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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34화 (34/113)

34화

백호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가슴에 손을 모으고 기도하던 연화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안색은 그리 기껍지 않았다.

“다친 토끼 따위는 그대로 먹히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내가 호랑이인 것처럼, 그 녀석은 토끼지.”

“……아.”

연화는 찔끔했다. 백호는 금수의 왕이다. 그가 지키는 세계의 법칙은 약육강식, 적자생존. 자연 그대로의 법칙이 그의 수호 아래 돌아간다. 자신의 법칙을 눈앞에서 거스르는 꼴을 본 것이 그에게 결코 기쁜 일일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음부터는 다친 짐승을 발견해도 그대로 두어라.”

“…….”

남자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하지만 연화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그리고 약사여래로부터 그렇게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 약자가 있다면 돕고 살아나갈 수 있는 힘을 돌려주는 것. 그것이 연화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능력을 지닌 이상, 힘닿는 데까지는…….”

“사방신은 약사여래의 능력을 좋아하지 않아.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기 때문이다.”

“…….”

대대로 보살들과 사방신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상제가 다스리는 꽉 짜인 이 세계의 안에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사방신의 역할에 비하여, 깨달음을 얻은 개별자들인 보살들은 세계의 법칙을 거스르는 예외들을 만들어내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약사여래는 그 치유의 능력 때문에 적자생존의 백호와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현무의 반대편에 서 있는 보살이었다.

백호는 혀를 찼다. 적자생존의 원칙을 비트는 치유력을 눈앞에서 보고 그의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다. 설마 여래의 가피가 연화의 안에 이 정도까지 깊이 닿아 있을 거라고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연화는 고개를 숙였지만 앞으로 하지 않을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백호는 혀를 찼다.

“하여간 보살들이란.”

저승사자가 와도 그 멱살을 비틀어 영혼을 내리게 만든다는 약사여래. 그의 능력은 현무가 가장 싫어했다. 지하와 저승의 지배자인 현무는 자신의 주민이 될 영혼을 자꾸 끌고 이승으로 내려버리는 약사여래가 마땅할 리 없었다. 현무만큼은 아니어도 적자생존의 법칙을 수호하는 백호 역시 그를 싫어했다.

“앞으로는 그 능력을 쓰는 일을 최소한으로 줄여라.”

“백호 님.”

“……붉은 달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한들, 너는 나의 반려이니라. 백수의 왕 백호의 반려가 다친 토끼를 치유해 준다 하면 세상 사람의 비웃음을 받게 될 게다.”

연화는 가만히 백호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녀를 대하는 데 있어, 처음으로 보는 불편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다.

“저는 이렇게 살아왔고…… 또한 살아갈 것입니다. 어머니의 유지가 그러했습니다.”

“약사여래의 가호를 받은 자였으니 당연했겠지.”

백호는 얼굴을 찌푸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시선을 피해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방신으로서 그의 본능은 약사여래의 힘을 반기지 않는다. 자연법칙에 따라 당연한 일이었다.

왜 하필이면 그 고약한 치유의 보살이 그녀에게 먼저 힘을 주었을까.

“앞으로 힘을 쓰지 않겠다는 약속은 하지 못하겠다는 것이겠지.”

“…….”

“알겠다. 네 뜻을 존중하마.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궁까지 다시 날아가는 동안 백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연화는 자신이 잘못한 것일까 고민했지만 다시 생각해도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치유의 힘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힘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이유가 있어서일 테다. 그 힘을 쓰지 않는 건 자신을 태어나게 한 섭리에 위배되는 거라고, 연화는 확고하게 생각했다.

비록 기분이 상한 듯했지만 손길은 여전히 다정했다. 백호는 그녀를 안고 궁으로 날아 들어가 너른 복도에 안착했다. 남자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그대로 안고 사실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두 사람의 뒤쪽에 묘우가 서서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 다가오던 호접이 그를 발견하고 부르려다가 백호와 연화의 뒷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묘우의 얼굴은 다소 못마땅했다. 그 곁으로 다가온 호접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인상 풀어. 좋은 짝을 찾으셨으니 다 좋은 거 아닌가.”

“좋은 짝이라……. 인간 여자가 좋은 짝이 될 수 있다는 건가?”

“연화 님에게 해를 입히려던 뱀의 일족이 벌을 받은 것을 보지 못했어? 게다가 이미 신령들 앞에서도 반려로 연화 님을 내보이셨어. 안 될 것은 또 뭔가.”

“말도 안 되는 소리.”

묘우는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호접은 가끔 인간과 다른 세계를 불신하고 싫어하는 묘우의 성격 탓에 두통이 올 때가 있었다.

“백호 님이 이렇게 부드러운 모습을 보이시지 않는가. 연화 님도 괜찮아 보이고.”

“약사여래의 가피를 받은 자가 사방신의 신령계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묘우는 고개를 저었다. 백호 역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부정적일 것이다. 호접이 한숨을 쉬었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니 더욱 어울리지. 약사여래는 보살들 중에서도 그 힘이 사방에 뻗은 자, 좋은 짝이 될 게다.”

“아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백호 님이 어찌 판단하시든 난 반대다.”

묘우는 고집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호접은 시큰둥한 표정이 되었다.

“알고 있겠지만, 묘우……. 백호 님의 반려를 결정하는데 네 의견은 필요하지 않아.”

“아니, 나는 그분의 수호령으로 반대 의견 정도는 낼 수 있어. 붉은 달이 지면, 연화 님은 인간계로 돌아가야 해.”

호접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묘우는 고지식한 원칙주의자였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 할 때면 여우답게 교활하고 교묘했다. 그가 연화에게 이렇게까지 안 좋은 감정을 품고 있다니. 조심해야 할 듯했다.

“멍청한 짓은 하지 마라, 묘우.”

나비의 날개를 단 여인은 붉은 머리의 청년에게 주의를 주었다.

“뱀의 일족의 수장, 사혈이 벌을 받은 것을 떠올려라. 백호 님은 자신의 반려에 손대는 걸 허락하실 분이 아니다.”

“설마, 호접. 어찌 감히 내가 백호 님의 반려를 넘보겠어?”

묘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여우답게 사람을 홀리는 듯한 미소였다.

***

잠시간 백호는 연화에게 뜸해졌다. 둘이 있어도 말수가 적거나 아니면 그저 몸을 쓰다듬는 정도에서 그쳤다. 연화는 그것이 아마도 호숫가의 일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자신의 인생을 부정할 수도 없어 그녀는 초조히 기다릴 뿐이었다. 백호의 심기가 풀리기를.

점심을 먹고 정오가 지났을 즈음에 백호가 훌쩍 궁의 회랑으로 뛰어올랐다. 회랑에서 바깥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던 호접과 묘우가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백호 역시 올라온 자리에서 수하 둘을 모두 볼 줄은 몰랐던지 잠시 놀란 눈이 되었다가 턱을 쓰다듬었다.

“흠, 둘이 뭘 하고 있는 거냐? 일은 안 하고.”

“식사를 조금 늦게 마쳐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묘우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호접은 미소를 지었다. 백호의 몸에서 향긋한 풀내가 온통 풍겼다. 발에 신은 장화에도 풀물이 들어 있었다.

“어디에 또 뒹굴다 오신 건가요? 설마 인간계에?”

그녀는 다소 야단치는 것처럼 말했다. 백호는 유모처럼 구는 호접의 기세에 찔끔해서 변명처럼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찾을 게 있어서 다녀왔어. 연화가 일전 뭘 떨궜다기에…….”

말끝에 백호는 아차 싶었는지 입을 얼른 다물었다. 그는 눈을 조금 굴렸고 묘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호접의 미소는 더 짙어졌다.

“……연화 님이 인간계에 뭘 떨어뜨리셨다구요?”

“아니, 글쎄, 그냥…… 그녀에게 줄 물건이 있어서.”

백호는 짐짓 뒷짐을 지고 별일 아닌 척했다. 하지만 그의 뺨이 발갛게 홍조를 띄우고 있는 것을 호접과 묘우는 눈치챘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를 숙였다.

백호가 멀어지는 뒤로 호접이 중얼거렸다.

“방금, 얼굴 빨개지셨지?”

“그렇군. 내 참.”

묘우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그는 결코 연화를 좋게 볼 수 없었다. 호접은 알지 못하나, 뱀의 일족을 들쑤셨던 것은 묘우였다.

“너 너무 못마땅한 거 티 나는 얼굴이야.”

호접이 곁에서 주의를 주었다. 묘우는 백호를 제외하면 신령들 중 가장 오래 산 고대의 여우였다. 인간으로 둔갑해 숨기고 있지만 꼬리도 당연히 열 개였다. 그는 백호가 없을 때는 신령계를 대신 다스리기도 했다.

“못마땅한 건 사실이니 어쩔 수 없지.”

묘우는 순순히 인정했다.

“백호 님의 반려에 대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분의 뜻에 따라야 한다. 우리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 말했어, 묘우.”

“길짐승과 날짐승을 다스리는 분이시다. 백성들의 마음도 조금쯤은 생각을 해주셔야지.”

“백성들 중 백호 님의 반려가 인간이라는 것에 심려하는 자가 그리도 많은가? 신령들도 연회 이후로 다 받아들이고, 불만을 가진 것은 묘우 너 하나뿐인 거 같은데.”

호접이 투덜거렸다. 그녀가 보기에 연화는 충분히 백호의 반려가 될 만한 여인이었다.

연화는 몸가짐이 고상하고 차분했다. 함부로 신령의 시녀나 시종들에게 하대하고 부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합격점이었다. 조심스럽고 사랑스러운 언동은 호접이 보기에도 좋았다. 백호가 연화에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것이 이해가 갈 정도였다.

호접은 꽃가루를 이쪽에서 저쪽으로 나르는 나비의 신령, 두 사람의 마음 같은 것은 그녀의 눈에 아주 투명하게 보였다. 시작은 공물을 대신하는 것이었다 하나, 생전 연애를 해본 적이 없는 다혈질의 신과 수줍은 여인은 서로에게 쉽게 빠져들었다. 이제는 갈라놓기 어려울 정도였다.

“훼방이나 놓지 마라. 두 분은 아주 잘 어울리니까.”

호접은 연애에는 젬병인 묘우를 보면서 턱을 들어 올렸다. 으스대는 투의 말에 묘우도 웃어버렸다. 하지만 웃음과는 반대로 묘우의 마음은 어두웠다.

금수의 붉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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