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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28화 (28/113)

28화

백호는 턱을 괴고 청수희가 사라지는 모양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샘의 정령이란…… 불안정하고 불유쾌하고 장난꾸러기지. 다만 공물에는 답을 하는 신령이고.”

그는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인간계와 신령계 양쪽에 적을 두고 있는 신령이니 따라가서 나쁠 일이야 없다. 밤 산책도 할 겸. 그는 연화가 기댄 창가 쪽으로 가서 창틀을 훌쩍 뛰어넘었다.

바람과 함께 허공에 몸을 던진 백호를 보고 연화의 눈이 동그래졌다. 당황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바람 위에 선 채 백호가 웃었다.

“나는 걸 보여준 건 처음이지?”

“백, 백호 님. 여긴 너무 높은 곳인데.”

백호의 궁은 깎아지른 봉우리 꼭대기에 있다. 떨어지면 뼛가루도 없이 시체를 찾지 못할 높이였다. 백호가 재미있다는 듯 크게 웃었다.

“괜찮아. 신령계에서는 바람조차 나의 종이니라.”

길디긴 백발이 흔들리며 허공에 나부꼈다. 남자의 굳건한 몸을 감싼 얇은 장포 자락이 바람을 타고 흔들렸고, 그는 허공을 밟아 연화에게 다가갔다. 여인은 놀라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지?”

“예?”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모른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연화는 놀랐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하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백호는 창가에 기대있는 연화의 턱을 살짝 잡아 눈을 맞췄다.

“우울해하더구나.”

“……아.”

“두고 온 자들이 걱정되느냐?”

그제야 무슨 뜻인지를 알고 연화가 잠시 입을 오물거렸다. 백호는 말을 이었다.

“난 내 반려가 행복하길 바란다. 비록 거기에 끝이 있다 할지라도.”

연화는 희미하게 웃었다. 배꽃처럼 희고 고운 얼굴이다. 어쩐지 그 웃음에 가슴끝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아 백호는 마주 웃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몸을 뒤집어 육신을 바꾸었다. 순간 바람이 거세게 불며 소용돌이 쳤다. 연화는 깜짝 놀라 눈을 감았고, 백호가 있던 자리에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흰 호랑이 한 마리가 허공에 떠 있었다.

그에게서 나오는 목소리는 백호의 것이었다.

【내 등에 타라.】

연화는 눈을 크게 떴다. 아름다운 흰 호랑이는 그르렁대며 머리를 낮췄다. 원래의 형상보다 연화에게 맞도록 크기를 줄인 상태였다. 백호의 시리게 푸른 눈이 연화에게 눈짓했다.

【얼른.】

“아……. 네, 네.”

연화는 서둘러 호랑이의 등 위로 올라가 털을 조심스레 잡았다. 거의 느껴지지도 않는 그녀의 손길에 백호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꽉 잡아. 떨어질지도 모르니.】

“예……. 그런데 따가우실까 봐.”

【네 손으로 잡아 뜯는대도 내 털은 멀쩡하단다.】

백호가 크게 웃었다. 곧 그의 등이 크게 일렁이며 다리가 허공을 박찼다. 너른 하늘 너머로 쏜살같이 튀어나가는 서슬에 연화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백호의 등 털을 꽉 붙잡았다. 머리와 옷자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뒤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신령과 원로들이 여전히 연회를 즐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순식간에 뒤로 멀어져 갔다.

호랑이의 굵은 발이 허공을 달렸다. 그는 날짐승이 아니라 스스로 날 수는 없었으나 바람이 그를 도왔다. 응축된 공기의 덩어리를 밟고 달리면서 백호는 등 위에 탄 연화의 따뜻하고 가벼운 무게감을 느꼈다. 처음에 떨던 여인은 잠시 시간이 지나자 안정을 찾는 듯했다.

그녀는 털을 꼭 쥔 채로나마 상체를 일으켜서 조심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온통 푸른 하늘과 진녹의 산이다. 저 밑으로 보이는 거친 협곡 사이로 흐르는 물줄기가 보였다. 산맥 사이로 군집해 있는 높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들이 마치 날카로운 창을 모아놓은 것 같았다.

【저곳은 신령계에서 가장 영험한 것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건방지게 하늘을 가리켜 손가락질을 하는 것들이지.】

“영험한 것이라 하시면.”

【오래 살고 그만큼 덕이 높아 신에 가까워진 것들이다. 인간 세상에서 보통 산이나 나무에 혼이 깃들었다고 믿을 때는 대부분 그런 것들이지.】

“그렇다면 서낭당이나 전각에 깃든 신이라고 저희가 믿는 분들인가요?”

【그렇다고 봐야지.】

아주 많은 창 형태의 봉우리들이 각자 다양한 형태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나름대로 이 땅에 자신의 저택을 지닌 자들이다. 비록 백호의 밑에 있지만 신령계의 원로로 기능하기도 하는 무리여서 백호는 꺼림칙함에 입맛을 다셨다. 지금은 백호의 궁에 전부 모여서 이 봉우리들은 대부분 비어 있을 것이다.

원로들 중 몇몇은 인간계와 통하는 간접적인 통로를 지닌 것들이라 어쨌든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계의 일이 그리 걱정된다면…… 일단 샘의 정령에게 가보자꾸나.】

“처, 청수희 님께요? 그분은 연회장에…….”

【그 녀석은 먼저 가는 방법이 있단다.】

연화는 당황해서 입을 벌렸다. 자신이 신경 쓰여서 여기까지 백호가 달려왔구나. 호랑이는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듯 웃었다.

【나는 내 반려가 행복하길 바란다.】

“백호 님.”

【자, 잔소리는 말고.】

호랑이의 몸이 아래로 기울었다. 높은 봉우리들 중 하나로 쏜살같이 내려앉은 백호는 사뿐히 착지했다. 그의 네 발 근처에서 먼지 바람이 풀풀 일어났고 쿵 하는 소리에 하늘이 울렸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다시 인간으로 화했다. 백발의 남자는 호랑이의 높은 등에서 떨어지는 연화를 가볍게 받아 안아 들었다. 품 안으로 폭 안겨드는 가벼운 몸이 놀라 경직된 채였다.

“변하실 때는 미리 말씀을 좀……. 놀랐지 않습니까!”

놀란 가슴을 채 진정시키지 못한 연화가 눈을 크게 뜨고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백호가 씩 웃으며 그녀의 뺨을 두드렸다.

“그래, 활기 있어 보여서 조금 낫군. 나한테도 못마땅한 게 있으면 소리를 좀 높여보라고. 그런다고 화를 낼 만큼 좀생이는 아니니까 말이야.”

“……아, 정말이지.”

짓궂으십니다, 라고 말했지만 단어는 연화의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백호가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몸을 땅에 내려놓았다.

“여봐라, 나오너라!”

하지만 문 안에서는 묵묵부답이었다. 백호는 매우 빠른 속도로 기분이 불쾌해졌다. 소중한 반려를 데리고 여기까지 왔는데 감히 미리 불러놓은 주제에 부름에 답이 없다니.

“청수희!”

【아―아, 엄청 빨리도 오셨네요. 저는 적어도 연회라도 끝내고 오실 줄 알았더니.】

청수희가 느릿하게 샘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물빛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턱을 괸 채 백호를 올려다보았다.

【진짜 급하시긴 한가 봅니다, 백호 님?】

“……하여간 건방지지 않을 때가 없구나.”

샘의 정령, 청수희는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물의 신령은 청룡과 백호의 권속이다. 양쪽 모두에 속한 자라는 사실은, 둘 모두에게 속박이 크지 않다는 뜻도 된다. 그녀는 백호에게 그리 고분고분한 신령이 아니었고 사실 백호 역시 그 사실에 크게 괘념치 않았다.

“네가 오라고 했으니 말을 지켜라.”

청수희의 푸른 머리가 물속으로 나풀거리며 흘렀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끝도 없이 길어서, 샘의 저 깊은 속, 아주 어둡고 검은 중앙까지 흘러들어 가 있었다.

연화는 다소 두려운 마음으로 샘의 정령을 바라보았다. 연회장에서의 청수희와 지금의 그녀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 연회장에서는 가볍고 발랄해 보였으나 지금은 위압감이 느껴졌다.

청수희는 흥미로운 얼굴을 하고 연화에게 찡긋 한쪽 눈을 감아 보였다.

【왜 무서워하는 얼굴이세요, 반려님.】

“아뇨, 그게 아니라…….”

“괜찮아. 저것이 저래 보여도 모든 민물의 신령이니 여기서야 좀 달라 보일 수밖에 없다.”

백호가 연화의 상태를 눈치채고 혀를 찼다. 샘의 정령이라 이름 붙었으나 청수희는 모든 민물과 통하는 자였다. 그만큼 강한 원로이니 본체가 존재하는 이 장소에서는 위압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청수희는 팔꿈치를 짚고 둘에게 다가왔다. 뱀처럼 긴 그녀의 몸체가 샘으로 죽 연결되어 끊이지 않았다. 연화는 두려움에 질린 채 몸이 굳었다. 샘의 정령은 창백한 얼굴을 들어 인간 여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무엇을 해드릴까요, 반려님. 당신이 제게 술 한 잔을 내리셨으니 저도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하겠습니다.】

청수희의 눈은 기묘했다. 어두운 청색의 눈동자는 마치 거울과도 같아서, 연화는 거기에 비친 자신의 근심과 걱정을 읽어냈다. 그녀는 홀린 것처럼 중얼거렸다.

“어머니, 어머니를 보여주세요.”

【당신의 어머니 말씀이시군요.】

“잠깐만, 연화야, 조금 더 생각해서…….”

【늦었습니다, 백호 님. 소원은 그것으로 끝이에요.】

샘의 정령이 느리게 말했다. 백호가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하여간 물귀신들이란 홀리길 잘 홀려서.”

소원 하나라고 했으니 보여주는 것으로 끝이다. 다른 식으로 소원을 말했다면 샘의 정령이 힘이 닿는 한 도와줬을 텐데. 소식을 직접 눈으로 볼 수야 있겠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이상하군요.】

청수희의 눈이 희뿌옇게 빛나다가 가라앉았다.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 백호를 돌아보았다.

【……반려님의 어머니께선…… 제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 계시는데요?】

“무, 무슨 말씀이세요?”

연화가 당황해서 입을 막았다.

【노란 빛에 휩싸인 형상. 아마도…….】

노란 빛, 약사여래를 뜻하는 색이다. 연화의 어머니는 약사여래의 가피 아래 있었으니 노란 빛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연화의 친어머니다. 보고자 하는 자는 인간계에 있는 양어머니이다.”

백호가 그녀를 안정시키려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아하.】

청수희가 한층 더 재미있다는 듯한 얼굴로 씩 웃었다. 그녀는 잠시 눈을 빛내다가 샘으로  전 연화를 돌아보았다.

【자, 이쪽으로 와서 수면을 보세요. 유혹에 지지 않도록 조심하시구요.】

홀린 것처럼 연화는 청수희의 뒤를 따라가 샘의 표면을 들여다보았다.

금수의 붉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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