 쓰지 않은 말 그대로 원초적인 공격이었다. 순수한 물리력으로 주먹을 정통으로 맞은 악귀는 비명을 지르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손아귀에서 간신히 벗어난 연화는 백호의 뒤에서 덜덜 떨면서 몸을 웅크렸다.
악귀가 그녀를 저승으로 끌고 들어가는 동안 몸 안으로 흘러든 원한이 그녀의 몸을 차갑게 식히고 있었다. 머릿속이 엉크러져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는 채 연화는 백호의 너른 등을 바라보았다.
눈물로 아롱져 흐린 시야로도 남자의 단단한 등줄기만은 또렷하게 보였다.
“어딜 감히 얌전히 사라지려 들어!”
분노한 사방신은 사라지려는 영혼을 바닥에 패대기치고 연달아 주먹질을 해댔다. 신력에 의해 현계에 고정된 혼령이 사라지지도 못한 채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죽음의 비명을 올렸다.
연화는 백호의 뒤에서 귀를 막았다. 원한, 원통함, 비통……. 모든 감정이 그녀의 뇌리를 점령했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백호는 귀신의 머리통을 잡고 그 형체를 양손으로 찢어버렸다. 원한에 찬 혼령이었지만 사방신에게는 어떤 위협도 될 수 없는 힘이었다. 저승으로 도망가려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보지 않고 그대로 악귀 자체를 소멸시켜 버린 것이었다. 검게 재처럼 흩날리던 귀신의 조각들이 허공으로 사라져 갔다.
금수의 붉은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