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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27화 (27/113)

27화

“뭘 잘했다고 날 쳐다보느냐? 청수희.”

샘의 정령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희끄무레한 하체는 보일 듯 말 듯 길게 이어져 작은 쟁반에 담긴 물그릇에 이어져 있었다. 힘을 보존하기 위해 본체인 자신의 샘과 분신을 이어놓은 채였다. 청수희는 아름답고 창백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백호 님도 고민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아주 세속적인 고민 말입니다.”

“무슨 헛소리야, 나는 사방신이다. 너 같은 정령과 같은 줄 아느냐.”

그는 한심하다는 투로 답했다. 하지만 샘의 정령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물은 세상 만물을 비추는 반영. 청수희는 모두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을 지켜보는 존재였다. 사방신 역시 거기서 예외일 수 없었다.

백호는 못마땅한 기분으로 술 한 잔을 들이켰다. 입맛이 썼다.

“반려, 연화 님 드십니다.”

호접의 목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장을 가득 메운 원로들의 눈이 한순간 입구로 향했다. 입구에서 어두운 남색의 장포를 입은 인간 여인이 들어섰다.

거대한 연회장을 메운 온갖 원로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에 연화는 잠시 얼굴을 붉혔으나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녀는 단정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백호의 곁에 섰다.

“아름답구나.”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입 꼬리를 올렸다. 정식 반려의 치장에 비하면 많이 간소한 차림새다. 하지만 그녀는 진흙탕 속의 진주처럼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허리춤에 매달린 붉은 노리개가 순간 그처럼 기꺼울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작은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옆자리에 앉히며 그는 연화의 작은 뺨에 입을 맞췄다.

“저분이 그…….”

“그래, 이번의 반려님.”

원로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백호는 일부러 원로들에게 보란 듯이 연화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인간이라니 못마땅해하는 기색들이 있었으나 백호와 감히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연화는 다소 수줍은 기분으로 눈을 내렸다가 반사적으로 다시 들었다. 호접이 했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백호의 반려이기 때문에 결코 백성들 앞에 소심한 태도를 보이면 안 된다는 말.

그녀의 앞으로 다가온 것은 샘의 정령이었다. 긴 물빛 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은 방글거리며 눈을 마주쳤다.

“반려, 연화 님이십니까?”

청수희가 어딘가 능구렁이 같은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물었다. 자신의 이름은 밝히지 않은 채다. 연화는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대의 이름은 어찌되는지요?”

“아, 저는.”

샘의 정령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랫사람으로 꽤 무례한 짓이다. 그녀는 애교 있는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 절을 했다.

“샘의 정령, 청수희라고 하옵니다. 반려를 뵙습니다.”

“백호 님의 반려, 연화라고 합니다.”

그때야 비로소 연화가 마주 목례를 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백호가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 순순하지 않은 연화의 태도에 청수희의 눈이 반짝였다. 이 우아한 인간 여인이 바로 소문의 그 여인이란 말이렷다. 샘의 여인은 곁눈질로 백호를 훔쳐보았다. 예상대로 백호의 미간에는 흡족함과 애정, 근심이 뒤섞여 흐르고 있었다.

‘저것이 또 마음을 훔쳐보려 하는군.’

백호는 청수희의 기색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연화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 안에 안았다.

샘의 정령은 백성이라 해도 마냥 쉬운 상대는 아니다. 특히나 요즘처럼 마음에 근심과 의문이 가득할 때는 더욱 그렇다.

최근 며칠 백호는 자꾸 의문이 들었다. 손 안에서 연화를 놓을 수가 없었다. 인간의 작은 여인이 힘들어 해서 관계를 자제할 정도다.

신령계에도 아름다운 여인은 많다. 인품이 훌륭한 여인 역시 많다. 하지만 백호는 연화에게 속수무책으로 마음을 빼앗겼고,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가느다란 뼈대와 매끄러운 피부, 연화는 분명 미인이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이유가 될 수 없었다. 혹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연화는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여태까지 이런 의문을 품은 적이 없었다. 그는 사방신이었고 자신이 사랑할 상대를 자유롭게 골랐다. 상대방은 당연히 신에게 복종할 뿐이었다.

이런 의문을 품는 것 자체가 사방신으로서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지경이었다. 청수희의 꿰뚫어보는 듯한 눈매가 달갑지 않은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백호 님.”

잠깐 생각에 빠진 백호의 손등을 연화가 자신의 작은 손으로 덮었다. 그녀는 백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접문했고, 연회장 안의 원로들이 다 같이 헛숨을 들이켰다.

“누구, 할 말 있는 건가?”

원로들은 신에게 인간의 반려가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를 싫어한다. 다는 아니지만 대부분이 그랬다. 백호는 한쪽 눈썹을 올리며 항의하고자 하는 자를 찾았다. 하지만 누구도 함부로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다들 눈치만 볼 뿐이었다.

청수희만이 빙글빙글 웃으며 두 사람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백호의 반듯하고 높은 이마에 어린 애정과 연화에게 어린 근심을 번갈아 살폈다.

‘저 천지분간 못 하는 사방신에게도 임자가 나타났나 보군.’

간만에 재미있는 일이다. 신령계를 다스리는 자에게 나타난 반려가 인간 여인이다. 청룡과 분쟁이 있게 될까? 그녀는 눈을 반짝였다.

밤이 되고 연회가 무르익었다. 백호에게 예를 갖추기 위해 모였다지만, 열두 달에 한 번, 전 신령계에 퍼져 사는 원로들이 얼굴을 보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이기도 했다.

달이 높고 은하수가 흐르는 밤이었다. 모두가 술을 마시고 진귀한 음식들을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지엄한 사방신의 앞임에도 흥에 겨워 춤을 추는 너구리 신령도 있었다.

백호는 껄껄 웃으면서 그를 놀릴 뿐 딱히 제지하지도 않았다. 연화 역시 절반쯤 너구리화 되어 춤을 추는 원로를 보며 아주 오랜만에 웃음을 지었다. 그의 앞에는 곰 모습의 원로가 손 하나로 너구리 신령과 함께 놀아주고 있었다.

술과 음식이 함께 하는 잔치자리나 다름없어서 연화는 매우 기쁘고 재미있게 자리를 즐겼다.

백호는 연화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더운지 머리카락 몇 올이 뺨에 붙어 있었다.

“술이 나쁘지 않지?”

“예. 그리 취하지도 않는 듯합니다.”

술은 향이 좋지만 꽤 독하다. 쓰지 않아서 괜찮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연화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조금 풀어진 채로 헤실거리며 웃었다.

말은 안 취했다고 하는데 영락없이 취했구나 싶어서 백호는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웃음이 많아진 얼굴도 귀여웠다.

“연회 자리라 하여 긴장했는데……. 모두들 좋은 분이신 듯합니다.”

“인간계와는 다르지. 별것도 아닌 것들이 허례만 잔뜩 챙겨대는 그런 놈들하고는.”

백호는 코웃음을 치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리 속세에 물들었다 한들 신령들은 인간과 다르다. 영혼 자체가 맑고 푸른 자들이다.

“인간 놈들이란 공물은 허술히 하면서 그저 제놈들이 몇 번 절을 하느냐를 가지고 싸우니까 말이야.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

“그렇군요.”

“허례허식을 말라 그렇게 일러도 고쳐지질 않아. 오히려 그걸 핑계 삼아 잔인한 짓들을 벌이지. 못난 것들.”

“하지만 백호 님의 반려는 인간이시잖습니까?”

곁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백호가 시선을 돌렸다. 아름다운 푸른 머리의 여인이 방긋거리며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인간의 험담을 하시면 연화 님께 미움받으셔요.”

웃음기 어린 목소리였다. 놀리는 듯한 태도에 연화는 손을 저었다.

“아뇨, 아닙니다. 맞는 말씀이신 걸요. 인간계란…… 좀 그런 면이 있지요.”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녀는 청수희에게 맑은 술 한 잔을 건넸다.

“아까는 실례했습니다.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 제가 긴장해서.”

“아닙니다. 반려님이시니 마땅한 말씀이셨지요. 무례는 제가 저질렀습니다.”

샘의 정령은 술을 받아 마시고 한 잔을 돌려주었다. 그것을 받아 마신 뒤 연화는 손부채질을 했다.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더워하는 것을 보고 호접이 나타나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취했는지 발걸음이 단정치 못했다.

“잠시 창가에 가서 밤바람을 쐬시지요.”

“고맙습니다, 호접 님.”

연화가 발그레해진 볼에 연신 부채질을 하며 창가로 가서 기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청수희가 은근하게 백호에게 말을 붙였다.

“연화 님은 근심이 있으신 듯합니다.”

“……자꾸 마음을 비춰보려고 수작하는 게냐?”

“수작이 아니라, 아시잖습니까. 물은 그저 그 자리에서 비출 뿐인 것을요.”

깊고 깊은 샘의 본성. 백호는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청수희는 연화와 나눴던 잔을 들고 그 잔에 남은 술방울을 손끝에 묻혔다.

“인간계에는, 연화 님의 남은 미련이 있으신 게지요.”

“…….”

“이 물기가 제게 알려준답니다.”

젖은 손끝을 들고 샘의 정령은 작게 웃었다. 무관심한 척하고 있지만 백호의 얼굴이 미세하게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사방신은 힘이 세지만 백호는 음흉하지 못하다. 청룡보다는 훨씬 상대하기 좋고 착한 신이다. 청수희는 백호를 제법 좋아했다. 그녀는 호의를 베풀기로 했다.

“연화 님의 근심, 제가 잠시간이나마 풀어드릴 수 있답니다. 완전한 해결은 안 되지만요.”

“……정말이냐?”

“제가 왜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너는 보답 없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잖아.”

“이미 보답은 받았습니다. 연화 님께서 제게 술 한 잔을 내리셨으니까요.”

“희한하군. 너답지 않게 후하구나.”

“싫으십니까?”

“그럴 리가.”

청수희는 자신의 발치에 따라온 물그릇을 가까이 당겼다. 그녀는 이제 흥미가 동하는 듯한 얼굴의 백호를 보며 말했다.

“연회가 끝나면 연화 님과 함께 제 거처로 오십시오. 연화 님의 소원 하나 정도는 들어드리지요.”

그녀의 몸 끄트머리부터 물그릇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금수의 붉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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