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샘의 정령은 물 표면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고요히 사라져 버렸다. 그 위로 흐린 사람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어머니.”
그립고 그리운 분이다. 연화를 곱게 길러준 양어머니는 그사이에 십 년은 더 늙은 듯 힘겨워 보였다. 그녀는 멀건 죽을 끓여 한 숟갈씩 힘겹게 떴다. 기침이 자꾸 격하게 튀어나와 죽 한 숟갈을 삼키기가 힘들어 보였다.
‘내가 곁에 있었다면 괜찮았을 텐데.’
지병인 천식도 연화의 능력으로 잠재울 수 있었다. 그녀는 죄책감과 안타까움에 입을 막았다. 영양실조로 인해 몸이 뼈가 나올 정도로 말라버린 양어머니와, 지붕을 수리하다가 다쳤는데도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하는 촌장네 아들의 모습도 보였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화면이 바뀌려는 순간, 연화의 어깨가 거칠게 흔들렸다.
“연화야!”
“헉……!”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숨을 헐떡였다. 자신도 모르게 이미 샘으로 거의 코가 닿게 몸을 기울인 터였다. 연화는 공포에 질린 채로 자신을 깨운 백호를 올려다보았다.
근심은 덜해지기는커녕 더 깊어졌다. 그녀는 백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어깨의 옷이 조금씩 젖어들었다.
“청수희.”
백호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허공으로 샘의 정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반려님의 요청을 들어드렸을 뿐이랍니다.】
“일을 오히려 악화시켰어.”
【물은 공물에의 보답으로 소원을 들어드릴 뿐.】
정화수를 놓고 비는 행위 역시 기도라는 정성을 담보로 소원을 비는 것이다. 공물이 하잘 것 없어 샘의 정령이 그 소원을 들어주는 일은 드물다. 술 한 잔에 차원을 건넌 소식을 들려주었으니 이 정도면 샘의 정령은 후한 호의를 베푼 셈이었다. 백호는 샘을 노려보았다.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었지?”
대답 없이 머릿속으로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불쾌함에 신은 샘가에 숙여 표면에 손을 댔다. 천천히, 그의 손끝에 닿은 수면에서부터 수증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수면이 밑으로 내려갔다. 눈에 띌 정도로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물의 양에 백호의 머릿속으로 청수희가 한숨을 쉬었다.
【장난도 못 칠 양반이군요. 그만하세요.】
“네가 지금 신에게 장난을 쳤다고 네 입으로 말하는 것이냐?”
【물의 영들은 원래 장난기가 많아요.】
답도 없이 백호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수증기가 온 샘을 삼킬 정도로 피어올랐고 수면이 펄펄 끓었다. 결국 청수희가 비명을 질렀다.
【그만두시라구요! 이러다 제 샘이 마르겠어요!】
“마른다 한들 무슨 상관이지?”
【그럼 인간계에 전부 물이 말라요! 반려님의 마을도 더 식량난에 시달릴 텐데 괜찮으신가요?】
그 말에 백호가 멈칫 손을 뗐다. 하지만 그는 몸을 일으키지 않고 한쪽 눈썹을 올렸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연화의 마을에 네 물을 흘려라.”
【제 물을 흘린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시는 건가요?】
“당연하지. 허기짐을 면하게 하고 치유를 돕는 물을 흘리라는 뜻이다.”
【…….】
청수희는 바로 답이 없었고, 백호는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그 때 그의 소매를 조금 당기는 손이 있었다.
“백, 백호 님…….”
연화가 작게 속삭였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젖어 있었지만 진정한 눈치였다.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인간계의 일은 인간계의 섭리로 돌아가야 하겠지요……. 제가 돌아가면 모두 해결될 문제입니다. 청수희 님께는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어차피 얼마 후면 돌아갈 몸. 그때까지는 모두들 견뎌줄 수 있을 것입니다.”
애초에 공물 대신 잡혀 온 몸이었다. 마을이 걸려 있지만 않았어도 차라리 죽기를 택했을지 모른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이 조금만 견뎌주기를 기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붉은 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질 테니까.
“돌아가면 그때, 제 어머니와 모두에게 보답을 할 것이니…….”
순리를 어겨가면서까지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다. 신령계와 인간계가 유별하여 호접 외에는 어지간한 자들도 함부로 드나들지 못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았다. 자신의 가족과 마을 때문에 그 순리를 어길 수는 없었다.
백호는 말없이 연화를 끌어안았다. 허공으로 청수희의 한숨이 들려왔다.
【일단, 이건 제 잘못이 아닌 건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백호 님.】
“…….”
【하지만…….】
샘의 표면이 조금씩 일렁이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시작된 파도는 조금씩 철썩이며 수면을 높여, 다시 샘가에 찰랑거리도록 물이 돌아왔다. 그 안에서 푸른 머리의 여인이 고개를 내밀었다.
【연화 님.】
“……네.”
연화는 백호에게서 떨어져 나와 샘가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작고 흰 얼굴은 아직 어두웠지만 애써 미소를 지었다.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식을 정말 알고 싶었거든요.”
【…….】
“제가 지금 술에 취해서 감정이 조금 격해져 있었던 거 같아요. 실례를 용서하세요.”
청수희는 묘한 표정으로 연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찰랑이는 수면에 손을 적시며 딴짓을 하다가 백호를 흘긋 곁눈질로 살폈다.
【할 수 없군요.】
“네?”
【아무런 공물 없이 해드릴 수는 없으니 뭐라도 내놓으세요, 백호 님.】
끝까지 건방진 말투에 백호가 한쪽 입가를 비뚜름하게 하고 품 안을 뒤졌다. 하지만 청수희는 연화에게 매달린 붉은 노리개를 가리켰다.
【저걸 주세요.】
“……아, 이건 안 돼요.”
귀한 물건이라고 들었다. 연화는 깜짝 놀라 노리개를 보호하려고 했지만 백호가 그것을 단숨에 떼어내 샘으로 던졌다. 퐁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 보석이 달린 붉은 노리개는 샘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과연, 화끈하시네.】
“백호 님! 그건……!”
“약속대로 해라, 청수희.”
【당신의 소원대로.】
샘의 정령은 깔깔거리고 웃으며 신나게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연화는 멍한 채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을에 풍성한 치유의 물이 흐르기 시작했을 테니 잠시간은 나을 게다.”
“…….”
“영구히는 아니고, 네가…… 돌아갈 때까지만.”
자신의 입으로 말하면서도 마음이 따끔거리며 아팠다.
백호는 사방신이었으나 인간계까지 돌봐줄 수는 없었다. 사방신으로서 가능한 각 차원의 경계가 흐트러지지 않는 방법을 찾아야 했고, 이런 임시적인 방편이 최선이었다.
청룡과의 다툼을 염두에 둔다면 못 할 것도 없겠지만……. 달은 언제 질지 모른다.
“제가 돌아갈 때까지군요.”
연화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는 안도와 애달픔이 섞인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던지신 것은 귀한 노리개가 아닙니까.”
“귀해봤자 노리개이지.”
“사방신의 반려가 달 수 있는 물건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 물건을 어찌 이런 일에…….”
“들어보렴, 연화야.”
백호는 여인의 손을 잡고 그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 노리개가 있든 없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단다. 내가 반려로 여기는 이는 노리개 하나 따위에 좌우되지 않아.”
“…….”
“노리개 이상의 가치를 할 수 있는 일에 썼으니 된 일 아니냐.”
신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큰 키를 굽혀 연화를 끌어안았다. 작고 따스한 여인은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저 일개 인간일 뿐인 제게…….”
“네가 왜 일개 인간이냐.”
연화는 더 말을 붙이지 않고 백호의 품에 얼굴을 기댔다. 너르고 포근한 품이다.
백호는 그녀를 안고 다른 봉우리로 건너뛰었다. 이곳저곳으로 건너뛰며 백호는 바람을 느꼈다. 봉우리를 건너 깊은 산으로, 산으로.
달이 아주 잘 보이는 정자에 내려서서 백호가 여인을 놓아주었다.
연화는 기운 달과 흐르는 은하수를 보며 깊어진 밤을 깨달았다. 한동안 괴롭히던 근심 걱정은 조금이나마 가셨다. 하늘에 뜬 달은 붉다. 그녀는 완전히 부푼 그 큰 달을 올려다보며 양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했다.
그리고 돌아섰을 때, 연화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푸른 눈동자를 발견했다. 다정하고 품이 넓은 신. 평생 단 한 번도 만나리라 기대하지 못했던 존재.
“백호 님은 너무 다정하세요.”
연화는 작게 속삭였다. 그는 지나치게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일생의 한 부분만을 함께 지내고 헤어져야 하는 운명으로는 잔인할 만큼.
“난 다정하지 않아.”
“제게는 친절하고 다정해요.”
곧 헤어져야 하는 사람이라고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쉽지 않았다. 연화는 계속해서 흔들리는 마음에 시달렸다. 언감생심 욕심을 낼 수도 없는 존재, 인간도 아닌 신. 잠시라도 함께 할 수 있어 행운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남자.
‘난 과연 백호 님을 잊을 수 있을까.’
사실 자신이 없었다. 그가 대단한 존재라서가 아니라 그가 이토록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라서였다.
백호는 난처한 듯한 얼굴로 허리를 숙여 연화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검은 눈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왜 그러느냐. 네 근심을 없애주었다고 생각했는데.”
“…….”
“아, 임시적이라서 그런 게냐? 그건 네가 돌아갈 때까지만…….”
“그만 말씀하세요.”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백호의 옷깃을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지극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그녀는 백호의 부드러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고 그의 따뜻한 호흡을 느꼈다. 그러지 않으면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금수의 붉은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