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언제쯤일까, 내가 떠나는 시간.’
생각하면 다시 우울해지곤 한다. 연화에게 백호는 가장 고마운 존재였고 또한 처음으로 마음에 들어온 남자였다. 하지만 절대로 그녀 자신이 마음에 굽힐 수 없었다. 설사 백호가 너른 자비심으로 허락한다고 하더라도.
묘우가 그랬다. 사방신의 질서에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일이라고.
발 아래로 사박거리며 발소리가 났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상쾌하고 청량한 공기가 폐 속을 파고들었다. 호접은 이곳이 인간계와 물리적 장소는 같지만 신령들의 차원이라는 말을 했다. 연화와 마을 사람들이 살던 곳과 같은 산맥이었지만 여기서 나가려면 신령의 도움이 필요했다. 백호의 허락이 없다면 절대 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공기가 찬데 나와 있구나.”
소리도 없이 다가온 따뜻한 손이 연화의 어깨를 감싸 쥐었고 그녀는 조금 놀라서 몸을 움찔 떨었다. 놀라는 작은 동물을 보는 것처럼 재미있게 눈을 빛낸 백호가 연화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커다란 자신의 품으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신령들에게는 적당히 좋은 날씨지만 네게는 좀 차가울 거야. 겨울은 지났지만 바람이 차다. 옷을 두텁게 입고 다니거라.”
남자는 짐짓 그녀를 타박하면서 자신의 몸에 걸쳐져 있던 푸른 마괘(馬褂, 조끼의 일종)를 벗어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의 몸에는 종아리까지 오던 마괘를 걸치자 연화의 가느다란 몸이 폭 감싸여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발밑으로 옷자락이 조금 끌려 연화는 마괘의 끝을 쥐어 손에 감았다.
“저는 이런 날씨가 좋습니다. 차갑고 상쾌하고요. 제가 보던 것과 같은 산인데 전혀 다른 장소인 것 같은 느낌이에요.”
연화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많이 익숙해진 그녀는 백호의 몸에 기대서 그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었다. 얇은 천옷 하나만을 입은 남자의 몸은 너르고 따스했다.
“그래. 이것이 내 영토다. 같은 장소라도 신령들이 사는 차원과 인간들의 차원, 저승의 주민들이 사는 차원이 모두 다르지. 하지만 일단 이 산속에 들어온다면 내 영토에 발을 딛는 것이다.”
백호는 연화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여전히 붉은 달은 위세를 떨쳤고 그는 발정기였다. 여인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기에 신은 완전히 몰두해서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참 작고 가느다란 몸이야.”
남자는 녹아내릴 듯 가느다란 그녀의 손목을 잡고 투덜거리듯 말했다. 연화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난처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이 커다란 산주의 품에 안겨 있는 것에 익숙해졌다. 허벅지 쪽으로 백호의 커다란 양물이 뜨겁게 느껴졌다. 연화는 그것이 기쁘면서도, 조금 서글퍼졌다.
‘어떤 여인이었더라도 백호 님께는 비슷했겠지.’
그리고 세상 어떤 여인이라도 백호를 거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성적인 매력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평상시에도 잠자리에서도 다정한 사내였다.
한 달이 기한이라 하였다. 벌써 스무 날이 넘게 지났으니 며칠 남지 않았다. 연화는 물끄러미 백호의 강인한 턱선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연화를 끌어안고 있었다.
‘내가 떠나더라도…… 백호 님은 언제나와 다름없이 살아가시겠지.’
바람이 불어 머리를 날렸다. 연화는 망설이다가 까치발을 들어 백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백호는 눈을 크게 떴다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쩐 일이냐? 밖에서는 수줍다더니.”
남자는 크게 웃으면서 연화를 끌어안고 입맞춤을 깊이 했다. 입술을 열고 그 안 점막을 깊숙이 핥는 입맞춤에 연화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다른 이의 뜨거운 숨결이 입 안으로 밀려들어 온다. 질척하게 목구멍 안까지 핥을 기세로 밀려드는 백호의 혀는 이제 쾌감이었다.
곧 그의 손이 연화의 허리를 감싸 안고 치맛자락을 걷어 올렸다. 연화는 화들짝 놀라서 그의 손을 막았다.
“배, 백호 님, 여기는…….”
“왜?”
“누가 볼 수도 있으니까……. 백호 님!”
“보긴 누가 보겠느냐, 목이 달아나고 싶지 않다면. 신령들은 모두 물렸으니 염려 마라.”
그래도 손을 밀어 넣는 남자를 말리면서 연화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아침의 누각이다. 아무리 신령들을 물렸다고 해도 완전히 개방된 공간에서 관계를 갖는 건 연화의 상식선에서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었다. 백호의 손을 부여잡고 그녀는 허겁지겁 그를 밀어냈다.
“이리도 수줍음이 많아서야.”
백호가 투덜거렸다. 짐승들의 수호자, 초목의 지배자인 그는 사방신이지만 그 본성이 인간보다는 짐승에 더 가까웠다. 인간들이 교미를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이해는 하지 못한다. 하물며 지금까지 자신과 연화는 수를 셀 수도 없이 교합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아직까지도 수줍음을 드러내는 그 부분이 더 귀엽기도 해서 그는 웃음을 띄고 연화를 번쩍 안아 들었다.
“백호 님!”
“아, 그래. 날 부르지 않아도 여기 있어.”
백호는 2층 누각 난간에 발을 대고 높이 뛰어올랐다. 연화는 세찬 바람이 뺨을 스치는 것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손이 백호의 목에 바짝 매달렸고, 남자는 피식 웃으면서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무서워하지 마. 일전, 더 높이 날지 않았었느냐.”
눈을 꽉 감았던 연화는 한쪽 눈을 깜박이며 떴다. 몸은 느리게 강하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온기를 담은 공기가 둘의 몸을 받쳤다. 연화는 하늘을 유영하는 기이한 감각에 떨리는 숨을 뱉었다.
“그래, 이제 괜찮다는 걸 알겠지?”
백호가 크게 웃었다. 그의 흰 장포가 바람에 날려 허공에 두둥실 떴다.
남자는 품 안의 여인을 부드럽게 품어 차가운 공기에서 보호하면서 느릿하게 하늘을 날아 건너편 산으로 날아갔다. 산맥 봉우리 근처까지 가서 빽빽한 나무들 틈 사이로 백호의 몸이 내려앉았다. 흙먼지조차 나지 않는 가뿐한 움직임이었다.
품 안에서 고개만 내밀어 하늘을 구경하던 연화가 조심스레 그의 팔 안에서 내려섰다. 백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나무 몇 그루의 뒤로 돌아갔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연화가 탄성을 질렀다.
산꼭대기에 가까운 이곳에,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고 광활한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건너편 산의 돌아앉은 자리라 누각에서는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너무 놀라워서 연화는 입을 벌렸다. 오전의 햇살이 쨍하게 빛나며 호수의 수면을 비췄다. 하늘만큼 푸른 그 수면은 잔물결만 있을 뿐 고요했다.
“이런 곳에 호수가 있다니…….”
연화는 놀라움에 말을 더듬었다. 눈을 크게 뜬 그녀는 백호를 올려다보았다.
“너무 아름다워요.”
“아름답지. 이 호수는 수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 수하를 탐내는 청룡이 자꾸만 자신의 영토라고 해서 골치 아플 정도야. 아름다운 별장을 가지고 싶은 게지.”
백호가 투덜거렸다. 물을 다스리는 청룡의 입장에서 욕심을 낼 만한 호수였으나 백호 역시 빼앗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치면 물 밑의 어두운 대지는 현무의 것이겠다. 그 밑에서 자라나는 초목들은 전부 백호의 것이겠고.
그는 상제의 앞에서 청룡이 호수의 소유권을 주장할 때마다 턱도 없는 소리 말라며 내치고는 했다.
연화는 호수의 기슭으로 다가갔다. 잔잔한 물결이 고운 모래 위를 천천히 드나들었다. 그녀의 분홍색 꽃신 아래로 모래들이 밟히는 소리가 바삭거리며 났다. 호접이 특별히 입혀준 고운 붉은 빛의 치마가 바람에 뒤로 날렸다.
그녀는 쪼그려 앉아서 호수의 물을 손에 담았다. 손바닥 안으로 맑은 물이 고여 찰랑였다.
“마음에 드느냐?”
백호가 곁에 와서 함께 쪼그려 앉았다. 이 귀여운 여인이 하는 짓은 하나같이 사랑스러웠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는 커다란 다갈색 눈도 귀여워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손을 기울여서 물을 흘렸다. 산등성이의 바람에 물방울이 흩날렸다.
그는 그녀의 콧등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연화는 따뜻한 입술을 느끼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 때 그들의 뒤쪽 나무 사이에서 낑낑대는 소리가 났다.
“……무슨 소리지요?”
고요한 공간에 울린 짐승의 소리였다. 백호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보나마나 다친 토끼나 다람쥐나, 뭐 그쯤 아니겠느냐. 그냥 두거라.”
“하지만요.”
작은 짐승의 소리가 분명했다. 동정심을 이기지 못한 연화는 잡는 그의 손을 물리고 조심히 나무 수풀 근처로 다가갔다. 백호의 말대로 그곳에 다친 토끼가 쓰러져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피가 쏟아지는 상처가 상당히 커서 허벅지 쪽이 완전히 갈라져 붉은 근육이 드러나 보였다. 연화는 놀라서 입을 가린 채 내려다보았다.
“삵에게 물린 게지. 용케도 도망쳤나 보군. 본래 한 끼니 거리도 안 됐을 텐데.”
가까이 다가온 백호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온갖 짐승들의 왕인 그는 지겹도록 보는 광경이었다. 적자생존,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고 사는 것이 당연한 숲의 세상.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 있는 연화를 보면서 백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상관 말아라. 저 녀석의 목숨이 여기까지인 것이다.”
“잠시만요, 백호 님.”
인간들이란 동정심이 지나치게 많고 약하다. 게다가 약사여래의 힘을 받은 이 여인은 일반적인 인간들보다 더 감정적으로 연약했다.
“연화야.”
“잠시만…….”
연화는 무릎을 꿇고 토끼의 위에 손을 얹었다. 곧 노란 빛이 그녀의 손에서 솟아나왔다. 약사여래의 가피를 입어 발하는 치유력이었다. 백호는 못마땅한 얼굴로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곧 연화가 손을 떼어냈다. 허벅지 근육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벌어졌던 상처는 말끔히 봉합되어 있었다. 토끼는 팔딱 뛰어 일어나서 연화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백호의 눈치를 흘끔 살피던 토끼가 곧 폴짝폴짝 뛰어서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연화는 옅은 미소를 띤 채 토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약사여래의 가피를 입었던 건 알고 있었으나 꽤 강한 힘이구나. 이건 처음 알았는걸. 치유력을 밖으로 발할 수 있을 정도라니.”
백호는 한숨을 쉬었다. 보살들의 가피란 너르지만 얕아 이능을 발휘할 수 있을 정도인 경우는 지극히 드물었다. 그간 연화를 가까이 두며 가피가 상당히 강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하지만 그리 기쁘지는 않았다. 남자의 목소리는 무감정했다.
“만족스러우냐?”
금수의 붉은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