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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31화 (31/113)

31화

신음하는 가족들의 사이로 다가가 만희는 손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창백하게 핏기를 잃은 그녀의 눈은 초점이 없었다. 만희는 히죽 웃었다.

“그래, 뭐…… 이런 얼굴도 괜찮지.”

완전히 생기를 잃고 절망한 여자의 얼굴. 왕은 그런 표정도 꽤 좋아했다. 그는 손녀의 한쪽 손을 풀어 단단해진 자신의 고간 위로 문댔다.

뜨거운 사내의 물건을 손바닥에 대고 손녀는 처음에 무슨 일인지 모르는 얼굴로 왕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눈이 커졌다. 상황을 파악하고 그녀는 신음했다. 폭군은 욕망이 분명한 눈으로 그녀를 능욕하고 있었다.

“왜, 싫으냐?”

“아…….”

“싫다면 말해라. 멈춰줄 수도 있으니.”

자비로운 척하는 말투에 손녀는 눈치를 보았다. 그녀는 하지만 알고 있었다. 만희는 결코 대가 없이 그냥 놓아줄 자가 아니었다.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 무슨 대가를 치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옵니다.”

채찍질에 소리를 지르던 목은 갈라져 거친 소리가 나왔다. 얌전히 입을 다물고 눈을 내리 깐 여인을 보면서 왕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제법 눈치가 빠른 아이로구나. 만약 그만둬 달라고 했다면…….”

“…….”

“네 부모의 팔부터 잘라 협박하는 재미가 있었을 텐데.”

왕의 말에 여자는 몸이 굳었다. 곁에서 고통에 신음하던 부모도 눈을 크게 뜨고 왕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진담일 거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들은 알고 있었다.

왕은 폭정으로 유명했고 소문에 의하면 사람을 죽여 그 생살을 씹어먹는다고 했다. 잔인한 손속으로 무패의 장수가 되었고 기어코 사촌 혈육마저 살해해 왕의 자리에 올랐다는 사내.

다만 믿어지지 않는 것은 그의 희생양으로 자신들이 선택되었다는 사실뿐이었다.

“전, 전하……. 제가 모든 말씀을 받들 테니 저희 가족만은, 저희 가족만은…….”

여자는 덜덜 떨며 애원했다. 비록 조부는 죽었지만 그는 나이 먹고 이미 병이 있었던 노인이다. 나머지 식구라도 구할 수 있다면 그녀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다.

“음? 무슨 소리냐.”

만희는 그녀의 턱을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사내의 거대한 손은 언제든 여자의 목을 조를 수 있었다. 두려움에 떨리는 그녀의 어린 얼굴을 보면서 왕은 입가를 올렸다.

그는 천천히 여자의 귓가에 입술을 댔다. 사내의 뜨거운 숨결에 그녀는 흠칫하고 고개를 숙였다. 여자에게서는 오래된 몸냄새와 흙냄새가 났다. 비위가 상하면서 동시에 구미가 당기는 이상한 냄새다.

만희는 입맛을 다셨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의 가슴을 한 손에 잡고 주물렀다. 나이가 어려 제법 탐스럽고 탄력 있는 유방이다. 비록 피부는 먼지와 흙으로 더러웠지만 가지고 놀기는 좋은 몸이었다. 경험이 없는지 움찔거리는 몸이 더 입맛을 돋웠다.

“네 가족이 죽더라도 너는 내 말을 듣는 것이다. 어찌 내게 조건을 달지?”

“조, 조건이 아니오라……! 저는, 그저 전하의 자비를 바라옵고…….”

“그게 조건이지. 왜 내게 자비 따위를 바라는 것이냐. 네가 대체 무엇이기에 내게 없는 자비를.”

만희는 웃었다.

슬슬 두통이 심해지고 있었다. 관자놀이에 칼을 박는 것처럼 뇌를 들쑤시는 고통. 그는 안구를 꾹 눌렀다. 안압이 올라가 눈 안의 혈관이 터지는 것 같았다.

“오늘도 불쾌하기 그지없다.”

그는 중얼거렸다. 그의 말을 알아들은 여자는 목을 움츠렸다. 방금 웃던 왕은 눈을 누르면서 혼자 뭔가를 지껄였다. 그의 발치에 떨어져 있는 채찍에는 가족들의 살점과 피가 묻어 엉망이었다.

두통과 함께 여자에 대한 입맛도 싹 사라졌다.

“아무래도 너희를 죽여야 내가 좀 기분이 나아지겠어.”

만희의 말에 일가족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채찍을 들고 아버지의 앞에 선 왕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입가만 올렸다. 기이하고 추한 얼굴이었다.

“전, 전하……! 제발!”

“목숨만은, 전하!”

“시끄럽군.”

일가족이 일제히 터뜨린 애원에 만희는 얼굴을 구겼다. 약하고 가난한 자들의 목소리는 그가 가장 혐오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는 자신의 손목만큼 굵은 채찍을 휘둘렀다.

“크헉!”

짜악 하는 잔인한 소리와 함께 살점과 피가 흩날렸다. 아버지의 비명이 허공을 울렸고 가족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채찍은 연달아 휘둘러졌고 네 번쯤 뒤에 아버지는 정신을 잃고 늘어졌다. 몸 전체가 피투성이였다.

“인내심이 없어. 능력도 없고, 자신감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 대체 너희들이 내 영토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지?”

만희는 눈을 희번득거리며 가족들을 둘러보았다.

그 때 엎드려 있던 백관들 중 한 명이 일어났다. 왕의 앞에 들 수 있는 백관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직위가 높지 않은 하급 관리였다.

“전, 하……. 부디 이 가여운 자들에게 용서를.”

비교적 젊은 나이의 관리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왕의 앞에 나아가 엎드렸다. 목숨을 건 용기였다.

“비록 이 가족들이 죄를 지었다 하나, 이미 그 일을 주도한 노인이 벌을 받아 사망하였고……. 일가족 역시 매를 맞는 벌을 맞았으니 자비를 베푸시길 말씀 올립니다.”

하도 간만에 그의 행동에 제동을 거는 자가 나타나 만희는 조금 놀라워서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는 엎드린 관리의 등을 내려다보았다.

“……넌 뭐냐.”

“저는 6품 사관으로 이름은…….”

“아니, 네놈의 이름이 궁금한 게 아니라. 네가 대체 뭐기에 내 앞에 허락도 없이 나서서 말을 꺼내냐는 것이다.”

만희는 불쾌함을 감출 생각이 없었다. 직언을 하는 관리는 일전에 모두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는 경고도 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관리의 비명이 터졌다. 갑자기 시작된 신하에 대한 매질에 백관이 움찔했으나 누구도 나설 수는 없었다. 만약 그런다면 매질의 대상은 자신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온통 관리의 비명만이 울리던 때 부들부들 떨며 울던 가족들 중 손녀가 기어코 소리를 질렀다.

“이 간악한 자! 왕이랍시고 사람들을 쥐어짜서 제 배만 불리는 자가, 죄 없는 사람들을 전부 죽이고 다니고!”

“오호라.”

이제야 좀 재미있어진다. 만희는 히죽 웃으면서 이제 피투성이가 된 채찍을 끌고 일가족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여자의 앞에 서서 고개를 갸웃했다.

“중생들을 보살피시는 신과 보살과 부처께서 너를 용서하지 않으실 게다! 청룡께서 널 그냥 두지 않으실 거야! 살아서, 아니면 죽어서라도 네 벌을 면치 못하리라. 어찌 왕이라는 자가 이리도 잔인할 수가 있는 것이지!”

“신과 보살과 부처라.”

왕은 가볍게 웃었다. 그의 뒤에서 매질을 당한 관리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움직이지 못했고, 눈앞의 일가족은 눈물콧물로 얼굴이 엉망이 된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력한 자들. 이리도 힘이 없으면서 그저 신에게 기댄단 말인가.

그는 놀리듯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 누구랬지? 약사여래의 가호를 받았다던 여자가 있었지. 그 계집도 내 손에 죽었어. 대체 이 세상에 어떤 신이나 보살이 네놈들을 보살펴준다는 말이냐.”

만희는 히죽거리며 웃었다. 불쌍하고 가엾은 자들은 머리까지도 모자라, 고문하고 괴롭히기에 아주 재미가 있었다.

“수국을 가호하는 신 청룡이라, 나는 그자조차 믿지 않지만 아무런 벌도 내려오지 않았지. 그 대신 그를 믿는 너희가 이렇게 내 앞에서 벌을 받고 있지 않느냐.”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던 여자는 주춤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아직 스물 정도밖에 안 된 그녀의 앳된 얼굴을 보며 왕이 혀를 찼다. 저토록 어리석고 약하면서 뒷일을 생각하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는 계집이라니.

순간 두통이 더 극심하게 엄습했다. 신경을 전부 난도질하는 듯한 고통에 만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는 이를 갈면서 으르렁댔다. 갈 곳 없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왕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잠깐 사이 그의 눈은 마치 피가 차오른 듯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마치 팔척장신의 귀신 같은 모습에 그를 본 모두가 숨을 멈췄다. 그는 긴 팔다리를 휘저으며 비틀거렸다.

“죽여, 다 죽여라. 전부 다 사형장으로 끌고 가!”

“전, 전하.”

“내 말이 안 들리는 거냐? 아니면 내 손으로 네놈들까지 전부 처형시켜 줄까!”

악에 받친 채 사내는 검을 뽑아 들었다. 그는 그대로 석벽 위로 검을 휘둘렀다. 일가족은 미처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일곱 명분의 피가 석벽 위로 튀었고, 그들의 몸 위로 만희는 셀 수 없이 많은 칼질을 했다.

마치 고깃덩이를 짓이기듯 희생자들을 죽이는 것을 보며 백관이 두려움에 떨었다.

피를 뒤집어써 악귀 같은 몰골로 만희가 웃었다. 이제 두통은 더욱 심해져 머릿속이 윙윙 울렸다. 귓가에 이상한 환청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광소를 터뜨렸다. 하늘은 흐려 어두웠고 곧 비가 쏟아질 모양새였다. 만희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이성적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점점 더 그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

“깨었느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사방이 환했다. 인간계에 있을 때는 한 번도 늦잠이라고는 몰랐던 터라 연화는 이럴 때마다 조금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곁에서 백호가 다정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어서 더했다.

“죄송해요, 또 늦잠을 자버렸네요.”

“뭘 죄송해. 남는 게 시간인데 이 정도 자는 거야 어떻다고.”

백호는 씩 웃었다. 수줍어 하는 연화는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늦은 아침의 밝은 햇살 아래에서 연화는 항상 더 아름다웠다. 그의 눈에는 언제나 예뻐 보였지만 이토록 밝은 공기 속에서 그녀가 더 잘 보여서 좋았다. 투명한 아침 햇살과 연화의 희고 맑은 피부가 잘 어울렸다.

금수의 붉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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