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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26화 (26/113)

26화

생명력이 부풀어 오르는 봄과 여름의 경계에 신령계의 모든 원로들이 선물을 가지고 백호를 찾는다. 신령계의 원로들은 덕을 많이 쌓아 힘이 강해진 신령들로, 그만큼 나이도 까마득하게 많았다. 몇몇 원로는 백호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

이미 오후가 시작되어 햇살이 낮아지기 시작한 시간에 연화는 뜻밖의 말을 들었다.

“그래, 오늘 오후가 원로들이 방문하는 때란다. 평소에는 내가 멋대로 찾아가긴 하는데, 그 녀석들도 일단 군주인 내게 예를 갖춰야지. 열두 달에 한 번뿐이다만.”

백호는 자유분방한 신이다. 그는 필요한 게 있을 때마다 불쑥불쑥 원로들의 영지에 찾아가 놀래키곤 했는데, 일 년에 단 하루 만은 그들이 전부 모여 군주에게 인사를 드려야 하는 날이었다.

“어쩐지…… 호접 님도 그렇고 오늘 이른 아침부터 모두가 바쁘셨어요.”

연화가 중얼거렸다. 아침부터 아무도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할 만큼 모두가 정신없이 다녔다.

열두 달에 한 번 있는 행사라니 시녀와 시종들이 꼭두새벽부터 바빴던 것도 당연했다. 영토 안의 귀빈들이 모두 모이는 날이었다. 상황을 이해한 연화는 손을 꼭 맞잡았다.

“너무 말씀이 갑작스러우십니다…….”

며칠 전에라도 말을 해줄 것이지. 그러니까, 인간계로 말하자면 왕을 보러 귀족들이 모이는 자리라는 말이렷다. 말만 들어도 조금 식은땀이 났다.

“무슨 상관이냐, 너는 옷만 차려입고 바로 연회 자리로 가면 되는데.”

백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즉흥적인 성격이었고 연화를 그 자리에 데려가겠다는 생각도 오늘 아침에서야 했다. 지난번 사영의 일 이후로 유달리 그녀가 어두워 보여서 많은 금은보화와 진수성찬이 있는 연회 자리에 데려가면 조금 밝아질까 싶어서였다.

“그런 자리에 제가…….”

“넌 내 반려니 당연히 참석해야지.”

“하, 하지만…….”

연화는 아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소박한 사람들과 살아온 여인이었다. 심지어 불과 얼마 전 얼마나 신령의 일족들이 자신을 싫어하는지도 체감했다. 그녀는 조금 불안해져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두려워할 것 없다. 내 곁에 앉아만 있어. 널 싫어했던 건 뱀의 일족뿐이다. 욕심들이 앞서서 그랬던 게지.”

백호는 미소를 지으며 연화를 끌어안았다. 인간인 그녀가 낯설어 할 일임은 당연했다. 원래 일시적인 반려는 공식적인 자리에 대동하지 않아도 상관없었지만 어쩐지 연화는 데리고 나가고 싶었다.

‘인간이라고 또 못마땅해하는 것들이 있기야 하겠다만.’

거기에 생각이 미쳐서 백호는 혀를 찼다. 못난 놈들. 그러나 애초에 뭐라 말을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먼저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연화는 동그란 눈을 위로 뜨고 백호를 올려다보았다. 백호가 워낙 장신이라서 연화의 머리는 그의 가슴께에도 닿지 않았다. 불어오는 아침 바람이 창 너머로 백호의 투명한 흰 머리카락을 날렸다. 시리게 푸른 눈이 다정하게 가늘어졌다. 남자는 거대하고 온화했다.

“알겠습니다.”

자신의 뺨을 감싸는 큰 손에 기대면서 인간의 여인은 미소를 지었다. 손 안에 한 뺨이 완전히 감싸이고도 남는 작은 얼굴을 내려다보며 신은 알 수 없이 가슴을 울리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벅찬 사랑스러움에 백호는 손을 내밀어 연화를 끌어안았다. 가느다란 몸이 부서질까 차마 세게 안지도 못하고 그는 조심스레 그녀의 반듯한 이마 위에 입을 맞췄다.

“호접, 신령계의 안주인다운 차림새를 부탁한다.”

호접을 위시한 시녀들이 다가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이미 그녀들의 손에는 장신구함과 옷가지가 곱게 개어져 들려 있었다.

“차림을 정갈히 하시고 바로 연회 장소로 가시면 됩니다.”

사실 이미 연회는 시작했지만……이라는 말을 목으로 삼키면서 호접이 미소를 지었다. 하여간, 백호는 항상 제 시간에 행사를 시작하는 법이 없었다. 본인도 이미 늦었으면서 반려까지 단장시켜 데리고 오라는데, 아마 연화가 도착하면 연회는 절정에 달해 있을 시간이었다.

향내 나는 물로 가벼운 목욕을 한 뒤 호접은 신령계의 시원한 바람을 손 안에 쥐고 여인의 머리카락 안으로 휘저었다. 바람이 까르르 웃으며 연화의 머리카락에서 습기를 날리고 지나갔다. 젖었던 긴 머리가 금세 말랐다.

“호접 님, 제가 이런 자리에 나가도 괜찮은 걸까요.”

아무래도 연화는 불안한 모양이었다. 호접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카락 위로 구슬을 엮은 머리장식을 둘러주었다.

연화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감싸고 떨어지는 보석구슬의 감촉에 흠칫했다. 호접은 직접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작은 귀에 녹색 비취로 만든 귀걸이를 걸어주었다. 명주실을 꼬아 만든 매듭줄기가 귀 밑으로 늘어졌다. 뒤에서는 그녀의 긴 흑발을 빗기며 시녀들이 조용히 머리 단장에 열중했다.

“이 신령계에 백호 님의 명을 거역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답니다. 그분께서 허락하셨다면 아무런 부담 없이 함께 나아가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식 반려가 아니다. 연화는 언제나 그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붉은 달이 지면 인간계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 주제넘은 것을 바랄 수는 없었다.

말끝이 작게 흐려졌어도 무슨 뜻인지 호접은 알았다. 나비의 신령은 그저 빙긋이 웃을 뿐 특별히 위로를 하려 들지는 않았다.

색색의 작고 작은 구슬들을 엮은 줄이 긴 머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여러 줄기로 땋은 머리카락을 모양을 내어 묶고, 그 사이에 틈틈이 반짝이는 옥비녀를 꽂아 넣었다.

과하게 무겁지 않도록, 과하게 정식으로 치장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해야 했다. 연화는 어쨌든 정식 반려는 아니었으니까.

“백호 님께서 생각이 있으실 겁니다.”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하고 호접은 슬쩍 경대를 내려다보았다.

경대에는 백호의 반려들만이 착용할 수 있는 붉은 노리개가 놓여 있었다. 그 자체가 힘은 없으되 백호의 정인임을 상징하는 노리개였다. 이 경대는 대대로 사방신의 반려들을 위해 이 자리에 놓여 있었던 물건이었고 당연히 경대의 장신구들은 반려만이 착용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놀랐지.’

호접은 속으로 인정했다. 설마 원로들을 대접하는 자리에 연화를 데리고 나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백호가 푹 빠진 듯한 눈치이긴 했지만 여태까지 한 번도 없던 일이다. 인간의 여인을 신령계 원로들이 모이는 자리에 신의 반려로 데리고 나간다니.

호접 자신도 사실 연화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조용하고 우아한 여인이었다. 고향을 떠나와서인지 다소 우울한 그림자가 작은 얼굴에 어려 있었지만 백호를 볼 때면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다. 연화 역시 백호에게 마음을 품은 게 확실했다.

호접은 그런 면에 있어서 아주 귀신같이 예민한 편이었다.

“자, 옷을 입으실까요.”

속의를 입히고 그 위에 겹겹이 날아갈 듯 얇은 치마와 저고리를 입히고, 그 위에 화려한 장포를 입혔다. 허리에는 비단띠를 둘렀다. 가뜩이나 가느다란 연화의 허리가 버들가지같이 보였다. 입술 위에는 붉은 연지를 찍어 바르고 뺨에는 흰 분칠을 했다. 풀 먹인 명주실로 이마의 솜털을 살살 밀어 피부가 매끄러워 보였다.

어두운 남색 위에 반짝이는 금실로 수가 놓인 장포라 우아하면서도 위엄 있어 보였다. 호접은 뒤로 물러서서 만족스러운 얼굴로 연화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연화는 수줍게 웃었다.

“이렇게나 화려하게 치장한 것은 정말 생전 처음이라…… 조금 부끄럽네요.”

“자랑스러워하셔도 됩니다. 아주 아름다워요.”

연화는 생전 처음 해보는 치장에 오히려 조금 위축이 되었다. 백호는 객관적으로 대단한 미남이다. 상제가 직접 빚어낸 형상이니 오죽할까. 그의 곁에 앉아 다른 이들을 맞이한다니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 마지막으로 이 노리개입니다.”

붉은 명주실 매듭의 노리개 끝에는 푸른 구슬이 매달려 달랑거렸다. 백호의 눈 색깔과 닮아 있었다. 매듭에 흐르는 윤기가 워낙 아름다워서 연화는 잠시 넋을 잃었다.

“제가 걸어드릴게요.”

물어볼 필요까지 있을까. 호접은 웃음을 감추면서 붉은 노리개를 들어 연화의 허리춤에 매달았다. 완연한 사방신의 반려로 모자람 없는 차림새였다.

자신이 단장시켜 놓고도 마음에 들어서 호접은 뒤로 물러서서 흐뭇하게 웃었다. 자그마한 인간의 여인은 아주 위엄 있고 화려했다. 그녀는 나비 날개를 팔락거리며 허리를 굽혔다. 마치 정식 반려에게 하듯 깍듯하고 단정한 자세였다.

“회장으로 납시지요.”

***

“…….”

“호 님…….”

“백호 님…….”

“백호 님……. 듣고 계십니까?”

“백호 님!”

곁에서 들리는 큰 소리에 백호가 흠칫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앞에는 신령계의 원로들이 모여 앉아 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구리, 곰, 사슴 등 온갖 짐승들의 신령과 태산 바위와 나무의 정령 등 온갖 자들이 모여 넓디넓은 연회장이 좁았다. 거대한 곰의 모습 그대로 온 원로부터 적당한 형상으로 나타난 원로까지 형태도 다양했다. 워낙 여럿이 모이다 보니 한마디씩만 해도 연회장은 시끄러웠다.

백호는 고개를 기울여 앞을 보았다. 그들이 하나씩 바쳐 올린 진귀한 보물들과 금은보화가 백호의 앞에 차례로 나열되어 있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하지만 백호는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신령들 주제에 어지간히들 쳐 모았구나. 욕심들 하고는.”

“백, 백호 님……. 그것이 아니라.”

“도를 닦아 한 단계 위로 나아갈 생각은 안 하고 이렇게들 궁둥이 밑에 깔고들 앉았으니 원.”

혀를 차는 신의 말에 신령들은 대답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본래 신령들이란 도를 닦고 또 닦아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 자들, 이곳에 모인 원로들은 그런 면에 있어서는 가히 몇백 년 동안 계속되는 실패만 겪고 있는 실패자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힘은 강하지만 동시에 생에 대한 미련도 놓지 못하는 자들이 오래도록 살아남아 되는 게 신령계의 원로였기 때문이었다.

공물을 바쳐도 꾸지람이다. 원로들이 속으로 궁시렁거리는 소리를 뻔히 알면서도 백호는 말을 거두지 않았다.

“못난 것들. 그저 속세에 미련을 못 버려서.”

백호가 혀를 쯧쯧 찼다. 홍진의 세상에 미련을 못 버리는 원로들은 인간계를 들여다보며 거기에 영향을 받을수록 더 우화등선과 멀어진다.

그는 옆으로 비스듬히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그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지만, 단 한 명, 긴 청색 머리의 여인만이 빙긋이 웃으며 백호를 마주보았다.

금수의 붉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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